1부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밝은 시력을 잃다
뭘 웃어. 느닷없이 멈춰 서는 바람에 단단히 깍지 낀 손가락이 하나씩 차례로 스르르 풀린다. 딱 한 번 숨 쉴 동안만큼 어리둥절해하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그녀의 엄지손가락과 내 새끼손가락마저도 이내 풀리고 갈 곳 없는 두 사람의 손은 팔과 함께 허공에서 흔들린다. 따분한 순간을 무마하려 들지도 않아서 급작스레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아련한 목소리가 들린다. 왼쪽 어깨가 뒤로 젖혀져 무심결에 반쯤 돌아보았다. 가늘게 치켜뜬 눈꺼풀이 실룩거린다. 잿빛으로 은은하게 물든 크고 해맑은 눈동자가 아래 눈꺼풀에 가려져 자그마하게 보인다. 그리운 눈동자가 차가운 포도 알맹이 표면처럼 어슴푸레하게 그늘져 있다. 또한 애처로우리만치 확연히 예각銳角을 그리며 영롱하게 빛나는 도톰하고 둥근 입술 끝에는 새까만 머리카락 한두 올이 물려 있다. 선명하게 금을 그은 듯이 하얀 뺨의 굴곡을 따라서 옆으로 흩날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목덜미의 파르스름한 정맥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 입술이 두 번 부르르 떨리더니 ‘어째서, 항상’이라며 신음하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서로 속마음을 터놓지 않아 생긴 거리는 그대로 마음의 벽이 되어 식어가고, 쓰디쓴 마음은 거멓게 타들어간다. 사랑하는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아니다. 부득이한 분노도 아니다. 달콤한 눈짓을 주고받으며 슬며시 변명의 여지를 만든 뒤에만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질구레한 일로 으르렁대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직업상 남 앞에 나설 적마다 한시도 거르지 않고 씽긋 미소 짓는 여인일 것이다. 초조한가? 다시금 여인의 입술이, 목이 한번 부르르 떨리더니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는 뭔가를 탁 갈랐다. 아득히 먼 빛바랜 거리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집중해. 그녀만 봐. 궁금해서 좀이 쑤시지만 꾹 참고 그럴싸하게 둘러댈 말을 궁리해서 깐깐하게 다듬어야 했다. 눈치 채지 못하게 이를 악물었다.
심한 고수머리에 둥근 안경 속의 눈이 줄기차게 웃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 늙은 안과의사는 코와 입, 손, 심지어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오동포동하고 둥그스름하며, 손발이 짧아서 걸음걸이나 동작이 뒤뚱뒤뚱한다. 까불까불하는 아이라면 누구나 악의 없이 빵 터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생김새와는 딴판으로 낮고 중후한 미성美聲과 자유롭고 소탈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측정기에 들어온 붉은 등이 꺼지지 않아서 살짝 겁먹은 열네 살짜리 아이가 뒤돌아보자마자 말했다. 자, 아타루, 저기 제일 끝에 있는 책장이 보이지. 그래, 그 크림색 책장. 맞아, 응, 거기 제일 오른쪽에 새빨간 파일이 있지. 책등의 글자를 읽을 수 있겠니. 불쑥 질문해서 반사적으로 일본안과학회 총회, 운영사무국 제17보報까지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자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 의사는 가늘게 실눈을 뜨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네 눈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좋다는 증거이니 아무 걱정할 것 없단다.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뜻이니까. 낭랑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달래지만 가슴 언저리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기쁜 듯이 보였다. 자칫하면 시력이 3.5 이상일걸.
2.0은 지금까지 학교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 음, 정확히 말해서 아프리카의 대평원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성싶구나. 탄식까지는 하지 않게끔 신중하게 숨을 고른 뒤 정색하며 말을 잇는다. 낮고 살짝 쉰 목소리로, 그러나 놀라지 않도록 점점 더 자상하게 속삭이는 음색으로 말한다. 지금의 일본에서 살아갈 수 있는 눈이 아니란다. 여기는 아프리카와 달리 모든 것이 가깝기 때문에 너는 허구한 날 무리해서 근처를 보는 셈이지. 훗날 언젠가…… 그래, 20대 후반쯤 급속히 노안이 올지도 몰라.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니 아직은 안심해도 되지만 그때는 조심하렴.
시력이 3.0 이상이란 어떤 뜻인가 하면 그 촌구석 안과의 헌신적인 노 의사가 말한 대로 아프리카 대평원에 사는 사람들이나 몽골 기마민족 사이에서는 보통이거나 다소 눈이 나쁜 편이다. 그들의 시력은 3~7이라고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예컨대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흔히 보는 아프리카계 탤런트나 몽골계 씨름꾼과는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고, 정확히 3.5라면 십중팔구는 이긴다. 그러나 그 의사의 말마따나 이런 비좁은 섬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자리 잡고 사는 마당에 그렇게 좋은 시력은 개 발의 편자다.
기억에 의지해서 쓰겠다. 그 책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민족들 중에서도 마사이족의 시력은 정평이 나서 12.0이라는 수치는 저리 가라인 수렵자도 있다고 한다. 과연 지금도 그럴까. 근대화가 시작되고 여러 해를 거쳐서 도시에 정착한 마사이족 사람들의 평균 시력은 1.0 정도다. 결국 유전적 요소라기보다는 그저 사는 장소와 생활양식에 따라서 시력이 단련되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혹시 쓰가루津軽의 외가 쪽 영향인가. 역사서를 찾아보면 이들은 15세기 전후에 이른바 북해무역北海貿易에 종사했다는데, 반골기질이 다분해서 장사가 신통치 않을 때는 돌변하여 칼을 빼들고 해적행위도 불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니면 친가의 영향인가. 마타기〔일본 도호쿠東北 지방 산간에 사는 사냥꾼들〕 촌락이 많은 지금의 기타아키타北秋田 시에 이웃해 있으며, 눈이 많이 내리는 두메산골이어서 예전에는 야나기타 구니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고장에서 촌장을 배출한 유전자라면 허무맹랑한 추측은 아니다. 하지만 생활습관 때문이라면 얘기가 묘해진다. 대체로 한산하다고는 하나 그렇게 한없이 탁 트인 시야가 펼쳐져 있을 리도 없는 다소 영락한 지방도시를 전전하며 자란 이 몸에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으므로.
설사 그렇다고 해도 독자들은 난처할 것이다. 그런 아프리카인이나 몽골인, 홋코쿠北國〔오늘날의 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 니가타 지방을 가리키는 호쿠리쿠北陸의 옛 지명〕의 해적이나 마타기의 사냥꾼들과 비교해도 판별하기가 힘드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야마테센山手線 차량의 맨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자. 거기에서 제일 끝 통로 천장에 매단 광고의 첫 줄부터 글자가 깨알만해서 분간이 안 가는 배포용인지 뭔지 모를 암호 같은 기호까지 단숨에 읽는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갔던 가장 넓은 슈퍼마켓을 떠올려보라. 입구에 서서 일부러 가만히 응시하지 않아도 가장 먼 진열장에 놓인 낫토나 장아찌가 몇 그램짜리인지, 첨가물은 무엇인지, 포장에 적힌 표시를 낱낱이 읽을 수 있다. 물론 몸 상태에 따라서도 좌우되지만 설날 국립경기장의 정면에 있는 특별관람석main stand의 꼭대기에 앉아서 천황배 쾌승을 놓고 싸우는 미우라 가즈요시의 목 주변에 면도한 뒤 희미하게 남은 수염을 셀 수 있다. 현역 시절의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부당한 판정에 애가 탔는지 손톱이 하얘지도록 움켜쥔 손가락이 생생히 보여서 손거스러미인가 하고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이제껏 유일하게 그 말을 믿어준 사람은 3.0의 시력을 가졌던 영어 선생님뿐이었다. 목욕탕에 들어가면 당연히 찰랑거리는 수면에서 김이 올라온다. 흡사 물안개나 안개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속에서 번쩍번쩍하고 투명하며 맑은 자그마한 빛이 무수히 알알이 솟구치며 명멸한다. 수은 같기도 하고 수정 같기도 한, 뭔가 이 세상 것이 아닌 물질이 무중력상태로 허공을 떠다니며 노닌다. 아름답게 반짝이며 하늘하늘 움직이는 모습이 몸이 야윌 정도로 시야를 괴롭히고 즐겁게 한다. 도취시키고 소름끼치게 하며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것도 밤마다 매일. 어릴 적부터 이 얘기만 하면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만 아니라 간혹 약물을 복용했는지, 제정신인지 의심을 했으므로 거의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시력만 되면 당연히 보이고, 물 분자가 분자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거대한 분자인 것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배우는 명백한 사실이다.
세계는 눈부셨다. 만물의 윤곽은 명징했다. 어둑어둑하게 흐린 하늘도, 잔뜩 찌푸린 날씨도 그리고 느긋하게 거니는 밤도, 이 명징함을 잃어버리게 하기에는 부족했다. 어떤 어둠도 완전한 어둠은 될 수 없고, 도처의 투명하고 무수한 것들을 또렷이 투영시킬 만큼 끊임없이 빛이 새어나왔다. 빛은 편재했다. 깊고 깊은 빛의 바다 밑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세계는 한없이 아름다웠으며 또 잔혹했다. 능히 꼼짝 못 하게 할 정도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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