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시인과 조각가
1
예술가라면 보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법이지만,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아 실눈을 뜨고 기숙학교에서 오 년을 보낸 뒤에야 근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로댕에게 이 말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는 흐릿한 앞을 바라보기보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북프랑스의 고도古都 보베가 자랑하는 생 피에르Saint-Pierre 대성당이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괴물처럼 보일 건축물이었다. 500피트 높이의 거대한 첨탑이 창공으로 솟은 이 고딕 양식의 걸작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성당을 목표로 1225년에 착공되었으나 총 세 세기에 걸쳐 두 차례나 붕괴된 끝에 1573년 결국 건축가들도 손을 들고 말았다. 그 뒤 남은 것은 돌과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위태로운 건물의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토박이들은 그 성당을 아예 의식하지 않거나 그런 거대한 건축물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반쯤만 인식하고 지나치곤 했다. 하지만 로댕에게 그것은 눈앞의 이해 안 되는 수업에서 벗어나 끝없는 호기심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주는 탈출구였다. 성당의 종교적 기능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벽에 새겨진 이야기들과 실내의 신비로운 어둠, 선과 아치, 그림자와 빛 같은 것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몸처럼 조화로운 균형을 이룬 모습이었다. 가시 모양의 기다란 회중석이 천장의 늑골에 박혀 있었고, 주 건물과 연결된 부벽扶壁들이 팔 또는 날개처럼 뻗어 있었고, 중앙 소실은 마치 심장 같았다. 중심을 잡기 위해 박아둔 기둥들이 영불 해협의 강풍에 흔들리는 모습에서는 평형 상태를 향한 인체의 간단없는 자기조정이 연상되었다.
건축논리를 헤아릴 만한 나이는 아직 못 되었지만, 1853년 기숙학교를 그만두고 떠나면서 그는 성당이 자신에게는 진정한 교육이었음을 깨달았다. 그후에도 그는 그곳을 찾아가 경외감에 ‘고개를 뒤로 치켜든 채’ 성당 외면을 살펴보고 내부의 비밀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신도들 틈에 끼어 예배에도 참석했지만 그곳이 신의 집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하는 것은 그곳의 형상 자체라고 생각했다.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François Auguste René Rodin은 1840년 11월 12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에밀 졸라Émile Zola·오딜롱 르동Odilon Redon·클로드 모네Claude Monet도 같은 해에 출생한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예술의 미래에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한 해였다. 하지만 이들 벨 에포크의 씨앗들은 보수적인 불모의 땅에서 싹을 틔우게 된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직후 루이 필리프 왕정기에 파리의 부패와 궁핍은 《악의 꽃Les Fleurs du Mal》과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에 묘사된 대로였다. 제조업 일자리들이 새로이 등장하며 수천 명의 이주 노동자들을 끌어모았으나 그들을 지탱해줄 사회 기반시설이 없었다. 이주민들은 떼를 지어 아파트에 입주해 침대와 음식은 물론 병균까지 서로 나누며 살았다. 범람하는 하수도에는 세균들이 번식해 들끓었고, 비좁은 중세의 거리들은 각종 질병의 근원지가 되었다. 콜레라와 매독이 군중 사이에 퍼져 나갔고 밀 품귀 사태로 빵 값이 치솟았으며 빈민과 상층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격차가 사상 최고로 벌어졌다.
걸인과 매춘부와 사생아가 날로 늘어나서 도시가 휘청거리던 그 무렵, 경찰관이던 로댕의 아버지는 일거리가 차고 넘쳤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번뇌에 찬 자베르 경감처럼, 장 바티스트 로댕Jean-Baptiste Rodin도 1832년 파리 봉기와 마침내 왕을 몰아낸 1848년 혁명 기간 내내 뚜쟁이와 매춘부들을 찾아 거리를 순찰했다. 한 점의 타협 없이 원칙과 권위를 중시하며 경찰 조직 내에서 꾸준히 승진을 거듭해온 장 바티스트에게 꼭 맞는 일이었다.
생 자크 로路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진 그해에, 장 바티스트와 그의 재봉사 아내 마리는 여덟 살의 오귀스트를 보베의 기숙학교로 보냈다. 귀여운 빨강 머리 소년 오귀스트는 보들레르Baudelaire가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발자크Balzac는 굶어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는 등 유혈 충돌이 계속되던 파리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지냈다.
오귀스트는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다. 수업을 곧잘 빼먹었으며, 특히 수학 과목의 성적이 나빴다. 보베는 아버지의 지위 상승에 걸맞은 교육을 오귀스트에게 제공했지만 비싼 학비가 가계에 짐이 될 때도 있었다. 오 년 후, 장 바티스트는 직업으로 연결되지도 않을 것 같은 교육에 더 이상 돈을 퍼붓지 않기로 결정하고 열네살의 오귀스트를 자퇴시켰다. 손으로 하는 일을 즐기는 기질이니 직업학교가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귀스트가 돌아왔을 때, 파리는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변해 있었다. 바로 전해에 프랑스의 신임 대통령 나폴레옹 3세Napoléon Ⅲ는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에게 파리 현대화 임무를 맡겼다. 실상 복원에 가까운 임무일 수도 있었다. 강박적 균형주의자였던 오스만 남작은 파리 대지를 커다란 격자 모양으로 자른 뒤, 계층을 기준으로 분리한 여러 개의 구區로 잘게 나눴다. 평탄한 지평선이 단정해 보인다는 이유로 언덕이며 산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렸고, 굽이진 옛 벽돌 길들도 바리케이드를 칠 수 없는 포장대로로 확장했다. 반란군의 진입은 막고 쇼핑객들은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시 전역에서 대대적인 청소 행사들이 잇달아 실시되었다. 토목기사들이 개발한 최신식 하수도 시스템에 관광객들이 몰려들었으며, 범죄자들이 꾀지 않도록 거리에 수천 개의 가스등을 설치해 밤거리를 밝혔다.
수만 채의 중세식 주택이 허물어진 자리에 균일한 석재 블록으로 지은 신新고전풍의 5층 아파트 건물들이 정연하게 줄을 지어 섰다. 새 건물들이 급속히 건축된 탓에 수많은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도시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전통주택들을 대체해 들어선 건물들은 어떤 시대와 장소에도 속하지 않은 듯한 이질감을 주었다. 거리에 끝없이 이어진 공사용 비계飛階들을 보며 발전보다는 학살된 마을의 잔해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았다.
수십 년간 계속된 오스만의 파리 재건 작업 덕분에 상업 조각공들은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건물을 지을 때 정면 코니스cornice와 각종 석조 장식이 빠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조각공들과 훗날의 시계공·목공·금속공들을 포함한 신흥계층의 주된 훈련소 역할을 맡은 곳이 바로 프티트 에콜Petite École이었다. 프티트 에콜은 수업료가 없었고 그보다 명성 높은 그랑드 에콜 데 보자르Grande École dees Beaux-Arts의 노동계급용 학교인 셈이었다. 그랑드 에콜이 르누아르Renoir·쇠라Seurat·부그로Bouguereau 등 성공한 미술가들을 배출한 반면, 못난 동생 격인 프티트 에콜은 본격적인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할 만한 인재는 거의 길러내지 못했다.
파리로 돌아온 로댕은 자신의 흥미나 야망을 분명히 알지도 못한 채 1854년 프티트 에콜에 등록했다. 그는 아직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았고, 예술이 종교·언어·법률에 비견할 수 있다는 그랑드 에콜 교수들의 고양된 의견에 동화되어 있지도 않았다. 로댕에게 조각은 이때나 이후로나 무엇보다도 그의 천직이었다.
불완전한 시력 덕분에 로댕에게 고도로 예민한 촉각 지성이 발달했을 수 있다고 추측하는 전기작가들일 있다. 그가 늘 진흙 덩이를 손에 쥐고 굴린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외알 안경을 구입했지만, 아주 작은 세부를 들여다볼 때만 사용했을 뿐, 주로 진흙에, 또는 어느 애인이 빈정대며 말했듯이 모델에 코를 박은 채 작업했다.
로댕은 대부분의 급우들처럼 회화를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입학했으나, 물감과 캔버스보다 종이와 연필이 싸다는 이유로 드로잉반을 선택했다. 그러나 전화위복으로 능력 있는 교수 오라스 르코크 드 부아도드랑Horace Lecoq de Boisbaudran 밑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먼저 눈을 고치고 이어서 진정으로 눈뜰 수 있었다.
로댕은 매일 아침 작업도구를 챙기고 가느다란 목에 목도리를 두른 다음 여덟시 드로잉 강의를 들으러 나섰다. 땅딸막한 체격에 얼굴이 부드러운 남자 르코크는 모사模寫 연습으로 수업을 시작하곤 했다. 예리한 관찰력이야말로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갖춘 불가결한 비밀이라고, 사물을 세부로 나누어 그 본질적 특성을 파악해야만 그림에 완전히 숙달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A지점에서 B지점까지 직선 방향으로 베껴내고, 이어서 대각선으로 부채꼴로 모사를 계속하다 보면 각 부분이 합쳐지면서 형체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르코크는 학생들 앞에 사물 하나를 놓고 종이에 그대로 모사하라고 일렀다. 교실 안을 돌면서 지켜보는 르코크의 눈에 대상의 테두리만 대충 스케치한 뒤 세부는 제멋대로 그려넣는 로댕의 모습이 들어왔다. 게으른 학생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왜 지시대로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로댕의 시력이 나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십 년 넘게 로댕을 괴롭혀온 병증, 즉 근시는 이렇게 한 차례의 모사 연습으로 진단되었다.
르코크가 수업을 통해 제시한 또 하나의 변혁적 계시를 로댕이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는 학생들을 루브르로 보내 회화 관찰 훈련을 시키곤 했다. 스케치를 할 것이 아니라, 비율과 패턴·색상 등을 암기하라는 지시였다. 로댕은 그곳 벤치에 앉아 티치아노Tiziano·렘브란트Rembrandt·루벤스Rubens의 그림들을 바라보며 사춘기를 보냈다. 그 영상들은 마치 음악처럼 그의 내면에서 열리고 확장되었다. 그는 그 그림들의 모든 붓질을 머릿속으로 따라 했으며, 저녁이 되어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기억을 불러내 그것을 복제해냈다.
시간이 나면 국립도서관에 가서 도록들을 보며 걸작 모사에 매진했다. 뛰어난 이탈리아 드로잉 화가들의 작품을 대략 스케치한 뒤, 집에 돌아와 기억해온 세부를 채워넣었다. 도서관을 하도 자주 들락거린 나머지, 열여섯 살 되던 해에는 인쇄실 출입을 공식으로 승인받은 최연소 학생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르코크의 모사 강조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복제하는 훈련만 시키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이 교수법은 여러 면에서 그랑드 에콜의 학사 과정과도 상통하는, 형태와 차원에 대한 전통적이고 수학적인 접근법이었으나 르코크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은 훗날 그것을 깨부술 수 있도록 형태의 근본 원리들을 숙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암기 훈련은 사실 그림의 각 특질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순간 그 그림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을 학생들에게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부드럽게 굽은 그 선이 고요한 느낌을 주었던가? 붓질의 진한 음영이 불안감을 일으켰던가? 어떤 색깔들이 추억을 불러왔던가? 예술가는 이런 연상들에 답할 수 있어야 내면의 감각들을 정확히 소환해 외면의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르코크의 현대적 방법론은 궁극적으로 예술가들이 외견상 나타나는 대로 엄밀하게 그리기보다는 자신의 감각과 시선에 느껴지고 보이는 바를 그릴 것을 독려했다.
로댕의 개성적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열여섯 살 무렵이었다. 이 시기의 노트에 이미 형태의 연속성과 실루엣에 몰두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 그는 훗날 그의 독특한 성향이 되어버린, 인물들을 결합한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인체들을 접합해 조화로운 집단으로 배치하는 방식은 점차 진화하여 〈칼레의 시민〉과 〈입맞춤〉 같은 걸작들에 이르면 둥근 모양이 된다.
르코크의 교훈은 로댕이 학교를 졸업하고 복제보다는 인상을 작품화하는 조각가로 명성을 쌓아간 이후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그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흉상 제작을 의뢰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위고가 진득하게 앉아 있기를 거부하자, 로댕은 수십 년 전 받은 훈련을 떠올렸다. 위고가 실내에서 걸어다니는 모습과 다른 방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머릿속에 포착해두고 나중에 기억을 불러내 작업을 했다. 르코크가 가르쳐준 대로, 눈으로 보는 것과 가슴으로 보는 것은 과연 달랐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