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다
숨어 산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즐거움도 마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 도움 없이도 혼자서 온전하게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은사입니다. 그런 은사들의 삶인 '은일'隱逸에 대해 두 차례로 나눠 다룰 텐데, 이 장에서는 먼저 '숨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 여러분과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숨어 산다는 것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저는 절연絕緣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할 땐 언제고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남겨두는 것은 숨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숨어살기'는 모든 인연을 다 끊는 데 있습니다.
무늬만 은사인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겉으로만 은사로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제대로 은일하려면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이 장에서는 옛사람들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숨어 살면서, 어떻게 음악으로 위로받고 스스로 즐겼는지를 그림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줄 없는 거문고를 타며 소리 없는 음악에 취하다
자, 첫 번째 작품을 보겠습니다. 이경윤李慶胤(1545~1611)이라는 조선 중기 사대부 화가의 작품입니다. 그냥 사대부가 아니라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의 아랫대로, 말하자면 왕실 즉 종실 화가였습니다. 벼슬에 제수될 때에는 학림정鶴林亭이라는, 왕실에 주는 봉호를 받았죠. 이분의 동생인 이영윤李英胤도 그림을 썩 잘 그렸습니다. 또 허주虛舟라는 호를 쓴 화가 이징李澄이 이경윤의 서자입니다.
이경윤이 그린 열몇 점의 작품이 함께 묶인 화첩이 있는데요.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 화첩의 한 편이 〈월하탄금月下彈琴〉인데, 이 그림에는 이경윤이 그렸다는 확실한 물적 증거나 낙관이 없습니다. 심적 증거만 있고 물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후대 화가들과 전문가들이 전칭작傳稱作이라고 해서, 이름 앞에 '전'傳자를 붙입니다. 우리가 옛 그림을 볼 때 '전 김홍도의 무슨 작품', '전 신윤복의 어떤 작품'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전'이란 전칭작, 즉 '그 사람이 그렸다고 말해지는 것으로 전하는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경윤의 〈월하탄금〉, 먼저 그림 좀 구경해볼까요. 보름달이 떴습니다. 험악한 절벽처럼 보이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뒤편에 아주 연한 먹으로, 담묵淡墨으로 그려진 산그림자 같은 것이 보입니다. 산의 나무에 그늘이 진 것이죠. 아마 달빛 때문에 그런 효과가 났을 겁니다. 명암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간색看色이 곁들여진 느낌입니다. 이 비탈길에 도인풍의 한 선비가 무릎 위에 거문고를 올려놓고 안장ㅆ습니다. 그 뒤에서 다동이 지금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적뒤적하다가 고개를 돌려 자기가 모시는 선비를 바라보는 풍경입니다.
자, 그림에 대한 설명이 됐죠? 이 정도면 특별히 의문을 가질 만한 요소가 없습니다.
이경윤이라는 화가의 화풍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전형적으로 조선의 앞선 시대 그림입니다. 사람의 옷이나 바위 등의 선이 매우 날카롭게 표현되었죠. 뾰족합니다. 구도로 심하지는 않지만 한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조선 초기 산수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도죠.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중국 명나라 때 절강성 지역의 항주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한 직업 화가들의 화풍, 이른바 절파화풍입니다. 이 절파화풍浙派畵風이 조선시대 초기 우리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시 그림을 볼까요. 지금 선비가 거문고를 켜고 있는데, 그 거문고를 자세히 한번 보십시오. 이 거문고, 뭔가 좀 이상합니다. 네, 줄이 없습니다. 줄이 없는 거문고를 뭐라고 하죠? 무현금無絃琴, 문자 그대로 '현이 없는 거문고'라는 얘기죠. 이 선비, 거문고에 줄도 없는데 지금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열심히 차를 끓이고 있는 다동은 거문고를 들고 나온 주인이 연주를 하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나 저제나 영 소리가 안 나는 겁니다. 그래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이런 세상에, 우리 주인께서 줄도 없는 거문고를 탄다고 저러고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순간을 포착한 장면인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당나라의 조하趙嘏라는 시인이 쓴 시가 있습니다.
이 선비가 왜 지금 무현금을 타고 있을까요? 실제로 이런 달밤에 줄이 없는 거문고를 타는 모습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끊임없이 그려져 왔습니다. 또 이런 정경을 시로 쓴 사람도 많은데요.
산그늘 아래에서 옛 가락 시를 읊고 古調詩吟山色裡
달이 활짝 밝을 때 무현금을 탄다네 無絃琴在月明中
이경윤의 그림을 보면 이 시의 정서를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 같지 않은가요? 거꾸로 그런 그림을 보고 당나라의 시인 조하가 또 이렇게 시를 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무현금'을 소재로 시를 쓰고 그림을 자주 그렸습니다.
무현금, 줄 없는 거문고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음악을, 소리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옛 그림에서 무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는 십중팔구 도연명陶淵明(365~427)입니다. 그는 중국 동진의 시인으로 은일거사隱逸居士라고 불렸죠. 팽택彭澤 현령을 지내다가 상급자가 별볼일없는 거문고를 가지고 위세를 부리고 부당한 지시와 요구를 일삼자, 어느 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부르고 낙향해버립니다.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면서 말이죠. 당시 봉록 즉 봉급이 쌀 다섯 말이었던 거죠. 이런 이유 때문에 도연명은 중국 문학과 예술에서 세상사의 시비와 대립과 갈등과 온갖 모순을 떠나 낙향해서 숨어 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받았습니다.
도연명은 고향에 와서 동쪽 울타리에 국화를 심었습니다. 특히 중양절, 문자 그대로 양기가 둘 겹치는 음력 9월 9일이면, 자기가 심은 국화로 담근 술을 걸러 마시고, 시를 쓰고, 거문고를 연주했다고 합니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采菊東籬下
유유히 한가롭게 남산을 바라본다 悠然見南山
정말 별 내용 아닌 것 같은 시잖아요? 동쪽 울타리에 심어놓은 국화를 따다가 저 멀리 남산을 넘나들 듯이 유연하게 바라본다는…. 그런데 이게 도연명의 음주시飮酒詩 중 가장 유명한 시구입니다.
'국화를 따서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은자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포즈입니다. 그래서 옛 그림에 국화가 있고 거기 앉아서 멀리 산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당연히 도연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양반이 국화주를 마시고 은근히 취홍이 도도해지면 반드시 거문고를 가져오라고 해서 연주를 했는데, 그 거문고에는 웬걸 줄이 없습니다. 무현금이죠. 그래서 동자가 묻습니다.
"아니 주인어른, 거문고에 줄이 없는데 어찌하여 연주를 한다고 하십니까?"
그러면 도연명이 대답합니다.
"거문고는 흥취만 얻으면 그뿐, 거문고 위의 줄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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