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소비사회와 가족의 해체
“넌 경차로 충분해!”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 이야기가 나온 지는 한참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 해체’가 국가 정책으로 관민일체가 되어 조용히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에는 정치인, 관료, 재계, 미디어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깊이 관여했다기보다 힘껏 추진해 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그 의도를 간과하고서 ‘공동체 회복’을 주창한다면 별로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에 일본인은 관과 민이 합심하여 가능한 한 활발하게 소비 활동을 하는 것을 국가 목표로 정했습니다. 국가 정책으로 가족을 조직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당시 총리였던 야스히로 나카소네는 복고적인 성향의 사람이었기에 그가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를 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위한 최적의 해법을 추구한 결과 가장 합리적인 정책은 ‘가족 해체’였습니다. 가족 간의 유대가 확고해서 가족들이 서로 연대하고 의지하게 되면 소비 활동이 활발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책으로 가족 해체가 추진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면 바로 수긍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차분히 그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경제성장을 위해서 가족 해체가 필요했던 것인가. 문제는 소비 단위입니다. ‘누가’ 또는 ‘무엇이’ 소비 활동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에서 소비 단위는 오랫동안 가족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저마다 노동을 해서 얼마간의 수익을 가게에 보탭니다. 그 수익은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 협력하여 거둔 것입니다. 직접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마당 청소를 하거나 구두를 닦아서 일하는 어른들을 돕고 있었으니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집안살림을 꾸리는 데 온 가족이 다 같이 참여했던 겁니다. 적어도 살림살이를 다 함께 염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익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도 가족 전체의 합의가 필요했습니다. 모두 열심히 일해서 거둔 소득이기 때문에 그 용도를 결정하는 것도 모두의 몫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족 안에서 합의가 형성되지 않는 한 소비 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값비싼 물품을 구매하는 경우에는 가족의 동의가 요구됩니다.
예를 들어 가끔 보너스가 들어왔을 때 아빠는 자동차를 바꾸자고 하고, 엄마는 냉장고 교체를 제안하고, 할머니는 불단을 새로 꾸미자 하고, 아이들은 새 자전거를 사자고 한다면 가족들이 모두 합의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방안이지만, 주말에 회전초밥집에 가서 가족 회식을 하고 보너스의 나머지는 우선 저축하는 식으로 결정 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소비 단위가 가족인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이 있음에도 시장에 투자되지 않고 저축으로 돌려지는 일은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저축 따위를 해서는 곤란하지요. 돈을 척척 시장에 갖다 주고서 줄줄이 상품을 구매해서 빨리 써버리고는 폐기하고 또 다른 물품을 구입하는 소비 사이클이 소비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 행위를 결정하는 데 가족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규칙은 방해가 될 뿐입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통근용으로 벤츠를 사고 싶다”라든가 “연인과 세부섬으로 바캉스를 떠나고 싶다”고 하면 가족 전체가 동의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문제 제기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제안자는 왜 그런 지출이 지금 필요한지에 대해 다른 가족들 앞에서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이라는 것이 소비 활동을 강하게 억제해 왔습니다.
친족 사이의 유대가 강했던 시대에는 좀 성가신 설교를 참아내기만 하면 부모의 비상금이나 검소한 친척한테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무이자, 무담보로 돈을 빌려 쓸 수 있는데 금융기관에서 높은 이자로 돈을 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도 친척이나 친구에게 돈을 빌리려고 하면 빌릴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그 소비행위의 필연성에 대한 채권자의 평가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십중팔구 “벤츠를 타고 다니다니, 분에 넘치는 짓이야. 넌 경차로도 충분해”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도록 듣게 될 것입니다. “세부섬?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분에 넘치는 사치잖아. 둘이서 일요일에 어디 온천에라도 다녀와”라고 하겠지요.
자신의 소비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적인 말을 듣는 것은 현대인에게 가장 참기 힘든 고통 중 하나입니다. 현대인은 자신의 소비 행위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자신의 개성에 관한 평가로 받아들이도록 교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당신이 어떤 상품을 구매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소비자 철학을 바탕으로 현대인의 정체성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가구에 둘러싸여 어떤 와인을 마시고, 어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어떤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는가? 그런 소비 행위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결정됩니다. 그래서 뭔가를 사들일 수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현대인은 그렇게 교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소비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한테서 부정적인 비판을 듣는 경우 이를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듣는 경우 이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받아들입니다. “벤츠”는 자신에 대한 자기 평가에 근거한 것이며, 가족이나 친척이 말하는 “경차로 족하다”는 것은 나에 대한 외부 평가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단순히 자신의 경제 상태에 대한 평가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서 열등하다는 선고로 받아들여 그 말에 인격적인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고리대금업체 제3금융권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곳에서는 상환 전망에 대해서는 조사하지만, 상품 구매의 적절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으니까요. 소비 행위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활동이 되면 소비 행위는 가능한 한 독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특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제품이나 다른 사람한테는 없는 제품을 선호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 특별할수록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의 기분은 공감을 얻기가 어려워집니다. “인터넷 경매에서 전부터 갖고 있었던 울트라맨 피규어가 오십만 엔에 나와 있으니까 저축한 돈을 빼서 사고 싶다”는 요청이 가족회의에서 합의를 얻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소비 행동의 자유를 확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구매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사는 것, 그 소비 활동이 분수에 맞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가족 해체는 필연적 귀결이었던 것입니다.
소비 주체가 가족에서 개인으로 바뀌기를 시장은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시장의 ‘빅뱅’을 가져 왔습니다. 네 명의 가족이 함께 살다가 가족이 해체되면, 집도 네 채, 냉장고도 네 개, 텔레비전도 네 대가 필요해집니다.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거품경제’라고 하는 소비 활동이 비정상적으로 과열되던 시기에 가족의 해체도 극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광고에 자주 등장하던 영화배우 이토이 시게사토의 대표적인 광고 문구가 “원하는 거승ㄹ 원해”이며, 그가 같은 시기에 쓴 소설 제목이 “가족 해체”인 것은 소비 문화의 본질을 훌륭하게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