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일어나지 못한 논쟁
테크노크라트적 환상
경제 발전, 즉 가난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과정에 대한 통상적 접근은 테크노크라트적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테크노크라트적 환상이란, 가난은 비료나 항생제 혹은 영양제와 같은 기술적인 해결책을 써야할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라는 생각이다. 세계은행이 우간다의 무벤데 지역에서 취한 행동에서도 그러한 생각이 드러난다. 그 밖에 게이츠 재단과 국제 연합, 미국 및 영국의 원조 기관을 비롯해 세계의 빈곤에 대처하는 기관들에서도 그와 똑같은 생각이 팽배해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테크노크라트적 접근은 이 책이 밝힐 빈곤의 진정한 원인을 무시한다.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권리를 박탈당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아무런 견제 없이 행사되는 국가의 권력이다. 가령 우간다 무벤데 지역의 경우, 향상된 임업 기술이 빈곤을 경감할 대책이었다. 하지만 그 대책은 무벤데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가 기술적인 것이라는 환상은 군대와 세계은행이 침해한 농민들의 권리를 아예 관심 밖으로 밀어냈다.
이러한 테크노크라트적 환상으로 인해 기술적 전문가들은 새로운 권력과 정당성을 무심코 국가에 안겨 준다. 그들에게 국가는 그저 기술적 해결책을 실행하는 기관일 뿐이기 때문이다. 테크노크라트적 접근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권력을 바라보는 태도가 끔찍할 정도로 순진하다. 권력이란 것이 자신을 제한하는 견제가 약해지거나 없어지더라도 전과 다름없이 저절로 호의적이고 인자할 것이라고 여긴다.
오래전 왕권신수설이 통하던 시절의 국왕들이 신의 권력을 휘둘렀다면, 요즘 우리 시대의 독재자들은 발전의 권력을 휘두른다. 오늘날의 발전이 묵시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기술적 전문가들을 자문가로 거느린 호의적인 독재자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지향을 <권위주의적 발전>이라고 부를 것이다. (권위주의적 발전의 동의어로 쓰이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라는 말 자체는 <전문가들의 지배>를 뜻하는 20세기 초의 신조어다.
사람들이 정말로 권리를 침해당해도 이를 묵과하고 기술적 해결책으로 눈을 돌리는 약삭빠른 속임수는 오늘날의 발전이 처해 있는 도덕적 비극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는 그 자체로 윤리적 목적이다. 가령 우간다 농민들은 멀쩡한 자기 집을 불살라 버리는 만행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런 권리는 그 자체로 윤리적 목적인 것이다. 빈곤에 대처하는 일에서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접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 접근하든 간에, 발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식이 있고, 반대로 침해하는 방식이 있다. 이 윤리적인 선택을 피할 방도는 없다. <증거에 바탕을 두는 비이데올로기적 정책>(오늘날 발전에 관한 논의에서 유행하는 문구다)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해서 이 선택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적 발전은 윤리적인 측면뿐 아니라 실용적인 차원에서도 비극이다. 장구한 역사와 최근의 경험이 말해 주듯,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문제를 잘 해결하는 시스템을 형성한다. 이러한 발전을 <자유로운 발전>이라고 부르자. 자유로운 발전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다양한 자생적 문제 해결책 중에서 선택할 권리를 주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에게 보상해 준다. 이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공적, 사적 문제 해결자들이 전문가들의 해결책을 집행하는 독재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한다. 앞으로 우리는 자유로운 발전이 어떻게 삐걱거리는 바퀴에 윤활유를 쳐주는지 볼 것이고, 반대로 권위주의적 발전이 어떻게 삐걱거리는 바퀴가 - 대개 경찰의 급습과 투옥을 통해 - 소리를 못 내도록 억압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테크노크라트적 환상은 빈곤이 전문적인 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결과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빈곤은 실제로 권리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전문적인 능력의 문제를 강조하면 권리의 문제를 악화시키게 된다. 빈곤의 기술적 문제(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기술적 해법의 부재)는 빈곤의 <증상>일 뿐이지, 빈곤의 <원인>이 아니다. 이 책은 빈곤의 원인을 정치적, 경제적 권리의 부재라고 주장한다. 권리의 부재는 자유로운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의 부재를 초래한다. 그로 말미암아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 줄 기술적 해법도 나올 수 없다. 전문가들은 독재자가 기술적 문제를 교정할 기술적 해결책을 성취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독재자는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독재자가 문제다.
익명의 권위주의자들
이와 같이 이 책이 주장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이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윤리적 근거와, 이론과, 경험적 증거가 과연 전문가들이 저지르는 전횡을 밝혀 주는지 아닌지 따져 볼 것이다.
독재자 주도의 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독재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들은 자유로운 시스템보다 독재자들이 더 빨리 빈곤 탈피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가난한 개인들보다 독재자가 거느린 전문가들이 빈곤 문제의 해결 방법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개인의 인권이 결핍된 상태에서도 발전이 성공한 사례들이 존재할뿐더러, 실제로 (부유한 사회든 가난한 사회든 간에) 개인들의 노력이 실패한 사례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재적 발전은 틀렸으며 자유로운 발전이 옳다고 주장하는 실제적인 논거에 접하더라도 우리의 직관은 그와 상반될 때가 많다.
수십 년 동안 발전 관계자들 사이에 두루 퍼져 있는 관념을 하나 꼽자면, 바로 <인자한 독재자>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 속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이 흐르고 있다. 지도자가 무제한적 권력을 가지더라도 그 권력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지도자의 의도는 얼마든지 좋은 것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전문가의 조언만 갖추어진다면 독재자도 얼마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재자가 통치하는 나라에 생긴 좋은 일(가령 높은 경제 성장률이나 신속한 보건 향상)을 독재자의 공으로 돌린다. 그러니까 결과가 좋으면 독재자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런 식의 주장이 옳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적 절차로 인한 교착 상태를 피하고 일이 되게 하려면 정말로 독재자가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적어도 따져보기는 해야 한다. 이 책은 그에 관해 따져 볼 것이다.
권위주의적 발전관이 옳다는 생각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묵시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러한 태도가 이기적인 게 아니라 이타적일 때도 많다. 의도적으로 독재자들의 편에 서기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그러는 경우가 많다. 인권을 짓밟는 독재를 은밀하게 치켜세우는 음모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경제학자들은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열정에 무심코 독재의 편에 서게 되는데, 그러한 경제학자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경제학자였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발전관
이 책은 권위주의적 발전에 관한 이야기다. 앞으로 권위주의적 발전과 자유로운 발전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1950년대에 발전 분야를 장악한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이미 끝난 상태였다. 권위주의 진영이 승리한 뒤였으니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살펴볼 텐데, 자유로운 발전이 옳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춰 계속 제기되었지만 발전 커뮤니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귀담아 듣지 않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려면, 1949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최초로 미국의 해외 원조 사업을 공표하면서 시작된 공식적 발전보다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또한 일찍이 20세기 초 공산주의 혁명 이전의 중국과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같은 곳에서 일어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발전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와 관련해 <발전 경제학자들>로 불리게 될 초기 세대 학자들 간의 논쟁도 살펴볼 것이다.
발전이라는 관념이 처음으로 형성되던 시기에 서방의 행위자들에게는 노골적인 인종주의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유로운 발전(즉, 개인의 권리와 발의에 기초한 발전)이 서구 밖 나머지 세계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가 어려웠다. 이때는 서방이 식민지, 반식민지적 행동으로 나머지 세계 빈자들의 권리를 대놓고 침해하던 때였다. 앞으로 우리는 식민지 국민들의 복지를 향상시킬 기술적 대책으로 등장한 테크노크라트적 발전이 어떻게 이러한 권리 침해를 은폐하는 수단이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노골적인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시들해지는 동안에도 테크노크라트적 발상의 매력은 여전했다. 역사상 각종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어느 쪽이 승리할지를 결정하는 정치적 동기가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테크노크라트적 발전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이해 집단들에게 매력적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서구의 인종주의자들과 식민주의자들도 테크노크라트적 발전을 좋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피해자들이었던 나머지 세계의 국가 지도자들도 그랬다. 세계의 빈곤 척결을 바라는 부유한 나라의 자선 사업가들과 인도주의자들에게도 테크노크라트적 발전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빈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부국들의 외교 정책과 국가 안보상의 필요만을 중시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다.
테크노크라트적 발전은 내가 대단히 중시하는 집단인 발전 전문가들에게도 당연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앞으로 1950년대에 발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될 무렵과 그 이전에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발전 전문가로 임명되고자 하는 선교사적인 열망에 매혹됐는지, 반면 지금은 잊혔지만 용감한 소수의 경제학자들이 그에 어떻게 저항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대다수 논평가들은 냉전기 미국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어느 나라가 해외 원조(저발전국들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부국 정부의 공여금)를 받을 것이며 또 얼마나 받을 것인지가 결정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한 원조를 정당화하는 생각이 정치적으로도 냉전기 열강들에게 편리한 것이었는지 여부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따져 볼 수 있다. 실제로 해외 원조는 냉전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정치적 편의에 따라 결정됐다는 것이 드러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정치적 이해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정치적 동기가 깔린 생각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의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정치적 의제가 무조건 이타적 의제를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모든 생각과 의견을 놓고 그 자체로 무엇이 좋고 나쁜지 거론하고자 한다. 다만 그러한 생각과 의견 자체의 좋고 나쁨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떄가 많은데, 정치적 동기를 보면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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