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삼국 시대 철학
개요
한국 철학사 강의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만날 철학자는 삼국 시대 철학자, 그중에서도 신라의 불교 철학자 원효元曉(617~686)입니다. 그런데 한국 역사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왜 삼국 시대 이전의 철학, 그러니까 단군 신화나 삼국의 건국 신화부터 이야기하지 않는지 의아해 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 철학사 강의를 시작하면서 고조선의 철학이라든지 단군 신화의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 속에 철학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다든지 또는 그 자체가 철학적 사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기원을 묻는 철학적 질문,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물음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철학적 물음에 부합합니다. 그렇지만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철학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강의에서 신화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비슷한 경우를 들자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서양 철학 26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입니다. 흔히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처음 한 말로 알려져 있죠. 그러나 그리스 역사를 조금 깊이 알고 있는 이들은 이 말이 본래 델포이 신전의 벽에 쓰인 글귀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서양 철학을 기술할 때 그 누구도 델포이 신전의 철학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과 똑같은 문구라 하더라도 델포이 신전의 글귀는 신탁이기 때문입니다. 신탁은 신의 말을 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탁을 전하는 사람은 신의 명령, 그러니까 신의 권위에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델포이 신전 벽의 글귀는 철학적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요. 신탁은 인간 이성 너머에 있는 신의 명령이죠. 그 때문에 이 글귀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파되면서 비로소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양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신탁과 철학적 명제의 경계를 드러내기 위해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사례로 들었습니다.
이 강의에서 삼국 시대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그 이전 신화에 등장하는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는 까닭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신화와 철학의 차이는 신탁과 철학적 명제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신화는 과학 이전의 미개한 사유방식이라거나 철학보다 낮은 수준의 사유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류가 전혀 다른 것들을 비교하면서 우열을 논하는 것은 과학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철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화와 철학, 그리고 과학은 모두 인류 문명의 산물입니다. 그 어느 것도 다른 것과 비교해서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화의 역사가 철학보다 오래된 것은 분명하고, 근대 이전에는 철학과 과학이 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니 신화가 가장 오래된 사유 형태이고, 과학과 한 몸이었던 철학이 그다음이고, 근대과학은 그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와 철학의 역사, 과학의 역사는 출발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사와 한국 철학사의 출발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삼국 시대는 불교와 유학과 도교가 세 나라에 나름대로 뿌리를 내렸다는 점에서 삼교가 균형을 이룬 시대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다양한 세계관이 공존했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에 비해 고려 시대에는 불교,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만 존중되고 다른 종교는 거의 백안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려 말에 회헌晦軒 안향安珦이나 상당上黨 백이정白頤正 같은 유학자들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할 때만 해도 유학은 설 자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향이 「느낀 바 있어 짓다[有感]」라는 시에서 “향등 걸린 곳곳마다 부처한테 기도하고 집집마다 노래하며 귀신에게 기도하는데, 몇 칸 안 되는 공자의 사당에는 인적 없이 가을 풀만 무성하구나[香燈處處皆祈佛 絃管家家競祀神 唯有數間夫子廟 滿庭秋草寂無人]” 하면서 한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유교의 경전을 가르쳤습니다. 『논어』나 『맹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유교 경전을 습득하고 실행하겠다는 맹서를 새긴 신라 때의 비석)을 비롯하여 여러 금석문을 보면 오경五經(유가의 다섯 가지 핵심 경서인 『역경易經』 · 『서경書經』 · 『시경詩經』 · 『예기禮記』 · 『춘추春秋』)에 해당하는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백제에는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가 있었어요.
그러나 고대에 한어漢語를 익힌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을 알기 위해서였죠. 예컨대 중국에 가서 출세를 도모하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응대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를 소통의 수단으로 익혔을 뿐, 텍스트 자체의 내용을 깊이 있게 파고든 경우는 드뭅니다.
유학만 놓고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대에는 최치원 같은 유학자가 나와서 상당히 약진한 측면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는 그 장구한 역사와 문화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유학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는 불교의 시대로 국가의 모든 대소사가 불교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같은 승려가 화폐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불교 국가는 불교 사원에 부富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국가 경제가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유독 고려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당나라도 그랬습니다.
당나라 무종 때 강제로 환속시킨 승려의 수가 26만 명이라고 합니다. 환속 승려의 수와 실제 승려의 수를 합하면 대략 백성의 15퍼센트가 승려였다고 하죠.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가 이를 격렬하게 비판했어요. 노동자, 농민 같은 생산자의 처지에서 보면 지식인이나 승려 계층은 밥벌이도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 폐단이 생기겠죠. 물론 생산자만 많아도 문제가 생깁니다. 상앙이나 한비자 같은 법가 사상가가 추구한 국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오직 생산만 중시하고 인간다움이나 인문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될까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제아무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한들 그 부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쓰이지 않으면 나라가 불행한 상황에 빠질 겁니다. 이와 반대로, 놀고먹는 계층, 그게 승려든 다른 성직자든 일반 지식인이든 마찬가지인데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공부만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겠죠. 따라서 균형이 중요합니다.
당나라의 경우 그런 균형을 이루지 못했고 고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성기에는 불법佛法이 국가를 운영하는 힘이 되었지만, 중·후반기 이후 외침外侵이 거듭되고 사원의 공재空財가 국가의 부를 넘볼 정도로 축적되고 폐단이 쌓이면서 왕조의 기틀이 흔들리고 맙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바로 조선이죠.
조선은 고려와 정반대로 불교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조선은 권근, 정도전 같은 유학자들이 배불론排佛論을 강경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한유의 「논불골표論佛骨表」의 논리를 빌려 오기도 하고 정도전의 경우 스스로 『불씨잡변佛氏雜辨』 같은 논문을 써서 불교 비판 이론을 전개하는데 대체로 이론적 기반을 엄밀하게 갖추기도 전에 논점을 선취하는 형태로 불교를 배척합니다. 그 결과 불교는 커다란 타격을 입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승병이 활약하고, 불교가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이 된다는 점이 받아들여지면서 조선 사회에서도 불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습니다. 물론 조선의 불교는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존속합니다. 그러다 보니 철학으로서 불교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극단성은 어떤 사회가 단일한 가치를 추구할 때 나타나기 쉽습니다. 고려에서는 불교가 그랬고,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그런 작용을 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그런 문제가 크지 않았습니다. 다양성 측면에서 보자면 통일신라기에 접어들면서 도교가 부진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불교와 유학과 도교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조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불교 철학자 원효입니다.
원효 다음에는 의상을 살펴볼 텐데, 한국 철학사에서 삼국 시대 부분은 당시의 중요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설총薛聰이나 강수强首 같은 유학자보다 승려를 더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철학사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양적 측면만 고려하면 안 되니 도교와 유학도 비슷한 비중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유학 쪽에는 설총과 최치원이 있습니다. 설총은 원효의 아들이죠(원효의 속성俗姓은 ‘설薛’, 이름은 ‘사思’). 또 최치원은 삼국 시대 인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도의 논리를 갖춘 유학자였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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