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풍진風塵
천하에 전란戰亂이 일 때는,
홍안紅顔의 여자들이 고난을 당한다.
─ 도안 티 디엠-당 쩐 꼰
제1장 응웬끼비엔阮奇園
응웬끼 가문의 사당을 신축하려고 준비하다가 리푹 씨 부부의 양자이며, 호적에는 응웬끼 꽉으로 이름을 올린 꾹이 조상의 제단 아래에서 금덩이를 캐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온 프엉딩 현이 시끌벅적했다.
재물을 건지지 않았다면 귀머거리에다가 물 위에서 흔들리는 물토란 대처럼 팔을 떠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네와 아주 야위어 몸을 근근이 부지하며 흐르는 콧물을 들이마시기도 힘든 자식을 여럿 둔 할머니가 갑자기 어떻게 금 수십 냥을 내서 토지개혁 때 나누어준 이웃 농민들의 집 여섯 채를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허물어서 새로 사당을 지으려고 준비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 규모가 하노이에 있는 국자감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니 하늘도 놀랄 일이었다. 그들 부부는 한 사람은 양자였고, 아내는 식모였으며, 그 집 가문과는 실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질고 덕 있게 살아서 틀림없이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생각들을 했다.
사람들은 아주 이상한 얘기를 꾸며냈다. 어느 날 밤, 꾹이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났는데 온몸이 땀범벅인 채로 손발을 벌벌 떨고 있었다. 하얀 소복을 입고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사람이 조상의 사당 가운데에서 바나나 나무를 심고 있는 것을 선명하게 본 것이다.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꾹은 감히 쳐다볼 수가 없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토지개혁 때 고소를 당해 죽었던 꾹의 양아버지인 리푹 씨였다.
“꾹아! 아비다. 놀라지 마라.”
바나나 나무를 심던 사람이 속삭이며 꾹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죽지 않고 살아계셨습니까? 저희 부부에게 하실 말씀이 있어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꾹은 장애를 입어 축 처진 팔을 들어 합장하며 소리쳤다.
“아버지, 간절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단지 토지개혁 초반에 아버지를 고소했을 뿐입니다… 제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너무 억울합니다….” 하얀 소복의 그림자가 갑자기 웃음소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밤중의 웃음소리는 연못가에서 대나무가 툭툭 부딪치는 소리처럼 무서웠다.
“다 지나간 옛날 얘기다. 더 생각하지 마라. 아버지가 안다. 그 당시의 시국이 그랬지. 피할 수도 없었다. 저들은 벌레나 개구리한테 사람이 되라고 했었지. 그래서 아비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제대로 죽은 게 아니야, 가장 비참한 죽음이었다….”
“예, 그때 저는 문 앞 계단에 누워있는 동생 허우를 보았고, 그 애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가가서 보니 아버지가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잃고 말았지요….”
“내가 스스로 그렇게 죽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아비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발가락을 단단히 묶었다. 물론 밧줄의 길이를 땅에 몸이 닿을 정도로 남긴 다음에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때 저는 막 창고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토지개혁대가 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저에게 낮에는 창고만 지키도록 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저는 기겁해서 소리쳤습니다. 마귀가 사당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발이 대들보에 연결된 밧줄에 묶여 흔들거리고, 아버지 머리는 벽돌에 부딪혀 터져서 마당에 하얀 뇌와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온전한 상태가 아닌 죽음이었습니다.”
“머리를 땅에 박는 느낌은 강력했고, 아주 재미있었다. 아비가 목을 매달지 않은 것은 바로 강력한 느낌을 누리고 싶었고, 온전치 못한 상태로 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됐다. 다 지나간 얘기다. 자식이 아비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였다고 소문낸 놈들도 이제 모두 죽었다. 옛 얘기는 잊어라, 아들아….”
“예, 예…. 그렇지만…, 아버지 억울하시지요? 어찌 아버지께서 다시 돌아오셨는지요?” 꾹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고 있었다.
“수년 동안 아비는 이 일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너에게 말하는구나…. 당연히 큰아들 코이, 둘째 비, 셋째 봉이 이 일을 해야 하지만 그놈들은 뿌리를 버리고 멀리 간 놈들이다. 그놈들은 고향을 찾지도 않고, 가족을 중시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대동세계만 생각하고, 조국도 원하지 않고 있어…. 아비는 너무나 가슴 아프다….”
“형들은 혁명하러 갔어요…. 저는 장애인이라서 방구석이나 지키고 있지요.”
“너의 세 형들은 내 친자식이지만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응웬끼 코이는 장남이지만 나는 그놈을 버렸다. 차남 응웬끼 비는 샌님처럼 얼굴이 하얗고 출세하기 힘들다는 글쟁이를 하고 있다. 그런 놈들은 일생 동안 남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결코 중용되지 못한다. 셋째 봉처럼 착한 사람은 유배당하고, 시골사람처럼 고생하며 불안정하다…. 오직 너뿐이다. 꾹아! 너야말로 조상님 제사를 모실 효자다. 그래서 아비가 우리 응웬끼 가문의 사당을 새로 짓는 일을 너와 상의하는 것이다…. 집의 핵심은 대들보다. 가문의 핵심은 조상의 묘와 가족의 제단이다. 그러한 신령한 것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우리 응웬끼 가문을 보니 수만 곳으로 흩어져 있고, 형제들이 서로 미워하고 있으니 아비는 너무나 가슴 아프다. 내가 죽었지만 떠날 수가 없구나, 얘야….”
“아버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비록 아버지께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길러주신 은혜는 저를 낳은 은혜보다 큽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성현들의 글을 가르쳐주셔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조금은 배웠습니다….”
흰옷의 그림자가 하하 웃으며 만족한 듯 말했다.
“그래서 아비가 해결책을 준비했다…. 수년 동안 가르치고, 약을 지으면서 아비가 금을 모았다. 그것을 내가 사당 기둥 아래에 묻어놓았다…. 그 금이면 예전 우리 조상들의 땅을 다시 사들이고, 응웬끼 가문의 사당을 수리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
사람과 귀신 사이의 대화는 중국 포송령의 『요재지이』 속 얘기 같았다. 꾹이 말했는지 아니면 누가 지어낸 말인지는 몰라도 이 얘기는 비밀스럽게 동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얘기 후반부는 여러 사람이 지어낸 것일 수 있었지만 전반부는 바로 꾹이 한 말이었다. 꾹이 자주 사당 안에서 여전히 바나나 나무를 심는 흰옷 입은 그림자를 만난다는 얘기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토지개혁 이후 여러 해 동안, 농업 합작사 설립 시기에 그랬다. 그가 아내에게 조용히 말했고, 향을 피우고 합장을 하고 나서 리푹 씨 부인에게도 전했다. 그리고 그가 들판에 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내 말이 거짓이라면 나를 개새끼라고 해라! 아버지는 정말 신령하지. 매월 첫째 주에 아버지가 나타난단 말이야. 정말 신기해. 언제나 아버지는 새하얀 옷을 입고 사당 가운데서 바나나 나무를 심고 있어!”
귀신을 연상케 하는 이 얘기는 다섯 칸짜리 사당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욱 무서운 얘기라서 밤이 되면 부엌으로 달려가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었고, 개똥벌레가 사당으로 날아드는 것만 봐도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귀신 얘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응웬끼 가문의 사당 건축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들은 리푹 씨의 장남이며 사회주의 정치체제 아래에서 응웬끼 가문에서 가장 출세하여 고위직에 오른 응웬끼 코이에게 집중했다.
솔직히 말하면 응웬끼 코이라는 이름을 아는 동 마을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다. 그 이름은 단지 어린 시절을 정확히 기억해야 생각나거나, 가족들만 가끔 입에 올리는 이름이었을 뿐이다.
응웬끼 코이는 리푹 씨 첫째 부인의 자식이었다. 코이가 두 살 때 그의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죽었다. 리푹 씨는 강 건너편에 사는 훈장 하잉 씨의 막내딸 부티 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언 여사는 응웬끼 비와 응웬끼 봉이라는 두 아들과 응웬티 끼허우라는 막내딸을 낳았다. 장남 응웬끼 코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8월 혁명(1945년)이 일어났다. 중학교 졸업반이었는데 학업을 그만두고 혁명 선전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군에 입대했다.
북부지구로 간 후, 코이는 이름을 대 프랑스 항전과 피를 연상시키며,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의미를 가진 찌엔탕 러이로 바꾸었다.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응웬끼 코이가 상당한 신임을 얻기 위해 절대적인 충성을 했으며 분투,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대 프랑스와 대미 항전 세대들은 누구나 찌엔탕 러이라는 이름, 찌엔탕 러이 동지를 알고 있었다. 〈새 시대〉라는 아주 유명한 신문의 ‘전사의 모습’이라는 란에 ‘나의 형―찌엔탕 러이’라는 제목으로 아주 긴 기사가 실렸다. 글쓴이는 시인 응웬끼 비였다. 독자들은 처음으로 응웬끼 코이, 즉 찌엔탕 러이 동지가 『신의 시대』라는 시집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시인 응웬끼 비의 친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동 마을과 두 형제의 어린 시절과 찌엔탕 러이가 ATK*에서 돌아와 비를 설득해서 북부지구로 데려온 얘기를 썼던 것이다.
토지개혁 당시에 찌엔탕 러이라는 이름이 각종 문서와 지침서에 아주 많이 등장했다. 정치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가 1960년 북베트남에서의 상공업 개혁, 1976년 남베트남에서의 경제개혁과 같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결정적 성격의 크고 중요한 여러 정책의 설계자이며, 문서들의 정신적 출처라는 것을 알았다. 1980년대에 찌엔탕 러이라는 이름은 그의 고향 마을은 물론 현과 성에서도 자부심이며,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유명한 형 때문에 귀신과 대화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꾹도 세상의 눈을 가릴 수는 없었다. 사당 터를 매입하기 위해 수십억 동을 쓰며, 응웬끼 가문의 사당을 새로 지으려는 일은 찌엔탕 러이 부자와 비, 봉, 꾹 형제는 물론 더한 것을 보탠다 하더라도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찌엔탕 러이가 ‘그동안 모은 돈을 고향으로 가져오는 일’과 퇴직 후의 ‘연착륙’ 작전은 죽기 전에 묘를 만든 조조의 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땅에 기둥 박듯이 확신하고 있었다. 옛 사람들이 수구초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수십 년 동안 혁명을 하면서 모은 급여와 재산을 가문의 영광과 조상의 은혜를 갚기 위해 고향으로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고향 사람들은 생각했다. 어떤 이는 ‘찌엔탕 러이 부자는 엄청난 붉은 자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1985년 화폐개혁 사건 때, 화폐 가치가 떨어질 것을 미리 알고 그는 돈을 모두 금으로 바꾸었다. 바로 이듬해에는 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리고 큰아들은 러시아에서 밀수꾼의 우두머리로 러시아 봄 시장의 물건을 매점하고, 줄줄이 베트남으로 송금했다. 그들 부자는 속썬, 화락, 빙즈엉에 3개의 농장을 갖고 있었고, 하노이와 사이공에 두 채의 고급 빌라가 있었다. 게다가 수천만 달러를 유럽 은행에 넣어놓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의 아들 찌엔 통녓은 이제 막 서른 살이었지만 회사를 설립하고 부동산, 자동차 매매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아버지의 성격과는 달리 찌엔 통녓은 낭비벽이 심했다. 일 년에 자동차를 두세 대 바꾸고, 애인을 서너 명씩 바꾸었다. 모두 다리가 긴 모델들이었다. 리푹 씨의 부인인 그의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에 찌엔 통녓이 말했었다.
“조상의 은덕으로 저희 아버지가 그렇게 되었지요. 나중에 제가 제대로 조상님께 고하고 나서, 제 성과 돌림자를 응웬끼로 바꿀 것입니다, 할머니. 찌엔 통녓이란 이름은 무슨 게이 이름 같아요.” 리푹 씨 부인은 게이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찌엔 통녓이 근본을 잃어버린 놈은 아니라고 믿었다.
─
* An Toàn Khu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안전구역이라는 의미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군의 통제가 미치는 지역을 일컫는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