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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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시, 앎
그동안 인간이 가치나 아름다움에서 으뜸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비유 중 대표적인 것 두 개를 들라고 한다면 당연 ‘빛’과 ‘꽃’일 것이다. ‘빛’ 대신에 모든 빛의 원천인 ‘태양’을 쓰기도 하지만, 빛이라는 말은 다 알다시피, 정신적인 깨달음에서부터 역사적인 업적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일이나 그 일을 해낸 사람을 꾸미느라고 흔히 쓰이고, 꽃이라는 말은 보통 정화精華라든지 정수精髓라는 뜻을 담아 쓰인다. 어떻든 빛과 꽃은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상태나 존재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실은 ‘빛’이라는 말이 발음되거나 내걸리면 그 소리와 단어는 즉시 그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듯하고, 또 ‘꽃’이라는 말이 발음되거나 내걸리면 즉시 향내가 나는 듯하니 그 말들은 거의 실물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여 빛은 워낙 밝은 것이고 꽃은 워낙 아름다운 것이어서,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워낙 선명히 각인된 것이어서, 그 말들이 환기하는 것 이외의 것은 전혀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몸을 살리기 위해 먹을 것을 자연에서 퍼오는 건 물론이고 정신을 활동시키는 비유나 이미지도 자연에서 퍼온다.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은 몸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또한 마음을 생성하는 원소들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비상하는 힘을 샘솟게 하는 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공기와 새들이며 땅에 붙박여 있으면서 상승의 꿈을 꾸게 하고 실제로 그런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무슨 깃대 같은 게 아니라 나무들이다. 샘물은 또 그게 감정이든 의지이든 무엇이든, 모든 샘솟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의 원천인데, 만일 어떤 시인이 샘물을 잘 노래했거나 다른 어떤 것을 썩 잘 노래했다면 독자는 거기서 어떤 회생의 샘물을 마시게 되는 셈이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겠지만, 그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살아 있다는 것인데, 자연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얘기는 실제로는 물론 상징적으로도 그렇다.
잠깐 딴소리를 하고 이어가자면, 이 잡지의 편집자가 글을 청탁하면서 그동안 읽은 무슨 책을 가지고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특히 청소년 시절에 탐독한 책 몇 권을 뒤적이면서 오늘날에도 유효한 무슨 말씀이 있나 살펴보다가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글 한 대목과 또 중년에 읽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글 몇 대목을 발견했는데, 그 얘기들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새겨들어야 할 말이었으므로 그 대목들을 같이 읽어보면서 사족을 붙여볼까 궁리를 했고, 그들은 두 사람 다 자연 숭배자요 또 그 대목의 화두가 자연이어서 위와 같이 시작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자연’은 현대 세계의 문제들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얘깃거리인데 우선 소로의 「걷기Walking」라는 글에서 한 대목을 옮겨본다. (인용문의 “자연”은 대문자다.)
“자연”을 나타내는 문학은 어디 있는가? 바람과 시내를 자기를 위해 말하도록 자기의 업무에 원용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그는 농부가 봄에 결빙으로 솟아오른 말뚝들을 두드려 박듯 말들을 그 원초의 의미들에 박았으며, 말들을 사용할 때마다 그 말들의 기원을 찾았다─뿌리에 흙이 묻어 있는 말들을 그의 책 페이지에 이식했던 것이다. 그들의 말은 너무도 참되고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나머지 봄이 올 때 솟아나는 싹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이 보였다.
인간의 삶은 문명화, 사회화, 도시화하면서 자연에서 멀어져 추상화, 간접화를 위한 조작의 재주 부리기를 계속해왔고, 그러한 과정은 당연히 물질과 권력 등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켜, 자연에서 보듯이 필요한 만큼만 갖는 게 아니라, 추상화된 욕망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돌진에 제동을 거는 건 아주 힘든 일로 보이는데, 어떻든 인간은 과학기술과 정치권력과 경제체제 따위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인공적 환경에 유폐되어 생명의 원천이며 살아가는 방식의 전범인 자연에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다든가 하는 따위의 생각을, 위의 소로의 글과 함께 우선 떠올려보게 된다.
그가 “자연”을 대문자로 쓰고 있는 이유는 물론 그의 자연에 대한 외경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러한 외경은 인간을 사회의 일원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일원으로 보는 그의 기본적인 생각을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월든 숲으로 들어가 2년 2개월 동안 살았던 도저한 ‘진짜 지향’을 생각나게 하는바, 그가 말하는 “자연”은 여러 가지 뜻과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인용에서 소로는 참된 말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자연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이 참된 말이라는 것, 그의 신선한 비유대로 “뿌리에 흙이 묻어 있는 말들을” 책에다 이식하는 것이라는 것, 그럴 때 “그들의 말은 너무도 참되고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나머지 봄이 올 때 솟아나는 싹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이” 보인다는 것인데, 그런 말을 그는 시에서 찾고자 한다.
그런데 자연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는 것은 그가 예로 들고 있는 바람과 시내 따위의 자연을 원용한다는 얘기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전언으로 들리는 것은 “자연”이 ‘참됨’과 동의어이고, ‘신선함’과 동의어이며, 그것들은 ‘자연스러움’에서 온다는 얘기인 것이다.
뛰어난 시의 언어는 언어라기보다 생물이라고 나는 여러 해 전에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시를 얘기하면서 말한 적이 있지만, 시인이 그야말로 자연에서 받은 천분에 따라 그의 영혼은, 따라서 그의 말은 야생 상태에 가까운 것일 수가 있다. 다시 소로의 글 몇 구절.
생명은 원래 야생 상태다. 가장 살아 있는 것은 가장 자연 그대로인 것이다. 인간에게 위압당하지 않은 채 있는 그것의 존재는 그를 기운 나게 한다.
이 말은 “한 도시는, 거기 사는 의인義人보다는,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숲과 습지 들에 의해서 구해진다”는 말과 함께 읽으면 좋은데, 예를 들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교정의 나무들(숲)이 더 귀중한 것을 가르친다는 나의 생각과 비슷한 맥락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소로는 같은 글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좋은 책이란 서양의 평원이나 동양의 정글에서 발견하는 들꽃처럼 자연스럽고, 의외로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완전한 어떤 것이다. 천재란 번갯불처럼 어둠을 보이게 하는 빛으로서, 아마도 지식의 사원 자체를 산산이 부순다─그러니까 평상시의 빛 앞에서 빛을 잃는 종족의 노변爐邊에 켜놓은 작은 촛불이 아니다.
인지人智라고 하는 것의 보잘것없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말인데, 그는 당시에 있었던 ‘유용한 지식 보급회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dge’라는 걸 비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지식은 힘이라나 무슨 그런 얘기를 한다. 그런데 ‘유용한 무지 보급회’도 똑같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바, 우리는 그걸 ‘아름다운 지식’이라고 부를 터인데, 좀더 높은 의미에서 유용한 지식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이른바 지식은 자기가 뭔가 알고 있다는 자만에 불과해 우리의 진짜 무지를 아는 기회를 앗아가는 게 아닌가?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흔히 적극적인 (자신 있는) 무지이며, 무지는 우리의 소극적인 지식이다. 여러 해 참을성 있는 노력과 신문 읽기로─학문의 도서관들이란 신문 더미 외에 무엇이겠는가?─수많은 사실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기억 속에 쌓아놓는데, 그러다가 그의 인생에 어떤 봄이 오면 생각의 드넓은 벌판Great Fields of Thought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가서 한 마리 말처럼 풀에게 가며 마구들은 모두 마구간에 내버려둔다. 나는 때때로 ‘유용한 지식 보급회’에게 “풀한테 가시오” 하고 말하겠다. 당신들은 충분히 오랫동안 건초를 먹었다. 그 푸른 작물과 함께 봄이 왔다. 5월이 오기 전에 저 소들은 풀밭으로 내몰리게 된다. 자연을 거스르는 어떤 농부는 소들한테 1년 내내 건초를 먹인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유용한 지식 보급회’는 빈번히 소 떼를 그렇게 취급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무지는 때때로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도 하다─어떤 이의 이른바 지식이 흔히 추악한 데다 무용함보다 더 나쁜 데 비하여, 어떤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일까. 무슨 얘깃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이건 지극히 드문 일이지만,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그것에 대해 뭔가 좀 알면서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나의 지식욕은 간헐적인 반면 내 두 발이 모르는 공기에 머리를 적시고 싶은 욕망은 끊이지 않고 항구적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제일 높은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성에 대한 공감Sympathy with Intelligence’이다.
위와 같은 소로의 이야기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그리고 그 지식과 정보가 무지와 맹목성의 소산일지도 모르는데) 그 울림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역설적인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깊은 뜻’에 대한 공감이, 시끄러운 정보와 지식 때문에 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이야기 속에는 지식에 대한 가차 없는 회의와 진정한 앎에 대한 열망이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가령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지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끼면서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인간 세상은 좀더 살만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가령 불가佛家의 선禪에서 침묵을 명상의 방법이자 정점이기도 하다고 여긴다는 걸 알고 있고, 또 동양에서 눌언訥言의 미덕을 얘기해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줄곧 불행과 비참을 동반해온 까닭이 무지에서 나온 말들이 지나치게 넘쳐나고 지배적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혐의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제일 높은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성에 대한 공감’”이라는 말은 지혜롭고 섬세한 영혼의 말임에 틀림없다. 짐작건대 지식이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데 비해 지성은 타고나는(자연이 주는) 것으로서, 여러 가지 길들이기 과정을 통해서 퇴색하지 않는 창조적 에너지의 생동을 따라 움직이는 마음이 아닐까 싶은데, 지식이 문명의 짝이라면 지성은 자연의 짝이라고 할 수 있는바, (지식/문명의 순응주의가 낳은 결과들에 대한 비판은 일단 접어두고) 소로가 생각하는 “지성”은,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가 단테론 『이승의 시인 단테Poet of the Secure World』에서 단테에 관해 말하면서 한 말인 “완전함에 대한 비전”을 갖는 능력에 가까운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이상적인 비전 없이 어떻게 현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겠는가 하는 생각 또한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큰 정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려고 하는데 에머슨의 「경험」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자연은 계산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자연의 방법은 비약적이고 충동적이다. 인간은 맥박으로 살며 우리의 기관운동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화학적 에테르적 동인動因들은 파동적이며 교차적이다. 또한 마음은 대립하면서 움직이고 발작적으로만 번성한다. 우리는 재난으로 번창한다. 우리의 주요 경험들은 우연한 것이었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들이란 직접적인 타격이 아니라 비스듬히 힘을 행사한 사람들이다. 천재이지만 아직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어떤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지 않고도 그들의 빛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들의 미美는 새나 아침 햇살의 미이며 예술의 미가 아니다. 천재의 생각에는 언제나 경이가 있다. 그리고 그 속의 도덕적 감정은 “새로운 것”이라고 제대로 얘기되었는데, 어린애에게나 나이 많은 지성인에게나 새로운 것 즉 “눈에 띄지 않고 도래하는 천국”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너무 많은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된다. 사람이 최상의 일을 할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마련이다. 그의 더없이 합당한 행동에는 여러분의 관찰력을 마비시키는 어떤 마력이 있어서 비록 당신의 눈앞에서 행해졌다고 하더라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예술은 어떤 수줍음을 가지고 있으며 잘 드러나지 않을 터다.
앞부분의 자연에 대한 통찰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것이겠는데, 그가 “천재”라고 부르는 매력적인 사람들은 자연을 닮거나 자연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직접적인 타격이 아니라 비스듬히 힘을 행사한powerful obliquely 사람들”인데, 비스듬히(간접적으로) 힘을 행사한다는 말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말로서, 뒷부분과 연관해서 보면 대충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사람이 최상의 일을 할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마련”이라든지 “삶의 예술은 어떤 수줍음을 가지고 있으며 잘 드러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말들. 이 말들 속에는 현인의 통찰과 지혜가 숨 쉬고 있으며 모두 자연의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자연이 하는 일은 더 이상 완전할 수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그 하는 일은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천지간의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예컨대 봄에 꽃이 피는 것에서부터 곰팡이가 피는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피어 있는 걸 우리는 철마다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는가. 사람이 더없이 합당한 일을 할 때 그 행동에는 우리의 “관찰력을 마비시키는 어떤 마력”이 있다는 통찰은 그리하여 참으로 눈 밝고 귀 밝은 영혼의 더듬이─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움직임과 표정의 심연이나 내밀을 신통하게 다 알고 있는 더듬이를 느낄 수 있다.
“최상의 일을 할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는 또한 사람들이 최상의 일을 잘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 들어있기도 한 듯한데, 그것은 “천재이지만 아직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연관시켜서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삶의 예술은 어떤 수줍음을 가지고 있으며 잘 드러나지 않을 터”라는 말은 인간 세상이 좀더 나은 쪽으로 가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삶에서 “수줍음”이라는 화두.
아, 사람들이 수줍어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온갖 파괴적, 소모적인 싸움으로 인한 불행과 비참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힘 있는 국가, 기관, 개인 들이 자기의 힘을 행사하면서 다소라도 수줍어한다면(비스듬히 힘을 행사한다는 말이 다시 상기된다), 자기들이 신봉하는 교조나 이념에 대해 조금이라도 수줍어한다면, 모든 단위의 자리自利중심주의를 조금이라도 수줍어한다면…… 크고 작은 예들이 이어질 수 있겠으나 하여간 그렇다면 전쟁이나 폭력, 광신이나 공공의식의 마비 같은 것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
어떻든 문학은 다른 활동들과 비교해서 본질적으로 수줍은 활동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문학이 인생살이와 세상살이에 대하여 비교적 깊이 생각하고 자세하게 느끼며 여러 국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그 생리라는 점에서 그렇고, 이 때문에 다른 활동(예를 들어 정치나 장사)에 비해 판단에 유보적이며 행동이 굼뜨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시 말하면 문학은 망설이면서 진행되는 활동이며, 그 언어는 지배하려는 의지에서 제일 먼 언어라는 점에서 수줍은 활동이다. 특히 시는, 인간의 여러 가지 기획과 시도에서, 뭔지 그럴듯한 것을 가리키는 눈짓으로서의 꿈에 항상 이끌리기 때문에 특히 수줍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물론 본능적으로 힘을 숭배하는 성향이 있고 그런 면에서 틀림없는 동물이지만, 또 한편 ‘자연스럽지 않은’ 힘에 대해서는 거북해하고 역겨워하는 성향도 있다. 그리고 수줍음이란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생활에서 그 말과 행동의 나름대로의 충일과 그리고 그 불가피한 조건인 결핍을 아울러 느끼면서 보이는 표정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말의 힘과 침묵의 힘 사이에서 수줍음은 떠오르며 행동의 힘과 무위無爲의 힘 사이에서 또한 수줍음은 떠오른다─마치 그것들이 갖고 있는 결핍을 채우듯이……
그러나저러나 이 화창한 봄날, 생존을 위한 소음과 돌진과 맹목의 바다에 돌 하나를 던지듯 해봤자, 세상의 무슨 털끝에도 닿지 않을 얘기를 하느라고 끙끙거리고 있을 게 아니라, 봄 속으로 나가봐야겠다. 참됨과 신선함과 자연스러움의 동의어인 ‘자연’에 값하는 마음으로 노래한 시인 네루다의 그야말로 ‘자연’이 말하고 있는 「봄」이라는 작품을 적어놓고.
새가 왔다.
탄생하라고 빛을 가지고.
그 모든 지저귐에서부터
물은 태어난다.
그리고 공기를 풀어놓는 물과 빛 사이에서
이제 봄이 새로 열리고,
씨앗은 스스로가 자라는 걸 안다;
화관花冠에서 뿌리는 모양을 갖추고,
마침내 꽃가루의 눈썹은 열린다.
이 모든 게 푸른 가지에 앉는
티 없는 한 마리 새에 의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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