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가장 먼 여행
반갑습니다. 이번 강의가 마지막 강의입니다. 마지막 강의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놓으려고 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강의는 교재 중심으로 하되 교재의 내용을 반복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강의는 사람과 삶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사람人間과 삶世界에 관한 인문학적 담론입니다. 당연히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고민한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실이 공감共感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강의가 마중물이 되어 여러분이 발 딛고 있는 땅속의 맑고 차가운 지하수를 길어 올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랜 강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사와 학생이란 관계가 비대칭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 분들은 가르치는 것을 ‘깨우친다’고 했습니다. 모르던 것을 이야기만 듣고 알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그림을 보여드리면 여러분은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앨범에서 그와 비슷한 그림을 찾아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설득하거나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나는 20년의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의 상한上限이 공감입니다. 의문을 갖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공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닙니다. 공감, 매우 중요합니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것은 가슴 뭉클한 위로가 됩니다. 위로일 뿐만 아니라 격려가 되고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음모陰謀’라고 합니다. 음모라는 수사修辭가 다소 불온하게 들리지만 근본은 공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작 불온한 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소외 구조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음모는 든든한 공감의 진지陣地입니다. 소외 구조에 저항하는 인간적 소통疏通입니다. 글자 그대로 소외疏를 극복通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실이 공감의 장場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의실 창밖으로 낙엽이 지고 있습니다. 초가을입니다. 우리의 강의는 겨울눈이 내릴 때까지 이어집니다. 가을에서 겨울까지 여러분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늦은 저녁 시간입니다. 우리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 밝히고 가을에서 겨울까지 함께 동행합니다. 우리의 강의실이 위로와 격려, 약속과 음모, 공감과 소통의 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은 강의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책은 2~3년 전의 생각이고, 강의는 어제 저녁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자연히 오래전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계몽주의 프레임을 허물어야 합니다. 계몽주의는 상상력을 봉쇄하는 노인 권력입니다. 생생불식生生不息,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온고溫故보다 창신創新이 여러분의 본령입니다. 그리고 강의라는 프레임도 허물어야 합니다. 학부 강의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강의라는 틀입니다. 문제 중심이어야 하고 정답이 있어야 합니다.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線型的 지식은 지식이라기보다 지식의 파편입니다. 세상은 조각 모음이 아니고 또 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강의는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갈 것입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선이 되고 인연이 됩니다. 그리고 인연들이 모여 면面이 되고 장場이 됩니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장場을 배치agencement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담론들은 5년 후, 10년 후 고독한 밤길을 걷다가 문득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추억은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 가다가 어느 날 문득 가슴 찌르는 아픔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계몽주의의 모범과 강의 프레임은 이 모든 자유와 가능성을 봉쇄합니다. 이탁오李卓吾는 사제師弟가 아니라 사우師友 정도가 좋다고 합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자는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 교실도 그런 점에서 부담없는 저녁 다담茶談이었으면 합니다.
교재는 내가 쓴 책과 글 중에서 수정하고 정리한 것입니다. 20여 꼭지입니다. 한 강의마다 2개씩 하더라도 빠듯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더구나 이번이 마지막 강의여서 강의 준비를 많이 하다 강의를 망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강의는 교재를 함께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교재를 함께 읽는 까닭은 여러분이 미리 읽어 오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재를 낭독하고 전체가 조용히 함께 듣고 있는 교실 풍경은 공감 공간의 어떤 절정입니다. 여러분도 적막한 교실의 경험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교실의 경험, 대단히 특별합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읽는다는 것은 참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였습니다. 『삼국지』 한 권을 세 명의 친구가 함께 읽었습니다. 하필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려갔다 달려왔습니다. 나 없는 사이에 한참 읽어 나갔겠다고 생각하면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웬일로 두 친구가 책을 읽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왜 안 읽어?’ ‘관운장 죽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관운장이 죽자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에 관운장이 죽다니! 어린 우리는 참으로 슬펐습니다. 한동안 책을 읽지 못하고 앉아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지금도 『삼국지』의 절정은 ‘맥성에 지는 달’ 관운장의 죽음입니다. 몇 년 전에 영화 〈적벽대전〉이 우리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습니다. 평소 극장에 가는 일이 없는 내가 극장에 갔습니다. 영화는 관운장이 죽기 전에 끝났습니다. 그 후 〈적벽대전 2〉가 상영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틀림없겠지. 또 극장에 갔습니다. 불편한 앞좌석에서 끝까지 기다렸습니다만 〈적벽대전 2〉에서도 관운장의 죽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 셋이 엎드려 함께 읽었던 기억이 그만큼 깊게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함께’는 뜨거운 공감 공간입니다.
‘함께’는 지혜입니다. 영국의 과학자이며 우생학eugenics의 창시자인 골턴Francis Galton이 여행 중에 시골의 가축 품평회 행사를 보게 됩니다. 그 행사에는 소의 무게를 알아맞히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표를 사서 자기가 생각하는 소의 무게를 적어서 투표함에 넣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의 무게를 달아서 가장 근접한 무게를 써 넣은 사람에게 소를 상품으로 주는 행사였습니다. 골턴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확인하는 재미로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맞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800개의 표 중 숫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13장을 제외한 787개의 표에 적힌 무게를 평균했더니 1,197파운드였습니다. 실제로 측정한 소의 무게는 1,198파운드였습니다. 군중을 한 사람으로 보면 완벽한 판단력입니다. 우파 우중론자愚衆論者인 골턴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집단의 지적 능력collective intelligence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첫 시간입니다. 공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갑골문에서는 농기구를 가진 성인 남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인문학人文學의 문文은 문紋과 같은 뜻입니다. 자연이란 질료質料에 형상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人이 한다는 뜻입니다. 농기구로 땅을 파헤쳐 농사를 짓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옛날에는 공부를 구도求道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도에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 공부는 고생 그 자체입니다. 고생하면 세상을 잘 알게 됩니다. 철도 듭니다. 이처럼 고행이 공부가 되기도 하고, 방황과 고뇌가 성찰과 각성이 되기도 합니다. 공부 아닌 것이 없고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달팽이도 공부합니다. 지난 여름 폭풍 속에서 세찬 비바람 견디며 열심히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공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대체로 고전古典 공부에서 시작합니다. 고전 공부는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 온 지적 유산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역사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합니다. 언어를 익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전 공부의 목적은 과거, 현재와의 소통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부란 세계인식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창조입니다. 고전 공부는 고전 지식을 습득하는 교양학이 아니라 인류의 지적 유산을 토대로 하여 미래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실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전 공부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三讀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탈문맥脫文脈’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어느 시대이든 공부는 당대의 문맥을 뛰어넘는 탈문맥의 창조적 실천입니다.
〈머리─가슴─발〉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한 학기 동안 공부할 순서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그림은 강의 내내 수시로 불러낼 것입니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의도 여기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문맥은 많습니다. 중세의 마녀 문맥이 그것의 한 예입니다. 수많은 마녀가 처형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마녀라는 사실을 승복하고 처형당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완고한 인식틀입니다. 니체는 중세인들은 알코올로 견뎠다고 했습니다. 최면제인 알코올이 각성제인 커피로 바뀌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공부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공부의 시작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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