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1916년 여름.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조선의 부강일제강점기의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옮긴이에서 죽기로 결심한 일본인 여자아이가 있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하지만 이 아이는 이와시타 후미코岩下文子라는 이름으로 살던 시절도 있었으며 아홉 살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할머니가 조선으로 데려오기 전까지는 그저 ‘가네코 후미코かねこふみこ’라 불릴 뿐이었다. 불릴 뿐이었다고 한 이유는 꽤 오랫동안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無호적자였다.
그러니까 후미코는 태어났을 때부터 비공식이었다. ‘무자격자’라고 해도 좋겠다. 보통 아기가 태어나면 호적이라는 형태로 관청의 장부에 등록한다. 그러면 “아무라는 가정에서 아무라는 이름의 인간이 하나 태어났다”라고 기록된다. 국민의 수가 늘어났다는 것이 숫자로 반영되며, 6년 뒤에는 취학 연령이 되는 아이가 하나 늘고, 20여 년 뒤에는 납세자가 한 사람 늘어난다는 사실을 파악하여 정책을 만들고 나라를 굴린다. 그러니까 호적을 갖는다는 것은 국가의 통계에 포함된다는 뜻이며 숫자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후미코는 다행인지 불행인지뭐, 이 경우엔 물론 불행이라 생각했으니 죽으려 한 것이겠지만 부모가 그의 출생을 관청에 신고하지 않았다. 후미코의 아버지 후미카즈文一가 어머니 기쿠노きくの를 곧 버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술만 마시면 거친 생활을 하긴 해도 나름 괜찮은 집안 출신이었던지라 농사꾼의 딸 기쿠노가 낳은 아이를 자기 호적에 넣기 싫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여튼 후미코는 무호적자로 자라난다.
무호적자였기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회의 ‘허가를 받지 못한’ 신분이었다. 처음부터 떳떳하지 않은 인생으로 태어났다. 당당하게 햇빛 아래를 걸어가는 인간이 되려면, 국가의 일원으로서 관청에 존재가 파악되어 ‘한 사람 몫’을 해야 할 것이다. 후미코는 ‘한 사람 몫’으로 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후미코가 ‘무자격자’로 자라난 것은 요행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국가 시스템의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니 아웃사이더니 애써 주장하지 않아도 좀스러운 일본 사회의 빈틈을 스르륵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살아간다”는 후미코의 사상이 리얼한 피와 살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후미코가 열세 살에 죽어버리려 했을 때는 그런 미래를 알 턱이 없었다. 후미코는 금강 변에 서서 여태까지 제 신변에 일어난 불행을 멍하니 곱씹고 있었다.
애초에 부모부터가 장난이 아니었다. 빈곤 가정인 것도 힘든 상황인데,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 젊은 여자를 집에 데려와서는 아내를 쫓아내더니 결국 아내의 여동생에게까지 손을 뻗어 집안에서 삼각관계를 만들고, 어린 딸 후미코의 눈앞에서 정사를 벌이고는 처제와 도망가 살림을 차렸다. 그러면 후미코의 어머니는 부정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후 여러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였다. 섹스하고 싶을 때는 어린아이를 심부름 다녀오라며 깜깜한 밤에 멀리 밖으로 내보냈다. 밤이 무서운 나머지 후미코가 빨리 달려서 심부름을 얼른 끝내고 집에 돌아와 보면, 어머니 또한 남자와 두 마리의 동물이 되어 다다미방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결국에는 어머니도 후미코를 버렸다.
후미코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린 시절 부모와 살던 모습은 ‘섹스, 마약, 그리고 로큰롤’이 아니라 ‘섹스, 빈곤, 그리고 폭력’이라 하겠다. 만약 현대 영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사회복지사가 와서 후미코를 데려갔으리라. 후미코가 아무리 깊은 불행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더라도 눈물 바람의 여주인공이 되지 않은 이유, 메마른 시선으로 사물을 분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에 웬만한 것은 이미 다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후미코도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홀라당 속아 넘어가는 일이 있었다.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후미코를 조선으로 데려와준 할머니는 부강에 사는 일본인 커뮤니티에서도 유력한 고리대금업자 이와시타岩下 가문의 ‘어르신’이었다. 할머니는 이와시타 가문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와시타 가문으로 시집간 딸후미코의 고모과 살면서 이와시타 집안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딸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처음에는 후미코가 대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후미코를 이와시타 집안에 양녀로 입적하여 좋은 사위를 붙들도록 상류 계급풍 아가씨로 키우려 했다. 하지만 저변 가정에서 큰 후미코는 할머니가 원하는 아가씨로는 자라지 않을 듯 보였다. 게다가 묘하게 심지어 굳어서 어른이 하라는 대로 하지도 않았다. 이 점이 몹시 거슬렸던 할머니는 후미코의 성을 이와시타에서 가네코로 바꾸고 양녀에서 하녀로 신분을 낮추었으며 학대했다.
어느 더운 날, 병원 경영인의 아내라는 스물네댓 살 정도의 미인이 갓난아기를 데리고 집에 왔다. 벼락부자 차림을 한 이 여자는 미사오操라고 하는데, 할머니의 조카딸이라 했다. 할머니는 이상하게도 미사오를 예뻐했다. 분명 그 사람을 입신출세한 여성의 모범이라 여기는 듯했다. 어느 날 미사오는 멀리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하고 싶은데 갓난아이를 안고 가기는 번거롭다고 했다. 그러니까, 후미코가 따라가 아기를 돌봐주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후미코에게 “싫으면 싫다고 분명하게 말하면 돼. 싫은 것을 무리하게 하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라고 드물게 온정을 풍기는 듯한 말을 했다. 그래서 후미코도 냉큼 “실은, 내가 안 가도 되면 가고 싶지 않은데”라고 해버렸다.
그랬더니 아아, 역시 할머니는 “뭐라고? 가고 싶지 않아? 이게 좀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아주 우쭐해져서는! 어디서 감히 가고 싶지 않아?” 하고 화를 터뜨리며 후미코의 멱살을 붙잡고는 세차게 흔들었다. 할머니는 툇마루에서 마당으로 굴러떨어진 손녀를 게다일본의 나막신―옮긴이를 신은 발로 실컷 짓밟고 걷어차고는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와 아예 대문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갈 곳이 없었던 후미코는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하면서 사죄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사죄를 방해하고 밥을 주지 않았다. 몇 번이고 사과를 해도 일부러 무시하고 며칠이나 굶겼다. 후미코는 배가 너무 고파서 나중에는 배고픈 감각을 못 느낄 정도가 되었다. 일어나려 했다가도 저절로 다시 주저앉을 만큼 쇠약해져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투신자살. 투신하여 자살한다. 몸을 던져서 스스로를 죽인다. 이 생각만이 후미코를 움직였다.
그리하여 후미코는 소맷자락에 자갈을 넣고, 돌을 넣은 붉은 모슬린 속치마를 몸통에 감고는 금강 변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그곳에는 익사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수심 깊은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뛰어내리면 끝. 학대도, 고픈 배도, 아픈 몸도, 이 엿 같은 인생도 뭉텅 하고 끊어질 것이다. 후미코는 이때의 광경을 후에 옥중에서 쓴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준비는 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강변의 버드나무를 거머쥐고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물은 검푸른 기름처럼 잔잔했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후미코의 머리 위에서 유지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후미코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일순 감지하고 경탄했다. 세상의 자연은 이렇게도 아름답고, 세상의 고요함은 이렇게도 평화로운가 하고 말이다.
이 순간의 각성에 관해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는 “사상의 저변에 있는 낙천성” 덕분이라고 했다. 그 낙천성이 유지매미의 울음소리에 이끌려 밖으로 드러났으며, 그것이 후미코의 자살을 막았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런 낙천성은 후미코가 사는 동안 막다른 곳에서 발길을 돌리듯, 모래가 아래로 다 떨어진 모래시계를 뒤집듯 기사회생의 반전을 가져왔다. 이 낙천성의 근저에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참한 인생을 보내던 여자아이치고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었다. 대안은 있다. 왜냐하면 후미코 스스로가 바로 사회의 대안이었으니까. 후미코는 이렇게 썼다.
그래도, 그래도, 세상에는 아직 사랑해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다. 아름다운 것이 무수히 많다. 내가 사는 세상도 할머니와 고모가 사는 집으로만 제한된다고 할 수 없다. 세상은 넓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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