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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소유자
_상품을 소유한다는 것
“상품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인간은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문장의 ‘상품’ 자리에 ‘몸을 파는 여성’을 넣어볼까요. 이 문장에 마르크스가 주석을 달아둔 걸 보면 그는 ‘몸을 파는 여성’을 떠올린 것 같습니다. 상품으로 나온 ‘여성의 몸’, 성적 쾌락을 제공하는 ‘여성’의 능력을 떠올린 겁니다. 왜 그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상품’을 가정하고, 거기에 ‘몸을 파는 여성’ 이야기를 주석으로 달았을까요.
장-레옹 제롬, 〈법정에 선 프리네〉, 1861.
상품과 소유자의 일반적 관계에는 폭력이 내재해 있다.
어떤 존재가 상품이 되어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은……
그 처분이 소유자에게 완전히 내맡겨지는 상황에 처한다는 뜻이다.
상품소유자의 전제적 지배 아래 놓이는 것이다.
또 첫 문장에 눈이 갑니다. 〈북클럽 『자본』〉 시리즈 2권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에서도 우리는 첫 문장을 꽤 오래 붙들었는데요. 이번에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 제2장의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김, 110; 강, 149] 너무 당연한 말이죠. 만화적 상상이라면 모를까, 상품이 제 발로 시장에 가서 자신을 다른 상품과 교환하는 일은 없겠죠. 너무나 당연해서 더 생각할 것도 없는 말입니다.
○ 상품이 소유자의 손에 끌려간다
그런데 당연한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여본 적 있습니까. 이를테면 “해가 동쪽에서 뜬다”라는 말에 문득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체험 같은 것 말입니다. 내게는 이 문장이 그랬습니다. 상품은 혼자서 시장에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걸 깨닫는 순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풍경이 바뀝니다. 특정 사물을 비추던 카메라가 줌아웃되면서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듯이. 지난 2권에서 살펴본 『자본』 제1장과 장소는 똑같은데 제2장은 풍경이 아주 달라 보입니다.
상품들은 작아지고 대신 그 상품들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상품소유자들이죠. 제1장에서 서로 다른 상품들의 만남으로 보였던 것이 제2장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만남으로 바뀝니다. 표정과 감각을 지닌 인간들이 서로를 마주봅니다. 제1장이 사물극이었다면 제2장은 사람극입니다. 제1장에서는 책상이 저절로 춤을 추는 줄 알았는데 제2장에서는 책상을 싣는 사람들의 손이 보입니다. 마르크스는 상품 소유자들의 만남을 “가면을 쓴 채 등장한 배우들”Charakter-masken로 묘사했는데요. 『자본』의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그렇듯 모두가 ‘페르소나’입니다. 주어진 배역, 즉 특정한 ‘경제적 관계’를 연기하는 사람들이죠.
사물들을 보다가 사람들을 보는 것. 이는 시야의 단순한 확대가 아닙니다. 사물들의 교제만 보았을 때 우리는 ‘가치’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서로 다른 사물들이 상품으로서 교환되려면 등가여야 합니다. 가치량이 같아야 하죠. 그런데 사람들의 만남은 조금 다릅니다. 일단 사람이 사람을 대등하게 만나는 것은 가치량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격의 동등성은 상품가치의 동등성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신분적사회적·법적 동등성입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서로 물건을 교환하려면 가치의 등가성만이 아니라 욕구의 상호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물건을 교환할 때는 욕구와 의지가 개입합니다. 가치가 동일하다고 무조건 교환하는 게 아닙니다.
상품소유자들이 인격적으로 동등하다는 건 서로에게 교환을 강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 상품을 누군가에게 기꺼이 넘겨주는 것은 내가 원하는 상품을 그가 가졌기 때문이지요. 내가 원하는 상품을 가진 사람이 내 상품을 원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상품을 원하는 사람에게 판 뒤 얻은 화폐를 가져가면 그도 상품을 내게 건네겠지요.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시장에 갑니다. 내 물건을 원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애초 물건을 들고 나서질 않았을 겁니다.
물론 이 믿음이 구원까지 얻게 할지는 알 수 없지요.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허탕을 치고 올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만든 물건이지만 남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내 땀의 양은 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물건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그리고 이때야 내 노동도 쓸모를 인정받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쓸데없는 짓을 한 셈이지요. 그러니 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나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죠. 타인의 욕망을 획득해야 내 물건이 하나의 상품으로서 사회성을 인정받으니까요.
지금 우리는 시야를 ‘사물’에서 ‘사람’으로 옮길 때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내가 끝으로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역사’입니다. 상품 자체는 왜 자신이 다른 상품들을 찾아나서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상품은 그저 자신과 마주하는 다른 상품을 거울처럼 바라보고 있지요. 거울을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겁니다. 상품은 상대방을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존재로만 간주합니다. 그러니 거울로서 상대방 상품은 서로의 교환이 동등하다는 것은 말해주지만 왜 둘이 교환되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상품은 왜 시장에 갔는가. 소유자에게 끌려갔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소유자는 왜 상품을 시장에 끌고 갔을까요? 그에게는 욕구도 있지만 사정이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삶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시장에 가야만 구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또 시장에서 어떤 것을 구하려면 시장에 무언가를 내다팔아야만 했고요. 언제부턴가 시장에서 이뤄지는 상품교환이 삶을 꾸려가는 방식이 된 겁니다. 고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요.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겁니다.
자본주의사회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것이라고 했지요. 사물들만 보아서는 이 점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물들이 상품이 된 것은 사물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니까요. 상품의 탄생은 인간관계의 역사적 탄생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자본』 제2장 첫 문단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물들이 상품으로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품보호자Warenhüter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이 사물들에 담아 인격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김, 110; 강, 149]
○ 상품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이제 우리는 『자본』 제2장을 통해 상품과 화폐의 존재가 전제하는 인간관계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살펴볼 겁니다. 상품소유자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다룹니다. 그런데 상품들의 관계에서 사람들의 관계로 넘어가기 전에 마르크스가 짧게 짚고 가는 것이 있습니다. 상품이 소유자의 손에 끌려가는 모습이죠.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마르크스는 상품을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상품과 소유자의 관계 말입니다.
제2장의 첫 문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품의 보호자 즉 상품소유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사물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다.”[김, 110; 강, 149]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 수 없”다는 말처럼 “상품은 사물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말도 지극히 당연한 말로 보입니다. 배추가 시장에 안 가겠다고 농부에게 저항한다면 괴이한 일이겠죠.
마르크스가 이 당연한 말을 쓴 이유가 뭘까요? 이 문장은 마르크스가 ‘소유한다’라는 것의 핵심을 무엇이라 생각했는지 알려줍니다. 상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전제적 지배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저항을 절대 용납하지 않죠. 그리고 거래를 통해 상품소유권을 누군가에게 넘긴다면 그가 해당 상품에 대해 전제적 지배권을 넘겨받는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하니 분위기가 좀 음산한가요. ‘사물인데 뭐 어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문장이 또 묘합니다. “만일 상품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인간은 폭력Gewalt을 사용할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을 장악하는 것이다.”[김, 110; 강, 149] 여기서 ‘장악한다’로 내가 옮긴 말은 독일어 ‘nehmen’인데요. ‘손에 넣다’, ‘취하다’ 정도의 말로 옮길 수 있겠습니다만, 바로 앞에 ‘폭력’이라는 말이 사용되었기에, 지배의 의미를 담아 더 강한 말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상품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경우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가정이 필요했을까요? 그랑빌J. J. Grandville이 『인생사의 소소한 재난들』Petites misères de la vie humaine에서 그린 것처럼 인간을 은근히 성질 돋게 하는 사물들을 상상한 걸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마르크스가 이런 말을 했는지 즉각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물건으로서 상품이 인간에게 저항하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살아 있는 상품’, 이를테면 ‘노예’라면 어떨까요. 이 경우 “상품은 사물이므로”라는 말은 아주 다르게 들립니다. 노예가 시장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할 때 주인이 내뱉는 말과 같지요. “상품은 사물이다. 네가 상품인 한, 너는 인간인 나에게 반항할 수 없다. 만약 네가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나는 ‘폭력’을 사용할 것이다. 나는 네 소유자이므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이처럼 전제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의 뜻이 더 담겨 있습니다. 마음대로 전제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그 대상이 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사물화한다는 뜻을 담고 잇습니다.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은 인격을 박탈당하는 일입니다.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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