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민주주의는 자신이 예견할 수 없었던 타자의 도래,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출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태의 도래와 함께 종언을 고한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종언을 통해 매번 새롭게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설정은 한국의 후진성을 나타내기는커녕, 데리다가 말하는 ‘도래할 민주주의’ 혹은 내가 이 글에서 명명하고 싶은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 일반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통용되는 민주주의 관념이 그 무능함을 드러낸 곳(가령 ‘국민-주권-대표’에 속하지 않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보라, 정치적 시민권이 없는 중고생들을 보라, 온갖 네트워크에 출몰하는 익명의 대중들을 보라)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이후의 민주주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