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잡감雜感을 시작하는 잡담雜談
이 책은 박권일의 잡감雜感이다. 잡감이란 말이 생경할지 모르겠다. 특별하고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는 단어는 아니다. 나는 이 단어를 어릴 적 읽은 루쉰의 글에서 발견했다. 루쉰은 소설가이지만 당대 중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개입하고 때로 격렬한 논쟁도 불사한 지식인이다. 사실 ‘소설가 루쉰’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의 소설 속 문장들은 아무리 번역일지라도, 늘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계몽 지식인 루쉰’은 좋아한다. 그의 짧은 에세이들은 반짝거리고 서슬 퍼랬다. 상대의 폐부를 곧장 찔러 들어가는 맛이 있지만 황량하고 강퍅하지만은 않았다. 유머와 낙관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짧은 글들을 루쉰은 ‘잡감’이라 불렀다.
잡감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여러 가지 잡다한 감상들’ 정도의 의미겠다. 잡감은 논문이 아니며 문학도 아니다. 요컨대 ‘학 學’이나 문 文’이 아니라 ‘감 感’이고 ‘촉 觸’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지성적인 작용이 아니다. 글을 쓰려면 먼저 감과 촉이 쫑긋 일어서고 분기가 탱천하거나 눈물이 글썽 맺히거나 배꼽이 빠지게 웃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성이 작동하는 건 그다음이다. 원인과 상관관계를 체크하고 불분명한 개념들을 명료화시키는 작업을 거쳐 하나의 칼럼이 나온다. 감성과 지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감성이 선행하지 않고선 지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나에게 잡감이란, 감과 촉이 지적 여과를 거쳐 나온 생산물이다.
이 책은 언론에 썼던 사회 비평을 추려낸 것이다. 대부분은 『시사 IN』에 연재했던 칼럼이며 다른 매체 기고문도 필요에 따라 골라 실었다. 세상의 모든 글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이런 종류의 글은 ‘정권’이라는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 나의 직업생활은 우연하게도 혹은 필연적이게도 정권 교체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며칠 후 공채시험을 보고 기자가 됐다. 수습 딱지를 떼자마자 처음 쓴 기사가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자살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자의 자살은 내내 이어졌다.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해방 이후 가장 개혁적인 정부”라는 노무현 정권 시기 비정규・불안정 노동은 날이 갈수록 확산되었다. 하지만 정부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거나 ‘경직된 노동계가 더 문제’라는 식의 반응으로 일관했다. 지금 ‘김진숙의 크레인’으로 유명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은 그녀의 절친한 동지이자 덕망 높은 노동운동가였던 김주익 씨가 노무현 정권 시기 노동자 탄압에 항의하며 농성하다 끝내 목숨을 끊은 크레인이다. 당시 내 취재수첩엔 늘, 장례식장 향 냄새가 묻어 있었다.
매체가 이런저런 불미스런 상황에 휘말리면서 어쩔 수 없이 기자일을 그만두었고 평소 갖고 있던 문제의식, 한마디로 ‘청년 세대의 불안한 노동’을 풀어낸 책을 한 권 썼다. 그게 『88만 원 세대』이다. 공저였기 때문에 온전히 나의 문제의식을 담아내지 못한 부분이 있고, 반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담겨 있기도 하다. 어쨌든 그 책은 생각 이상의 사회적 반향이 있었다. 이런저런 언론에 글을 쓰는 칼럼니스트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도 『88만 원 세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직업생활 2기, 칼럼니스트로서의 삶은 이명박 정권과 함께 시작했다. 이 책의 대부분이 이명박 정권, 즉 2007년 연말부터 2012년 봄까지 썼던 글이다. 읽어보면 금방 알겠지만 그중 ‘이명박 정권만’ 신나게 깐 글은 별로 없다. 누구나 까는 ‘가카’, 더 맛깔나고 통쾌하게 까는 것도 분명 일종의 재주일 테다. 다만 그런 일에 나는 전혀 흥미도 재능도 없다. 나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별 걱정도 하지 않는다. 이명박 시대가 “1987년 이후 가장 거대한 퇴행”이라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퇴행이라는 데에야 동의하지만 아마도 그들과는 이유가 전혀 다를 것 같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을 전두환 정권에까지 비견하는데, 아무리 이명박이 나쁜 대통령이라 해도 자국 시민을 학살한 살인마와 동급으로 격하시키는 건 과장이다. 내 보기에 이명박 시대가 퇴행인 이유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마치 좋았던 시절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명박을 악마화하는 지식인들, 유명 인사들 중 일부에게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정말로 태평성대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주익 씨가 목을 맨 85호 크레인에 올라갔던 날의 공포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나는 도저히 그런 태평한 말을 할 수가 없다. 노동과 경제라는, 쉽게 말해 ‘먹고사는 문제’에서 1987년의 성과를 송두리째 퇴행시킨 건 이명박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이었다. 노동/경제라는 관점에서 이명박은 김대중-노무현의 충실한 계승자일 뿐이다. 그래서 내 글은 이명박 정권만을 때릴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사회문제일수록 더욱 그렇다. 최소한 두 개, 또는 세 개 이상의 정권을 관통하는 어떤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늘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게 된다.
제목인 ‘소수의견Dissenting Opinion’은 본래 법률 용어다. 찾아보니 같은 제목의 소설이 몇 해 전 나온 적이 있는데, 이 책과 무관하다. 소수의견은 다수결로 최종 결정이 이루어지는 기관에서 다수를 점하지 못해 폐기되는 의견을 가리킨다. 대표적으로 대법원의 판결이 있다. 소수의견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단지 폐기된 의견이 아니라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수의견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소수의견이 내일의 상식이 될 것이다.” 소수의견의 존재 의의는 거기에 있다. 내 글의 논지는 대부분 한국 사회에서 소수의견에 속한다. 앞에다 ‘극’자를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진보 진영은 스스로 사회적 소수자라 생각할 테지만 내 주장은 진보 내에서도 소수의견이다.
소수이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구나 다수가 되기를, 다수의 지지를 얻기를 욕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더 아름답기 때문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어릴 적에 내가 다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란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스무 살이 넘어가며 내 운명을 직감했다. 나는 내 주장이 사회의 상식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에 눈곱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그런 맹목적인 믿음조차 없다면 이런 시대에, 이런 글을 쓰며 욕이나 먹는 ‘미친 짓’을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가카’ 또는 박근혜만 줄기차게 까거나 불쌍한 청춘들 위로나 해주는 멘토로 살고 싶다. 그런데 능력은 둘째 치고 타고난 비위가 약하니 어쩔 수가 없다. 도무지 역겨워서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이택광 선생이다. 그가 출판사에 ‘제보’한 덕에 꼼짝없이 붙잡혀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됐다. 뼛속 깊이 감사드린다. 자음과모음 강병철 사장과 정은영 주간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 책이 만일 좋은 평가를 조금이라도 얻게 된다면, 그 공은 나의 온갖 불평을 받아내며 일정을 진행한 문여울 편집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물론 책 내용상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은 저자인 나에게 있다.
2012년 6월 박권일
촛불 소녀의 ‘분노와 혁명’
한국 사회에서 ‘광장’은 늘 남성의 공간으로서 가부장적 위계와
군사 용어로 얼룩져왔다. 한데 이번 청계광장에서는 수많은
10대 소녀가 촛불을 들고 몰려나와 “너나 먹어 미친 소!”를
하늘 높이 외쳤다.
소녀시대, 아니 ‘소녀 혁명의 시대’다.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다. 2008년 5월 대한민국에서는 진짜 혁명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5월 2일과 3일 서울 청계광장에는 엄청난 수의 10대가 모였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더욱 충격인 건 이들 중 다수가 소녀라는 점이다. 생기발랄한 환호성만 들으면 마치 콘서트에 온 듯 착각할 정도다. 하지만 소녀들이 하늘 높이 쏘아올린 함성은 아이돌 스타의 이름이 아니었다. “너나 먹어 미친 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평범한 사물이 익숙한 자리를 벗어났을 때의 생경함과 위화감. 초현실주의적 광경이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처럼 놀란 어른이 많았나 보다. 곧장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독서실, 집, 학원에 있어야 할 소녀들이 왜 저기 있나?” “누가 순진한 저들을 꼬여서 집회장에 동원했나? 불순한 정치 세력이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
‘꼰대’들이 꼰대일 수밖에 없는 건 인지능력의 결핍 때문이다.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보청기와 색안경을 착용한다. ‘음모론’이라는 보청기와 ‘배후설’이라는 색안경을. 이런 보조기구가 없으면 꼰대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는 ‘광장의 권력’이 교체됐다는 사실만을 담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심지어 배후로 지목된 ‘운동권’과 ‘좌빨’조차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 시답잖은 음모론과 배후설은 치워버리고 그저 소박하게 물어보자. “무엇이 소녀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는가?”
10대 소녀만이 아니다.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사람 중에 특히 여성이 많다. 20~30대 여성, 아이를 업고 나온 여성도 있다. 몇 해 전 신효순·심미선 양 사망 사건이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와 비교해봐도 집회에 참가한 여성의 비율은 기이할 정도로 높아 보인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에서 광장은 늘 ‘남성의 공간’이었다. ‘건국 이후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 평가받던 ‘386세대’에게조차 그랬다. 전대협 의장은 늘 남학우가 차지했고, 여학우는 항상 리더가 아닌 서포터에 머물렀다. 아니면 가열찬 투쟁에 지친 남학우가 잠깐 쉬어가는 연애의 대상이거나. 그렇게 우리의 광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가부장적 위계와 군사 용어로 얼룩져왔다.
남성의 권력 놀음에 출산 파업으로 항의
광장의 남성이 왁자지껄 권력 놀음에 빠져 있을 때, 여성은 ‘소리 없는 파업’을 진행 중이었다. 지도부도 ‘선도투’도 없는 기묘한 총파업, 바로 ‘출산 파업’이다. 한국 여성이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로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쪼잔하게 공장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아예 중단시키겠다는 무언의, 그러나 무시무시한 항의였다.
‘건강’에 대한 여성의 염려는 남성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경제학적으로도 유기농 제품에 대한 여성의 선호는 확연하다. 그런 여성에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불안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공포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10대 소녀에게는 더욱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으리라. 그 소녀들이 광장에 나왔으니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그리고 광장은 소녀에게!
— 『시사IN』 35호, 2008년 5월
동물원 혹은 반상회
트위터는 온갖 군상이 구경꾼들을 앞에 두고 자기 전시를 벌이는
‘동물원’이자 누구나 원하는 걸 떠들어대면서도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반상회’다.
“야, 너 그거 안 꺼?” 애인이 불같이 화를 냈다.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꺼내 트윗하는 걸 예전부터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터다. 그날도 카페에서 커피 나오기를 기다리며 말 한마디 걸지 않은 채 터치스크린을 툭툭 눌러대는 나를 보고 드디어 그녀가 폭발한 것이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그날의 위기는 겨우 넘겼지만, 내가 생각해도 요즘 나의 트위터 중독은 좀 심각하다. 그러나 재미있기 때문에 끊을 수가 없다. 그 재미는 트위터의 두 가지 성격 때문이다.
하나는 동물원, 다른 하나는 반상회다. 트위터가 동물원이라는 건 무슨 말일까. 온갖 군상이 이곳에서 구경꾼들을 앞에 두고 ‘자기 전시 self-display’를 벌인다는 의미다. 프랑스 철학자 올리비에 라자크는 동물원을 “전시와 길들이기의 총칭적 형태”라고 했다. 자기 전시가 가능하려면 우선 트위터라는 시스템에 ‘길들여져야’ 한다. 140자 이내로 하고 싶은 얘기를 압축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도 ‘길들이기’에 포함된다. 언론은 트위터가 마치 완전히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기본적으로는 동물원과 동일한 형식(전시와 길들이기)이며 이것은 미니홈피나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인간들이 동물원을 만들고 그 속에 스스로 들어가서 구경의 대상이 되고 또 역할을 바꿔 자신이 다른 인간의 구경꾼이 되는 역동적 과정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할 뿐 아니라 다양한 서사를 생산해내는 매트릭스가 된다. 트위터를 들여다보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유명 인사가 평소에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낱낱이 알 수 있다. 나는 몇몇 ‘악명 높은’ 유명 트위터러를 팔로우 follow, 어떤 사용자의 글을 구독하기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거나 좋아해서가 결코 아니다. 하루 종일 얼마나 황당한 얘기들—대부분 어처구니없는 자기과시와 자랑이다—을 늘어놓는지 ‘구경’하기 위해서다.
트위터는 반상회이기도 하다. 반상회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걸 떠들어대면서도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트위터에서 논쟁이나 토론은 불가능하다. 비평도 불가능하다.
트위터는 텍스트를 분석할 시간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매체다.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 그야말로 즉각 반응해야 한다. 돌아다니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이전에, 이미 판결은 내려진다. 중요한 것은 분석의 정당성이 아니라 수사의 적절성이다. 이런 측면이 트위터를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다. 트위터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계를 오인하게 되는 것이다. 트위터에서 보이는 현실은 기실 자기 자신이 편집한 현실이다.
한국 언론의 열광과 관심은 오버…… 그냥 즐기자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팔로우하고 팔로우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들여다보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세계 자체인 것처럼, 또는 세계의 축소판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반상회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와 견해가 엄연히 실재하듯이, 자신이 팔로우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견해 또한 실재한다. 내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무리 나의 정치적 견해와 미학적 취향에 부합하더라도, 그것이 곧 대중의 판단인 것은 아니다. 요컨대 트위터는 내가 세계를 좀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존재의 안경’이 될 수 없다. 기껏해야 ‘세계의 파편’일 따름이다.
트위터에 관한 한국 언론의 열광과 관심은 대부분 지나치게 과장됐다.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처럼 우스꽝스러운 말이 또 있을까? 트위터 정도가 바꿀 수 있는 세상이란, 얼마나 허약한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SNS가 이렇게 유행하는 것은 정작 소셜 네트워크가 잘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 아닌가. 그냥 재미있게 즐기자. 오버하지 말고.
— 『시사IN』 152호, 2010년 8월
사이코패스의 야무진 꿈
착한 원인을 굳이 정신질환에서 찾는 미국 드라마, ‘나쁜 놈’을
사이코패스라 규정하면서도 ‘나는 정상인’이라 믿는 한국 사회.
공동체 목표를 상실하고 윤리·평등 같은 가치를 냉소하는 ‘실용주의’가 다다른.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웬트워스 밀러 분)는 샤프한 외모에 더해 뇌쇄적 음성과 천재적 지성, 천사적 감성까지 갖춘 ‘완벽남’이다.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형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공전절후의 탈옥극을 벌인다. 정교한 설정과 숨 막히는 스토리 전개에 한국의 ‘미드 폐인’은 열광 또 열광했다. 스코필드는 어느새 ‘석호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불린다.
당시 백수였던 내가 이 드라마를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한 회라도 빠뜨릴세라 열심히 봤다. 그런데 시즌 1의 중반 즈음에 이르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잘생기고 똑똑한 데다 착하기까지 한 석호필이, 실은 ‘정신병자’라는 거다! 석호필의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는 그가 ‘잠재억압부족 LLI: Low Latent Inhibition’이라는 희귀 질병을 앓는다고 말한다. 이 증상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겉모습뿐 아니라 내부 구조와 구성 요소까지 직관으로 파악해버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나치게 세세한 정보는 미리 차단하기 때문에 별탈이 없지만, 잠재억압부족 증상이 있는 사람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 때문에 결국 미쳐 날뛰게 된다.
정신과 의사는 덧붙였다. “하지만 석호필처럼 아이큐가 높으면 그런 정보를 모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난 천재가 된다.” 에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어딨어,라며 코웃음을 치다가 혹시나 싶어 잠재억압부족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놀랍게도 관련 논문이 실제로 존재했다.(2003년 하버드 대학과 토론토 대학 연구자의 논문 “Decreased Latent Inhibition Is Associated with Increased Creative Achievement in High-Functioning Individuals”)
석호필은 드라마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데, 곤경에 처한 사람의 아주 작은 신호조차 예민하게 감지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석호필이 착한 건,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착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인간이라서다. 이처럼 잠재억압부족이 미국 드라마 속에서 ‘착한 놈’의 생물학적 증거로 그려진 반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 PCL: Psychopathy Check List는 ‘나쁜 놈’이 될 가능성을 진단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선악의 근거를 생물학에서 찾는 까닭
진화심리학자 린다 밀리 박사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경쟁적 환경에서 타인의 이타심을 악용해 자기 욕구만 채우는 이기적 인간”이다. 그래서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고통에 그토록 무심할 수 있다. 연쇄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건 사이코패스 중 극히 일부인데,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욕구는 금전이 아니라 살인 또는 강간이다. 이외에 대다수 사이코패스는 ‘멀쩡한’ 사람이며, 경제학자들이 사랑하는 ‘합리적 인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사이코패스를 미지의 괴물로 생각한다. 정작 우리를 사이코패스로 만드는 환경에는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으면서.
‘착한 놈’이 착한 원인을 굳이 정신질환에서 찾아야 하는 미국 드라마, 그리고 ‘나쁜 놈’을 사이코패스로 규정하면서도 ‘나는 정상인’이라 굳게 믿는 한국 사회. 공통점이 있다. 선악의 근거를 개인의 생물학적 결함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이는 공동체의 목표를 상실한 사회의 특징이자 ‘윤리’ ‘평등’ 같은 가치 지향적 단어를 순진하다며 냉소하는 ‘실용주의’가 다다른 기묘한 종착지다. 남는 것은 승자독식의 ‘배틀 로열’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잠재적 사이코패스의 꿈은 야무지다. ‘나 말고, 당신만은 석호필이길.’
— 『시사IN』 32호, 2008년 4월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최근 10여 년간 한국에서는 사적 욕망이 소용돌이치며 사회가
지켜야 할 공공성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강한 국가, 일류 국가
에 대한 달뜬 기대가 들어섰다. 요즘 거리집회는 국가에게
할 일 제대로 하라고 외치는데…….
2008년 6월 중순 현재, 많은 사람이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황을 걱정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이 ‘이중 권력dual power’ 상태라고 말한다. 정부 권력과 시민권력이 날카롭게 대치한다는 거다. 내가 알기로 이중 권력이라는 말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쇼군-천왕 체제의 기묘한 권력 분점을 묘사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약 90년 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다. 우리의 맥락은 전자와 무관하므로 후자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혁명 전야? 에이, 설마! 오늘날 OECD 가입국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광고 문구 또는 비유적 과장일 뿐이다. 체 게바라의 여전한 인기는 혁명의 절박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티셔츠로 소비될 수 있어서다.
‘민족’ ‘통일’은 강한 국가의 수단으로서만 존재 의미 가져
한편 『뉴욕 타임스』는 이번 사태를 두고 “한국 민족주의 정서의 표출이다”라고 주장한다. 일부 운동권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마지막 분단국이고, 오랜 세월 외세에 시달려온 나라다. 그러나 북조선의 쇠락과 더불어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판타지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따위에서 공통으로 드러난 것은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지 과거와 같은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민족 혹은 통일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어려워졌다. 이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한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니 민족 정서를 언급하는 것은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중 국가 dual state’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중산층과 ‘막장’에 몰린 빈곤층이 90%를 이루고, 금융위기 이후 압도적 부를 축적한 10%로 구성된 사회다. 그리고 매일 1000원짜리 김밥을 먹는 사람과 1만 5000원 하는 브런치를 먹는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런 사회다. 이중 권력이 아니라 실은 이중 국가가 문제다.
단순히 ‘10대 90의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급격한 사회·경제적 충격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한국 사회의 합의를 걷잡을 수 없이 붕괴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적 욕망만이 소용돌이치던 혼란의 와중에서 사회가 지켜내야 할 공공성은 무참히 찢겨 나갔다. 그 빈자리에 자리 잡은 게 바로 강한 국가, 일류 국가에 대한 달뜬 기대였다.‘국가의 후퇴’가‘강한 국가의 열망’으로 나타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 판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정부는 이런 국민의 열망을 잘 감지했지만,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분열병적으로 오락가락하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농담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한미 FTA까지 밀어붙였다. 5년 내내 혼란스러워하던 중산층은 정권이 바뀌고서야 자기가 사는 나라의 실체를 깨달은 듯 이렇게 외친다. “이게 뭥미?”(‘이게 뭐야’라는 뜻의 인터넷 은어.)
거리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는 쇠고기 재협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도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거칠게 묶으면 모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얘기다. 가히 ‘국가의 귀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대체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 『시사IN』 41호, 2008년 6월
20대, ‘개새끼’와 ‘영웅’ 사이
이번 총선에서도 20대 투표율이 27%였다는 소문이 퍼지며
‘20대 개새끼론’이 유포됐다. 서울 20대 투표율이 64%라는
출구 조사 결과가 나오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어떤 마을에 ‘개새끼’와 ‘영웅’이 살고 있다. 재밌는 건 개새끼와 영웅이 별개의 인간이 아니라 어떤 때는 개새끼였다가 어떤 때는 영웅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언제 개새끼가 되고 언제 히어로가 되는지를 본인이 결정하지는 못한다. 오직 호명되거나 호출될 뿐이다. 무슨 소리냐고? 한국 사회의 영원한 ‘개새끼’이자 ‘희망’인 20대, ‘꽃’ 같기도 하고 ‘엿’ 같기도 한 청춘들 얘기다.
이번 총선에서도 여지없이 ‘20대 개새끼론’이 유포됐다. 야권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20대 투표율이 고작 27%였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확산됐고, ‘20대 여성’의 투표율은 8%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기정사실인 양 유통됐다.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의 투표율이 투표 시작 직후 78%에 달했다는 말까지 더해지면서 20대와 20대 여성에 대한 여론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결론만 말하자면 27%, 8%, 78%라는 세 개의 숫자 전부, 아무 근거 없는 루머였다. 정작 문제는 그런 루머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처음부터 무시되지 않고 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야말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더 중요한 건 이런 현상이 이번 한 번이 아니라 선거 때마다 거의 똑같이 반복됐다는 점이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나온 ‘20대 투표율 19%’ 루머는 몇 주 동안 기정사실화되는 바람에 일간지의 지식인 대담 기사 제목으로 뽑혔을 정도다.1
이번 19대 총선의 출구 조사 추정치가 발표되자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된다. 서울 지역 20대 투표율이 64%라는 출구 조사 결과가 나오자 사람들은 돌변했다. “20대에게 사과한다” “역시 서울 20대가 히어로” 등 칭찬 릴레이를 벌였다. 이 또한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 직후 벌어졌던 해프닝의 재판이다. 촛불시위 당시 ‘생각 없는 20대’를 맹비난해 이름을 날렸던 ‘나꼼수’ 김용민 씨는 박원순 시장 당선에 20대 지지가 도움이 됐다는 게 알려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20대 희망가’를 불러댔다.
『88만 원 세대』 공저자 우석훈은 지난 3월 26일 블로그에 글을 올려 “『88만 원 세대』라는 책이 20대가 싸우지 않을 핑계를 제공했다”라면서, 책을 읽고도 저항하지 않는 20대에 대한 실망을 토로하며 『88만 원 세대』의 절판을 선언했다. 다른 한 명의 공저자와도, 출판사와도 전혀 협의하지 않은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2009년 초 『조선일보』가 88만 원 세대론을 ‘486세대’와 20대를 분열시키는 세대 갈등론과 세대 자질론으로 왜곡해 진보적 의미를 탈색시키고 있을 때, 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던 이가 우석훈이다.2 당시에 나는 공저자로서 그의 행동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을 쓴 바 있다.
세대의 이념 성향은 신뢰할 수 없는 지표
『88만 원 세대』라는 책의 한계를 화풀이하듯 20대에게 전가해버리는 방식으로 뒤늦게 우석훈은 ‘20대 개새끼론자’가 됐다. 그의 행위 역시 결국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어떤 돌림병의 한 증좌다. 사회문제를, 심지어 자기 자신의 문제를 특정 세대의 문제로 전가시키고 희생양으로 삼는 ‘세대 환원론’이라는 이름의 돌림병 말이다.
문제는 20대가 실제로 개새끼인지, 아니면 희망인지 따위가 아니다. 조사해보면 세대의 이념 성향이나 정치 참여도는 단기간에 크게 급변한다. 계급 적대가 정당을 통해 제대로 대의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이기에 특정 세대의 이념은 정치적 계기에 따라 끊임없이, 그것도 큰 폭으로 진동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세대의 이념 성향은 신뢰할 수 없는 지표다. 섣부른 20대 혐오론과 20대 희망론에 공히 거리를 두고 신중히 바라보면 그제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개새끼’도 ‘영웅’도 아닌 프레카리아트 청춘들의 난처한 얼굴이.
— 『시사IN』 241호, 2012년 5월
1 「20대 투표율 19%는 대의정치 심각한 위기」, 『경향신문』, 2008년 4월 11일자.
2 「20대 당사자 운동과 변희재의 실크 세대」, 『한겨레』, 2009년 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