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이 책에 소개한 20가지 질문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자주 떠올리는 것들이다. 별다른 성찰이 없이도 자연스레 떠오르는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학문은 특이하게도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의 전통에서는 합의된 확실한 해답을 찾기 어렵다. 학문으로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 점이 유감스럽거나 당혹스러울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언뜻 단순 명료해 보이는 질문도 실은 여러 가지 작고 복잡한 질문들로 분해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덕은 왜 중요한가?" 혹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을 때 우리는 마치 한 가지 답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물음에는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다. 특정한 상황, 예컨대 이러저러한 유혹에 마주쳤을 때 특정한 방식으로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 있는가? 반드시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잡아끌고 부추기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한 가지 답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다양한 답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답보다 답을 찾는 과정이다.
또한 함정을 감추고 있는 질문도 있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있는가?" 같은 질문이 그런 예다. 이것은 보통 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도 깊이 있는 물음이지만, 그 깊이와 그것에 대한 강렬한 관심은 알고 보면 논리적 착각에 불과할 뿐 결국 답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만 확인시켜 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실은 세심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인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타까워하거나 난감해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인간사에 관해 글을 쓰려 할 때 모두 똑같이 쓰지는 않는다. 정치적 결정이나 가족의 다툼 같은 일에서도 당사자와 관찰자에 따라 입장이나 견해가 다르게 마련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사랑, 전쟁, 공포, 야망 등에 관해 훌륭한 희곡들을 썼지만, 누구도 그가 그것들에 대해 "정답"을 내렸다거나 더 이상 보탤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독자들에게 질문들을 제기하고 약간의 설명을 부연하면서 그와 연관된 함정과 복잡한 문제를 접하게 하려 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20가지 질문은 우리 모두가 맞게 될 죽음을 다룬 맨 마지막 질문 하나만 빼고는 순서와 무관하다. 각각의 논의는 모두 독립적이므로 독자들은 마음에 드는 것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항목들끼리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 독자들은 자주 책을 앞뒤로 뒤적이게 될 것이다.
지난 세기에 나타난 경향은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과학적 승리주의다. 인간 유전체가 완전히 분석되고 생물학과 의학의 눈부신 성과가 잇따르면서 철학과 같은 인문학 연구는 아무래도 크게 위축되는 분위기였다. 우리 철학자들이 인간 본성을 추구하는 일에만 계속 매달린다면, 철학은 머잖아 쓸모없어지고 과학의 압도적인 위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지 않을까? 나는 이 책의 여러 장에서 인간 본성을 다루는 새로운 과학의 연구 성과와 전망을 고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굳은 확신을 항상 얻지는 못했다. 아무쪼록 나의 사유가 과학의 성과에 대해 의심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껴야 하는지에 관한 까다로운 문제들에 적절히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게 끊임없이 용기를 불어넣어 준 나의 대리인인 캐서린 클라크와 쿼커스 출판사의 편집자인 웨인 데이비스에게 감사를 표한다. 또한 여느 때처럼 편집과 글에 관해 귀중한 도움을 준 아내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2008년을 안식년으로 허가해 준 덕분에 나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쓸 수 있었으며,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가 연구 교수의 자리를 내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두 학교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나는
기계 속의
유령인가?
● 의식의 탐구
우리 몸은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살덩이에는 크고 정교한 뇌도 포함된다. 뇌는 수천억 개의 뉴런 혹은 뇌세포들이 모인 대단히 복잡한 집합체로, 뉴런들은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전부 합치면 셀 수 없을 만큼의 연관이 생겨난다.
인간의 뇌는 기억, 시각, 청각, 사고, 자발적 행동을 제어한다. 또한 비자발적 행동과 유기체의 자율적 생존 활동을 조절하는 데도 부분적으로 관여한다. 다양한 감각 기관이 물리적 자극에 반응해 그 신호를 뇌의 해당 부분에 보내면 사물을 보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고, 기억하고, 비교하고, 분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뇌는 놀랄 만큼 훌륭하게 기능한다. 우리는 뭔가 잘못되었을 때에야 뇌가 대단히 연약한 조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뉴런이 조금만 손상되어도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자기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정밀한 검사로 발견될 수 있는 아주 작은 조짐이 무시무시한 알츠하이머병으로 번질 수 있다.
내면세계
뇌는 우리가 의식하고 사유하고 행위하는 동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리적 기반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끌린다. 물론 뇌의 기능은 놀랍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것은 무엇의 기반인가? 이를테면 광선은 우리 눈에 닿는 순간 그 시각적 자극을 좇아 망막 세포와 시신경을 활성화시킨다. 이것은 이어서 시각 피질의 활동을 증대시키며, 그로부터 그 자극이 전체 체계의 다양한 부분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예컨대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 멋진 물리적 체계로부터 어떻게 의식적 경험이 생겨나는가? 우리의 상상 속에는 일종의 부차적인 별도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내적' 경험의 세계, 즉 우리의 상상, 감정, 사고, 감각 경험의 세계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사물에 접한다.
〈잠자는 집시〉, 앙리 루소, 1897년 The Sleeping Gypsy, Henri J. F. Rousseau |
나는 나의 내면세계에, 당신은 당신의 내면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세계에는 다가갈 수 없으며, 다가가더라도 자신의 내면세계에 다가가는 방식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정신 상태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라면 내 뇌에서 일어나는 자극의 유형을 도표로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는 주체는 바로 나다. 누가 내 뇌를 아무리 꼼꼼히 들여다본다 해도, 내 뇌세포들의 활동 방식을 아무리 정확하게 나타낸다 해도 다른 사람은 나의 시각 경험을 대신하지 못한다. 우리의 정신 상태는 그 어떤 최고의 뇌 과학으로도 살펴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내가 파리의 거리를 생각하며 마음의 눈으로 그곳을 한가로이 거니는 장면을 떠올린다고 가정하자. 설령 신경 생리학자가 내 뇌의 한 부분을 아무리 정밀하게 조사한다 해도 "아하! 파리 거리에 관해 생각하고 있군!" 하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게다가 뇌는 회색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파리의 거리는 온통 밝은 색으로 가득하다. 뇌는 작지만 내가 생각하는 파리 거리는 크고 넓다. 뇌는 부드러운 조직으로 되어 있지만, 내 머릿속의 파리 거리는 단단하게 포장되어 있고 그 위로 수많은 자동차들이 다닌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17세기에 과학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도 이 문제에 사로잡혔다. 그는 두뇌의 한 부분(송과선이라고 불리는 부분)이 정신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상정했다. 당신 혹은 자아는 그 문 뒤에 머물고 있다. 뇌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면 당신은 두뇌에 명령을 내리고 그로써 사건의 연쇄가 시작되어 걷거나 말하거나, 심지어 의식의 문제에 흥분하게 된다. 20세기에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은 이 모델을 '기계 속의 유령'이라고 불렀다. 뇌-신체 체계는 거대한 기계다. 이 기계는 정보를 유령에게 전하고 유령에게 지시를 받아 신체를 반응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데카르트는 비록 자아가 선박의 키잡이처럼 신체 안에 존재한다는 모델을 거부했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그렇다.
신이 기뻐하는 뜻
의식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불만족스럽다. 과학의 날개를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모델에서는 아무리 신경 과학이 발달하더라도 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 수 없다. 이 닫힌 문 뒤의 세계가 물리적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유령의 세계는 과학적 탐구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게다가 유령이 신체와 연결되는 체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작용하는 법칙과 힘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완전히 생소한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만 그런 출입금지 구역에 관해서는 과학이나 철학이 아무 소용도 없다.
지난 세기말의 10년은 의식 연구의 10년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의식에 대해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근본적인 철학적 입장들이 나타난 것은 데카르트가 의식 문제를 처음 연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 입장들은 데카르트의 모델을 추종한 존 로크John Locke와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의 대화에서 등장했다. 로크는 특정한 감각, 예컨대 바늘에 찔린 아픔과 같은 느낌이 어떻게 물리적 세계의 특정한 자극으로부터 생겨나느냐는 문제에 접했을 때, 그 연관은 '신이 기뻐하는 뜻'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흔히,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해야 할 때 쓰는 단골 수법이다. 그와 달리 인간 지성의 힘(질문 14.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있는가? 참조)에 대해 더 낙관적이었던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색깔과 통증 같은 관념이 자의적이라거나, 관념과 그 관념을 갖게 한 감각 원인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신의 뜻은 그렇게 비합리적이지 않다. 나는 둘 사이에 일종의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철두철미 관철되는 완전한 유사성이 아니라 원인이 되는 현상과 결과가 되는 현상 사이의 질서 정연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유사성이다. 예를 들어 타원이나 포물선, 쌍곡선은 평면에 원을 투영시켰을 때 원과 유사한 점이 있다. …… 물론 통증 자체는 바늘의 움직임과 유사하지 않다. 하지만 통증은 바늘이 우리 몸 어디를 찔렀을 때의 반응과 대단히 비슷하며, 머릿속에서 바늘에 찔렸을 때의 느낌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점에 관해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로크는 신이 세 가지 일을 했다고 본다. 물리적 세계를 만들고, 의식적 경험 세계를 만들고, 양자를 잇는 법칙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신이 물리적 세계 하나만 만든 것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나머지는 기하학에서 전제로부터 결론이 따라 나오는 것처럼 저절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신(자연)이 직각 삼각형을 만들면, 그 빗변의 제곱은 자연히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아진다.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제시한다. 즉 의식적 경험의 '세계'는 물리학과 신경 과학의 세계와 납득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메리, 스펙트럼, 좀비
그렇다면 "뇌 자극의 특정한 조합으로부터 '생각이 떠오른다.'"는 결론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일반적인 철학 용어로는 생각이 뇌 자극에 '수반supervene'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뇌 상태의 변화가 없으면 생각의 변화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곰곰이 잘 생각해 봐도 그 생각의 떠오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실제로 생각 속에 떠오르는 의식적 세계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전혀 알 수 없다면 그런 말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이 기뻐하시는 뜻'으로 알고 넘어가라는 로크의 절망적인 충고와 다를 바 없다. 라이프니츠는 그보다 더 명료한 이해를 강조한다. 그의 결론은 후대의 철학자들이 '설명적 간극explanatory gap (인간의 경험이나 감각을 기계적인 과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개념―옮긴이)'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설명적 간극을 논의하기 위한 논변은 많이 있다. 때로는 그런 논변을 직관 펌프intuition pump( 어떤 문제에 관해 직관적인 답을 유도하는 사고 실험―옮긴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중 하나는 좀비의 환상이다. 신체적으로는 우리와 같으나 의식적 경험 세계로 가는 문이 닫혀 있는 생명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생명체는 우리와 똑같이 행동하지만 의식은 전혀 없다. 내면세계도 없고 단지 외적인 모습만 있을 뿐이다. 로크의 견해에 따르면, 신은 좀비를 만들 수 있다. 두 번째 사고 실험은 '전도된 스펙트럼'이다. 신체 구조가 우리와 똑같지만 색채를 전도된 방식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말하자면 우리는 스펙트럼의 한쪽 끝을 파란색이라고 여기지만, 그 사람은 그것을 반대편 끝의 빨간색으로 보는 것이다. 좀비처럼 그도 신체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으나 사물의 외양을 다르게 보기 때문에 그의 의식적인 삶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세 번째 사고 실험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자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의 독창적인 논문에서 나온 '프랭크 잭슨의 인식 논증'과 관련이 있다. 그의 글에 등장하는 물리학자 메리는 물리학, 화학, 인간 두뇌의 작동, 인간의 대응 행동 등 여러 분야에 관해 두루 풍부한 지식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토록 흑백의 방 안에서만 지냈다. 어느 날 그녀는 방에서 나와 처음으로 바나나를 보고 혼잣말을 한다. "아하! 노란색이라는 게 저런 것이구나! 그동안 무척 궁금했어." 여기서 메리는 직관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 "아하!"라는 말은 그녀의 의식 내부에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다. 그녀는 안구의 구조와 운동―예컨대 뇌 체계는 빛의 파장과 에너지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한다.―에 관해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지만 노란색이 어떤 경험인지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노란색이 무엇인지 아는 것과 노란색을 경험하는 것 사이에서 느끼는 간극은 설명적 간극과 다를 바 없다.
사물과 신체의
물리적 체계로부터
어떻게 의식적 경험이
생겨날까?
많은 철학자들이 라이프니츠처럼 직관 펌프의 개념에 맞서 싸우려 한다. 그 이유는 직관 펌프 개념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전혀 알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만약 좀비가 존재한다면 당신이 좀비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설령 당신의 말과 행동을 보고 당신이 의식을 가진 존재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해도, 당신을 의식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수십억 명의 좀비들 속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는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신이 기뻐하는 뜻일지도 모른다. 혹은 신이 비교적 마음 좋은 사람들에게만 의식을 주고, 악독하거나 세상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다행히도 의식이 없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도록 선을 행했는지도 모른다.
전도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해도 당신은 자신이 하나의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불만을 꾹 눌러 참고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는 원하는 만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명철한 논증을 통해 그 문제를 우리에게 들이민다. 오늘 나는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색을 본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내내 의식적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 기억이 그 점을 보장해 준다는 답은 만족스럽지 않다. 혹시 현재 나의 신경 상태가 지금까지 내 뇌와 신체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 변화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혹은 내가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색을 본다는 메시지,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내가 의식적으로 살았다는 메시지가 의식의 입구를 통해 내 생각 속으로 주입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기억을 믿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의식의 입구는 그렇게 자주 열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실제로는 내 의식이 닫혀 있는데도 마치 언제나 열려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게 아닐까? 의식이 어떻게 자취를 남기는지 설명해 주는 이론 같은 것은 없다. 기억에 관한 것들은 대체로 신경 생리학의 기능적 설명에 의존하는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포 활동에는 물리적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정도까지다. 어쩌면 의식은 아예 자취를 남기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내내 의식이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반박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로 돌아가자. 그가 말하는 납득할 수 있는 관계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앞에 제시한 세 가지 직관 펌프를 하나씩 차례로 살펴보자. 좀비? 흥미롭게도 좀비 사고 실험을 학교에서 설명하면 대다수 학생들에게 잘 먹힌다. 학생들에게 좀비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뻣뻣한 몸놀림을 흉내 낸다. 느릿느릿 비틀거리면서 기계처럼 자동화된 동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좀비가 어떻게 말하느냐고 물으면, 학생들은 자동 응답 전화기처럼 단조롭고 감정 없는 기계음을 낸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좀비는 우리와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여야 한다! 이제 우리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신속하게 대처하고, 유순한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이해하고, 기민하게 상황을 판단한다. 농담을 던지고 자기 특유의 몸짓을 하거나, 알 수 없는 찌푸린 표정을 지으며 나아가 다양한 감정과 기분, 태도, 느낌을 드러낸다. 표정만으로도 생각의 과정을 대단히 정확하게 드러낸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라이프니츠가 말한 기하학적 유추가 무엇인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표정과 동작으로 표현된다. 그 관계는 라이프니츠가 예로 든 원과 타원의 관계처럼 명료하다. 우리는 친구가 한 대 얻어맞고 눈물을 흘리거나 농담을 잘 알아듣는 것을 보고 그의 의식적 삶이 어떨지 알게 된다. 그러면 그가 좀비일 가능성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생명체는 우리와 똑같이 재빠르게 미소 지을 수 있고, 험악한 태도를 취하거나 표정을 찌푸릴 수 있다. 우리가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다. 내 학생들이 상상하는 좀비는 죽은 존재로 보인다는 점에서 내가 말하는 좀비와는 완전히 다르다.
전도된 스펙트럼은 수많은 흥미로운 문제를 일으키지만 여기서는 간략히 언급하는 데 그치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전도가 확실하게 가능한 것은 색채뿐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나와 똑같은 생명체가 음정의 전도를 가지고 있다는 관념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이를테면 내가 듣기에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높은 새소리로 듣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다). 명암도 마찬가지다. 내가 흰색이라고 보는 것을 검은색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명암의 경우는 모순이 더 쉽게 드러난다. 캄캄할수록 사물을 더 잘 보는 사람이 있을까? 밤에 물건을 찾지 못해 더듬는데 밤이 대낮 같을 수는 없으며, 낮에 장애물을 더 잘 피할 수 있는데 낮이 밤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상황을 떠올릴 수나 있을까? 색채의 경우에도 명암만큼 명확하지는 않아도 비슷한 논증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색채는 사물의 다른 측면들과도 연관을 가진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따뜻함과 자극을 주는 색이고, 노란색은 밝음, 파란색은 우울함, 녹색은 시원함을 준다. 또한 색채들 간에는 매우 복잡한 연관이 있다. 색상환의 색들을 체계적으로 바꿔 놓으면 색채들 간의 상호 관계가 변하게 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물리적 특성이 고정되어 있으면 색채들이 보이는 방식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메리가 "아하!"라고 말한 순간은 반드시 극적인 것은 아니다. 메리에게 자주색 바나나를 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는 속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빛 민감성에 관한 신경 생리학에 따르면, 그녀에게 고유한 색은 빨간색, 녹색, 노란색, 파란색의 네 가지뿐이다. 다른 색들은 그 색들이 섞여서 만들어진다. 예컨대 자주색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혼합이고, 주황색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혼합이다. 메리는 눈에 어떻게 보이든 노란색이 고유한 밝은 색채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으며, 바나나가 노란색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자주색 바나나는 한눈에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런 식의 논증을 연장하면 설명적 간극을 점점 좁혀 라이프니츠의 꿈이 실현되는 지점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생명체는 의식이
아예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낚싯바늘에 매달린
물고기도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실제로 그럴까?
현재 널리 통용되는 이론에 따르면, 의식은 뇌와 신체의 상태를 감독하는 '고급'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의식적 통증을 형성하는 것은 자신의 상처나 고통에 대한 자기 인식이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고통스럽다'는 것은 물이 부족한 나무가 고통스럽다는 감각에 더 가깝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의식적이지 않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은 언어가 없으면 고급의 사고, 즉 의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종차별주의speciesism(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물 종을 차별하는 태도―옮긴이)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충직한 개나 동물원의 가련한 원숭이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의식이 단지 우리 자신의 상태를 감독하는 기능만 있을 뿐 주변 세계를 주의 깊게 살피는 기능은 없다고 할 진화적인 이유는 없다.
내가 보기에 의식의 본질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의식을 겉으로 표현되는 행동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웃음이 즐거움이나 행복의 대단히 자연스러운 표현 양식이라는 관념을 되찾아야 한다. 마음의 상태는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의 배후에 꼭꼭 숨어 있는 게 아니라 그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드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즐거운 기분에 젖은 사람은 발걸음이 가볍고, 낙담한 사람은 무거운 걸음걸이에 풀 죽은 표정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식적인 삶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내 옆에 나란히 앉아서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은 그의 개인적인 관심이나 경험이 특별히 다르지 않는 한, 나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관점은 정신을 신체의 형상이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도 비슷하다. 다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의식'이라고 곧장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의식을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수수께끼의 세계에 속하는 게 아니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앞섰다. 의식은 이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만약 신이나 자연이 생명체를 창조했다면 그 작업은 훌륭히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할 필요도 없었고, 두 세계를 조정하기 위한 또 다른 과제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서문, 본문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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