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 Ⅰ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기억하나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대사로 유명하죠? 오늘에 집중하고 현재를 살라는 의미의 라틴어인데요, 여기저기 많이 인용되고 있어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이 말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음의 사실은 영화를 본 분들이라도 잘 모를 거예요. 영화 속에서 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그가 자살하기 전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겹도록 외우던 것이 바로 라틴어 동사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 〈썰전〉에서 유시민 작가와 전원책 변호사의 대화 중에도 라틴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기승전결, ‘라틴어는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부제 역할을 맡았던 강동원 씨도 한 인터뷰에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라틴어를 배우다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대학교에서 라틴어 강의를 할 당시에 학기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수강 취소를 해도 된다고요. 실제로 라틴어는 공부하기 어려운 언어입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언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라틴어는 지금도 우리 생활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유비쿼터스, 비전, 아우디, 에쿠스, 아쿠아, 스텔라 등과 같이 익숙한 말들 모두 라틴어이거나 라틴어에서 온 말들입니다. 대학이나 기업이 표방하는 모토 중에도 라틴어로 된 것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라틴어로 말한 것은 무엇이든 고상해 보인다Quidquid Latine dictum sit altum videtur”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Non tam praeclarum est scire Latinum quam turpe nescire.
논 탐 프래클라룸 에스트 쉬레 라티눔 쾀 투르페 네쉬레.
라틴어를 모르는 것이 추하지 않은 만큼 라틴어를 아는 것도 고상하지 않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가로 라틴어의 대가로 불리는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가 한 말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지긋지긋한 라틴 문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라틴어가 공용어였던 로마 제국에서조차 이 언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모르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편견은 그때에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는 로마 제국의 확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라틴어에 대한 문맹률이 높았습니다. 즉 라틴어를 잘 익히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를 왜 잘 배우지 못했을까요?
무엇보다 라틴어는 문법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명령법, 부정법, 분사, 동명사, 목적분사를 뺀 대략의 능동태만 해도 60여 가지가 넘습니다. 동사의 다양한 어미변화는 물론이고 수동태의 어미변화는 더 복잡해요.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지레 겁먹고 공부의 가시적인 성과를 보기도 전에 이미 질려버립니다. 하지만 이 고비들을 잘 넘기고 복잡한 문법 체계를 익히고 나면 확실히 공부하는 훈련이 됩니다. 어렵고 미묘한 문제와 마주해도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기한 일이죠? 오래 해보면 깨닫게 되겠지만 라틴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줍니다.
우리가 천재라고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처음부터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섯에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지 않은 문학, 철학, 역사 고전을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문학을 통해 자신의 두뇌를 새롭게 바꾸고 싶어했어요. 다빈치는 타고난 천재들의 사고를 따라가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인문학 고전들을 라틴어 원전으로 읽으면서 묻혀 있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죠.
또한 라틴어는 몹시 조직적이고 수학적인 언어입니다. 동사 하나의 변화가 160여 개에 달합니다. 명사 하나만 봐도 호격을 제외하고 단·복수가 각각 1격에서 5격까지 다섯 가지로 변합니다. 명사를 꾸미는 형용사의 형태도 명사의 성, 수, 격에 맞게 다 일치해야 합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죠. 이런 언어를 훈련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암기하는 방법, 공부에 대한 접근법이 자기 나름대로 생깁니다. 사고의 책장이 마련되어 어떤 칸에 어떤 책을 꽂을지 체계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라틴어 공부의 진면목이자 라틴어로 쓰인 것들이 심오하고 고상해 보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동사 하나의 활용표를 직접 보는 게 좋겠습니다. 오른쪽은 ‘도do’ 동사의 변화표입니다. 라틴어는 규칙 동사만 해도 제 1활용에서 제 4활용 동사까지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탈형동사가 끝나고 나면 반탈형동사가 있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불규칙동사가 나옵니다. 엄청 복잡하죠? 어쩌면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게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유럽을 비롯한 서양의 교육 문화에서 라틴어 학습은 오늘날에도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에서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학생과 학부모는 우리나라로 치면 인문계 및 자연계 학교인 일반 고등학교와 실업계인 기술 고등학교 중 어디에 진학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분야에 따라 이수 내용과 학과목이 현격히 달라지는데 그 가운데 한 과목이 바로 라틴어입니다. 라틴어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한 학생들만 공부하고,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주로 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능시험의 일종인 ‘마투리타maturità’라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졸업장, ‘디플로마diploma’를 받게 되죠. 그런데 이 디플로마를 받기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이틀 동안 시험을 치르고 한 번의 면접을 거쳐야만해요. 그중 첫째 날 첫 번째로 치러야 하는 과목이 고전어 능력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대한 실력을 평가합니다. 이때 고사장에는 확인받은 라틴어 사전과 그리스어 사전, 필기구만을 지참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날엔 우리나라 시험과 비슷한 과목의 시험을 보고요. 결국 라틴어를 잘하지 않고서는 대학에 진학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틴어는 유럽의 고등학생들에게 그저 죽은 과거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수능 영어나 국어에 해당할 정도로 비중이 높은 과목인 것이죠. 그런 까닭에 서점에 가보면 교재 코너에 진열된 다양한 라틴어 학습서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인 마투리타를 통과하면 의대를 제외하고 어느 대학 어느 학과든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습니다. 단 의대만은 수학능력을 고려하여 고등학교 졸업 시험의 상위 2퍼센트의 학생들만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무턱대고 명문대학에 진학하지는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진학할 수가 없습니다. 졸업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졸업이 보장되는 한국의 대학과 달리, 유럽의 대학은 각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졸업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는 입학한 학생의 28퍼센트 정도가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은 이보다 더 낮은 수치인 18퍼센트 정도가 졸업을 합니다. 이런 이유로 해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교포 학생들 중 일부는 유럽의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한국의 대학에 입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했던 라틴어 수업을 듣는 교포 학생들에게는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만큼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해주기를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2010년 2학기부터 2016년 1학기까지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강의를 진행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실생활에 별 소용도 없고 어렵기만 한 라틴어 수업을 학생들이 과연 좋아할까 염려했었어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많은 학생들이 제 강의에 뜨겁게 호응해주었습니다. 신촌의 인근 대학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점 교류가 되지 않는 학교의 학생들도 청강을 하러 올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인기가 좋으니 오히려 그런 반응이 잘 이해되지 않았고, 라틴어 수업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학생들은 이 강의를 단순한 라틴어 수업이 아니라 ‘종합 인문 수업’에 가깝게 느꼈던 겁니다. 강의에서 라틴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많은 나라들의 역사, 문화, 법 등을 비롯해 그로부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총체적으로 다루다보니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습니다.
사실 외국어를 빨리 익히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호기심과 애정을 갖는 겁니다. 좋아하면 더 빨리 잘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라틴어를 공부할 때 유럽 사회의 학문과 문화의 다채로운 면모를 발견하면서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해소해나갈 수 있었고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라틴 문학이나 라틴어와 연관된 학문을 한다면 라틴어의 문법을 철저히 공부해야 하지만 교양 수준으로 배우는 학생들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수업의 궁극적인 목표도 라틴어 실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 대한 흥미를 심어주고 라틴어를 통해 사고체계의 틀을 만들어주는 데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학생들의 머릿속에 책장을 하나씩 만들어주는 것이 수업의 지향점이었지요.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강의실을 빽빽하게 메운 학생들의 긴장된 표정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학생들의 표정에서 이 수업을 신청한 것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감이 묻어났습니다. 그래서 첫 수업에서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학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라틴어 수업을 들으려고 하느냐고요. 그러면 “선배(친구)가 이 수업을 듣고 좋았다고 해서요” “라틴어는 유럽어의 모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배울 곳이 흔치 않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있어 보이려고요” 등 저마다 제각각의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그중에서도 “있어 보이려고요”라는 대답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어요.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누군가가 라틴어를 좀 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좀 남달라 보일 것 같지 않나요? 만일 외국인 친구가 대화 중에 한국어로 논어를 인용한다면 어떻겠어요? 그 친구가 달리 보이지 않을까요? 실제로 제 수업을 듣고 해외로 유학을 간 학생들이 비슷한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는데요, 한국 대학에서 라틴어 수업을 들었다고 이야기하면 현지 학생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해요. 외국인 유학생이 우리말 고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죠.
매 학기 초 이렇게 학생들에게 라틴어 공부를 왜 하는지 묻고 답을 들었던 것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공부는 어디에서, 무엇에서부터 시작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앞선 대답들처럼 대부분의 학생들이 라틴어 강의를 선택한 데는 그리 엄청난 계획이나 원대한 포부가 있진 않아요. 제 경우에도 어린 시절에 왜 외국어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돌아보면 그 이유가 대단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유치했죠.
저는 중학교 시절에 공부를 잘하고 싶었어요. 어느 날 동네에 있는 중학교의 수, 서울에 있는 학교의 수를 헤아려보니 제 위치가 정말 별 것 아니었어요. 심지어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 학교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학생은요? 어린 마음에 ‘내 경쟁 상대는 여기에 있지 않고 해외에 있다’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반 친구들, 한국의 학생들은 나와 같이 공부하는 동료라고 여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그땐 정말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외국 학생들과 경쟁하려면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다른 친구들이 자습서를 볼 때 저는 『성문 기초 영어』『성문 종합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당연히 중간·기말 고사 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시험 성적을 잘 받으려면 자습서를 봐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원했던 건 단순히 시험 성적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시험 결과에 실망하면서도 외국어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어요. 대학교에 가서도 시간 단위로 라틴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공부했습니다. 물론 이때에도 큰 성과가 있었던 것 아닙니다. 엄청 좌절하고 스스로를 루저라 생각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훗날 로마에 유학을 가서야 꽃을 피우게 됩니다.
여러분도 기억해보세요. 어린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던 데는 부모님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혹은 다른 친구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와 같은 이유들이 있었을 겁니다. 뭐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에요. 그게 어른이 된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뭔가를 배우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있어 보이려고, 젠체하려고 시작하면 좀 어떻습니까? 수많은 위대한 일의 최초 동기는 작은 데서 시작합니다. 지금 전 세계 수억의 사람들이 보는 ‘유튜브’ 역시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영상 클립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거시적인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삶의 긴 여정 중의 한 부분인 학문의 지난한 과정은 어쩌면 칭찬 받고 싶은, 젠체하고 싶은 그 유치함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소위 배움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고 합니다. 라틴어뿐 아니라 그 어떤 것을 공부하든 공부가 즐겁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예 즐겁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뭔가 거창한 목적마저 있어야 한다면 시작하기 전부터 숨이 막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뭔가에 관심이 생기고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내가 왜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왜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한번 들여다보세요. 그 다음 내 안의 유치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거나 부끄러워하기보다 그것이 앞으로 무엇이 될까, 끝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요? 지치고 힘든 과정에서 오히려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어주지 않을까요? 그러니 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의 그 마음이 그저그런 유치함이 아니라 ‘위대한 유치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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