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나의 정치적 성향은 어디에서 왔을까?
1장
나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은유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뇌
엘리자베스 웨흘링(이하 웨흘링)
언젠가 선생님은 은유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며, 2차걸프전쟁과 이라크전쟁의 동기가 대부분 ‘은유’라고 쓰셨습니다. 어떻게 인지언어학자들은 은유라는 무해하고 수사적인 도구에 이토록 거대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나요?
조지 레이코프(이하 레이코프)
그 질문은 뇌가 작동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 주로 은유의 측면에서 사유합니다. 은유는 정치적 담화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디에나 있죠. 은유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언어와 추론을 구조화합니다. 그래요. 은유는 개인의 정치적 의사 결정은 물론 국가 전체의 정치적 의사 결정을 완전히 통제합니다. 은유에 의존하지 않고 추론할 수 있는 정치적 쟁점은 하나도 없죠.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세계를 대부분 은유적으로 이해합니다.
웨흘링
놀랍게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또한 이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사유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완전히 거짓된 가정을 상당히 갖고 있죠.
레이코프
바로 그렇습니다. 인간의 사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가정 네 가지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첫째,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가 의식적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잘못되었어요. 대부분의 사고, 추정컨대 98퍼센트는 완전히 무의식적입니다. 둘째,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합리성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신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 믿음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추론은 물리적 과정으로서, 우리의 신체와 뇌의 물리적 실재에 의존합니다. 셋째, 많은 사람들은 추론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사유한다는 의미예요. 이 역시 참이 아닙니다. 사람들 모두가 하나의 보편적인 추론 방식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죠. 사람들은 세계에 대해 서로 다르게 사유합니다. 저마다의 문화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을 통해 마음속에서 변별적인 구조를 습득해왔기 때문입니다. 넷째, 사람들은 인간이 축자적逐字的으로 세계 내에 존재하는 그대로 사물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사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에요,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은유를 통해 사유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거의 의식조차 못 하죠. 예컨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쉽게 추론하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유가 어떻게 정치적 사고와 정치적 행위를 정의하는지, 어떻게 실제로 국가 간 전쟁을 초래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 인지의 기본적인 기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일상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대개는 은유를 통해서 이해합니다.
웨흘링
그 말씀은 은유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게 들립니다. 그러한 이해에 따르면 은유는 언어, 오직 언어만의 문제이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예술적인 언어 형식’이라고 기술하기도 했죠.
레이코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유를 낱말이나 언어의 문제로 여깁니다. 이런 생각은 서구 학계에서 2,500년 이상을 지배해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40년에 걸쳐 인지과학은 이 발상을 완전히 뒤집는 연구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인간의 언어와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전통적인 가정들 중 많은 부분을 바꿀 수밖에 없었죠.
이제 우리는 은유가 결코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은유는 우리의 일상적 인지, 즉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구조화합니다. 은유는 사고의 문제이고, 언어의 문제이며, 행위의 문제입니다.
웨흘링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은유가 언어의 문제라고? 물론 그렇지. 사고의 문제라고?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행위의 문제라고?’
레이코프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만약 우리의 사고에서 나오지 않는다면요.
웨흘링
좋습니다. 그럼 이제 ‘개념적 은유 이론’이 태어났던 그날에 대해 들려주시죠.
레이코프
1970년대였어요. 저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언어학과의 젊은 교수였고, 그해 봄 학기에 은유 강좌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오후였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죠. 이곳은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이고, 언제나 비가 옵니다.
학생들은 관습적 은유에 대한 이런저런 텍스트를 읽으며 몇 주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의 독서노트에 대한 토의로 수업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날 수업을 시작한 지 15분쯤 지났을 때 강의실 문이 열렸고, 비에 흠뻑 젖은 여학생이 한 명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한 후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의를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독서노트에 대해 언급할 차례가 오자 그녀가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마디 못 하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우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놀라고 염려하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인지 물었고, 그녀는 흐느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남자 친구와 은유 문제를 겪고 있어요. 아마도 여러분은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 거예요. 제 남자 친구가 말하길, 우리의 관계가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랐다고 해요.”
웨흘링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레이코프
자, 한번 떠올려봅시다. 1970년대이고, 우리는 버클리에 있어요. 버클리대학은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에 있고, 언론자유운동의 본산이자 1968년 문화혁명의 진원지이죠. 우리는 특별한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의 시대정신 속에서 그 학생이 겪고 있는 개인적인 위기를 포용하려 했습니다. 그녀가 당면한 위기에 대해 집단 토론을 하기로 결정했죠.
우리는 치료 목적을 갖는 이 집단 토론 속으로 꽤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당신의 남자 친구는 둘의 관계가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했어요. 그 말은 두 사람이 함께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없다는 의미이죠. 길을 되돌아 나와야 할지 모른다는 의미 말이에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여행의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실례들을 모아봤습니다. “울퉁불퉁한 길이었어.” “우리는 갈림길에 있다.” 등이었죠. 그리고 우리는 은유가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언어 표현의 이면에 놓여 있는 사유 활동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웨흘링
그 여학생의 남자 친구는 이별을 단지 수사적으로 아름답게 전하기 위해 은유를 사용한 게 아니라, 은유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 추론이 표현된 거군요.
레이코프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관계가 탈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막다른 골목길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탈것 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관계를 끝내기로, 즉 탈것에서 내리기로 결심했던 것이죠.
웨흘링
그는 아주 흔한 은유, 바로 〔사랑은 여행〕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연인 관계를 시작할 때 이 은유를 사용하죠.
레이코프
그런데 그에게는 이 은유가 자신을 아무 데도 데려다주지 않는 교착 상태를 끝내기 위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웨흘링
그 여학생은 어떻게 되었나요?
레이코프
그녀는 행복한 결혼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남자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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