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의 학문, 온 세상을 다 품다
천하를 다스리는 세 가지 강령綱領
《대학》의 〈경1장〉은 첫 번째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본래 《대학》은 〈경1장〉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경1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이 맨 앞에 나와 있는 이른바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입니다. 강령의 강綱은 그물의 벼리, 그러니까 고기 잡는 그물의 코를 꿰어 그물을 잡아당길 수 있게 한 동아줄을 가리키는데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뜻합니다. 또 령領은 신체의 목 부위를 가리키는 글자인데, 허리와 목을 가리키는 말인 요령腰領, 要領으로 흔히 쓰이는 것처럼, 강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 핵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대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세 가지 강령에 담겨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삼강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학》의 도는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온 천하의 사람들이 최고의 선에 가서 머물게 하는 데 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고 在親新民하고 在止於至善이니라
‘《대학》의 道도’라고 했는데, ‘도’라는 글자는 참으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의 일차적인 뜻은 길입니다. 길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물리적인 공간을 가리키는데, 길을 걸어갈 때는 늘 목적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도’는 목적이라는 뜻도 되고,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방법이라는 뜻도 되고 길을 걸어간다는 뜻도 됩니다. ‘도’라는 글자 밑에, 우리가 흔히 책받침이라고 하는 ‘辶착’ 자가 있는데 이 글자는 천천히 길을 걸어간다는 뜻과 갈림길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머리 수首’ 자가 놓여 있습니다. 일본의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같은 학자는 도道 자에 ‘머리 수’ 자가 있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전쟁을 할 때 적장의 머리를 땅에 파묻었기 때문에 ‘길 도’ 자에 길을 뜻하는 글자〔辶〕와, 머리를 뜻하는 글자〔首〕가 있다고 문자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데, 적절한 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풍습이 있기 이전이나, 또 그런 풍습이 없었던 지역에는 길이 없었을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전에도 길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참고는 할 만합니다.
‘머리 수首’자는 눈〔目〕이 강조된 글자입니다. 눈이 강조된 다른 글자로는 얼굴 면面 자가 있는데요. 이 ‘면面’ 자의 양 볼에 해당하는 ‘[ ]’ 기호를 생략해서 눈〔目〕만 남기고 그 위에 머리카락을 뜻하는 표시를 한 게 머리 수首 자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辶착 자가 있는데 이 글자는 갈림길을 그린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길 도’ 자는 갈림길에서 이리로 가야 하나, 저리로 가야 하나 눈으로 살피고 머리로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정확한 길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길 도’ 자에 손가락에 있는 마디를 의미하는 ‘마디 촌寸’을 붙이면 인도한다는 뜻인 ‘도導’ 자가 됩니다. 길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리로 가시오, 저리로 가시오 하고 안내하는 거죠. 그러니 본래 도를 아는 사람이란 ‘길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죠. 만약 사막을 걸어가는데 무리를 인도하는 사람이 오아시스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다시 삼강령으로 돌아와 ‘대학의 도’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기서의 ‘도’는 수단이나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도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말합니다. 이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뒤이어 나오는 세 가지 강령에 들어있는 것이죠.
우선 대학의 일차적인 목적은 ‘명명덕明明德’, 곧 내 안에 있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앞의 명明 자는 밝힌다는 뜻의 동사이고 뒤의 명明 자는 덕을 꾸미는 꾸밈말입니다. ‘명덕’은 맹자 이래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밝은 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나오는 성性이나 《중용》에서 강조하는 성도 모두 인상의 선성善性을 가리키는 말로 《대학》의 명덕과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발상입니다. 그런데 이 ‘밝은 덕’이 여러 가지 욕망에 의해서 가려져 있기 때문에 밝혀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명명덕입니다. 그러니까 욕망을 때로 보고 이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이 바로 ‘명덕’ 두 글자 앞에 놓여 있는, ‘명’의 뜻입니다. 본래 ‘밝을 명’ 자에는 선명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곧 “명명덕”은 “내 안에 있는 밝은 덕을 선명하게 밝혀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밝은 걸 어떻게 또 밝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미 밝은 걸 어떻게 또 밝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미 밝은 것이라도 가리어져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밝은 것을 가리고 있는 욕망을 제거하는 수양이 따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걸 누가 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학의 첫 번째 강령은 ‘자신의 명덕을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학의 두 번째 목적은 ‘친민親民’에 있습니다. 그런데 ‘친민’의 친親 자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립니다. 주희의 경우는 ‘친親’ 자를 ‘신新’ 자로 보아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대학의 두 번째 목적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고 풀이합니다. 물론 ‘친’ 자를 ‘신’ 자로 본 것은 주희의 독창적 견해는 아니고, 북송의 정이가 먼저 “‘친’ 자는 마땅히 ‘신’ 자가 되어야 한다〔親堂作新〕”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주희가 그 견해를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견해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陽明學을 창건한 왕수인王守仁, 王陽明, 1472~1529입니다. 왕수인은 주희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부정하고 《고본대학古本大學》을 간행했는데, 그는 ‘친’ 자를 본래 글자 그대로 두고 친민親民을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친’ 자로 보는 게 고전적 맥락에 맞습니다. 하지만 ‘친민’을 왕수인처럼 ‘통치자가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서로 친목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의 작자가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경》〈요전堯典〉에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친자를 ‘친애한다’는 뜻으로 볼 것이 아니라 ‘친애하게 하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견해는 잠시 접어두고 우선 주희가 해설한 《대학장구》의 풀이를 따라 이야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친민의 본래 뜻이 어떻든 《대학》의 작자는 ‘친’ 자를 ‘신’ 자의 뜻으로 쓴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전2장〉에서 경문을 구체적인 사례로 풀이하면서 구일신 일일신우일신苟日新 日日新又日新이라고 한 대목이 나오고, 이어서 작신민作新民, 기명유신基命維新 등을 사례로 들고 있는데 이런 내용은 모두 새롭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대학》의 작자가 친민의 ‘친’을 ‘신’의 뜻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의 첫 번째 강령이자 목적인 ‘명명덕’과 더불어 말하자면, ‘명명덕’은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민’은 백성으로 하여금 각자 자신이 가진 ‘명덕’을 밝히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새롭게 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통치자가 백성을 찾아가서 강제로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스스로 자신이 가진 ‘명덕’을 밝혀내도록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른바 ‘도덕道德’이라는 것이 뭡니까? ‘도’와 ‘덕’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하는 것일 뿐이지, 강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려고 하는 사람만 그리로 가는 거예요. 반면 ‘법法’은 자율이 아니라 타율입니다. 法법의 본래 글자는 왼쪽에 물〔氵〕이 있고 그 옆에 달려가는 사람〔去〕이 있으며 오른쪽에 흉악한 짐승〔廌〕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흉악한 짐승이 사람을 물가로 몰아서 해치려고 하는 뜻을 담은 겁니다. 그러니까 법은 본래 강제적 처벌을 뜻합니다. 반면 도덕은 강제가 아닙니다. 만약 ‘신민’이라는 말을 통치자나 군주가 백성을 강제로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유학의 근본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백성 자신이 가진 밝은 덕을 스스로 밝혀내게 돕는 것이 신민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어지선止於至善’입니다. ‘지止’는 가서 머문다는 뜻이고 ‘지선至善’은 최고의 선이라는 뜻입니다. ‘명명덕’은 내가 나 자신의 밝은 덕을 드러내는 것이고, ‘신민’은 내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자신의 덕을 새롭게 밝혀내기를 기대하는 것이라면, ‘지어지선’은 온 천하 사람들이 최고의 선에 가서 머물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칠지止’ 자는 멈추어 있다는 뜻도 되지만, 가서 머문다는 뜻도 됩니다. 가서 머물려고 한다면 일정한 방향이 있어야 하죠?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바로 ‘지선’이라는 목적지입니다. 이 ‘지선’에 가서 머물러야 할 사람은 나 개인이나 한 가족이나 한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 사람을 말합니다.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지선’에 가서 머물기를 기대하는 것, 이게 바로 《대학》의 세 번째 강령이자 목적인 ‘지어지선’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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