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 깃들어
이방인들을 보면
왠지 슬프다
한 아낙이 오뎅꼬치를 문 금발 어린애들을 앞세워 지나가고
키 작은 서양 할아버지가 지나가고
회색 양복 서남아 청년이 지나간다
먼먼 땅에 와서 산다는 것
노인과 어린애
어느 쪽이 더 슬플까
슬픈 건 내 마음
고양이를 봐도 슬프고 비둘기를 봐도 슬프다
가게들도 슬프고 학교도 슬프다
나는 슬픈 마음을 짓뭉개려 걸음을 빨리한다
쿵쿵 걷는다
가로수와 담벼락 그늘 아래로만 걷다가
그늘이 끊어지면
내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걷는다
그림자도 슬프다
그 젊었던 날의 여름밤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자냐고, Y가 물었다
아니, 전화 받고 있어
내 대답에 그는 쿡쿡 웃더니
그냥 나한테 전화하고 싶었다고 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묻자
그냥, 그냥만 되풀이하다가
그냥…… 살고 싶지가 않아……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울고
나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다가 그는
툭,
전화를 끊었다
아직 젊었던 날의
계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또 한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 K인데……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졌다는 K는
어린 여자에게 가버린 애인에 대해
K를 못마땅해하던 애인의 가족에 대해
지운 아기에 대해
물거품이 돼버린 그림 같은 집과
토끼 같은 자식들에 대해
설움과 분노를 토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죽고 싶다고 했다
잠 못 이루다 새벽에
전화로 나를 찾았던 Y와 K는
둘 다 별 연락 없이 지내던
먼 친구였다
그 뒤 Y와 K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건 안다
나도 살아 있다
우리를 오래 살리는,
권태와 허무보다 더
그냥 막막한 것들,
미안하지만 사랑보다 훨씬 더
무겁기만 무거운 것들이
있는 것이다
우울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깍지 낀 두 손을 턱 밑에 괴고
짐짓 눈을 치켜떠보고
가늘게도 떠보고
끔벅끔벅, 골똘해보지만
도무지
부팅이 되지 않는다
풍경이 없다
소리도 없다
전혀 틈이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을
내 몸이 부풀며 채운다
알 수 없는 영역에
하염없이 뚱뚱한 나
덩그러니 붙박여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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