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룰렛
K의 술집에는 세종류의 위스키만을 팔았다. 씽글몰트로만. 다른 술은 없었다. 주문하는 방식도 여느 술집처럼 메뉴를 보고 고르는 게 아니었다.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k는 황금색 액체가 반쯤 들어 있는 작은 유리잔 세 개를 날라왔다. 세가지 술을 직접 한모금씩 마셔본 뒤 그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잔에 든 술이 12년산 스탠더드급이고 어떤 잔의 것이 21년산 스페셜 에디션인지 상표와 숙성연도는 말해주지 않았다. 주문을 받으면 k는 쎌러가 있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병의 라벨을 볼 수 없도록 잔술로 따라 써빙했다. 술의 정체는 끝까지 불문에 부쳐졌다. 눈가리개를 벗은 뒤에 상표를 확인하는 블라인드 테스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상표가 무엇이 됐든 제 입맛대로 즐기면 그만이라는 게 그 집의 술 해석법이었다.
세종류의 술값이 모두 같다는 것 또한 짓궂은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술맛에 대해 안다면 좋은 술을 싼값에 즐길 수 있지만 아니라면 자신의 행운을 시험하는 비용을 술값에 포함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 선택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k의 술집 벽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몰트위스키만 해도 60종이나 되었고 쎌러에는 더 많은 술병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세종류를 골라 매일 다른 조합으로 내놓기 때문에 단골손님이라 해도 술의 정체를 알아내기란 녹록지 않았다. 결국에는 같은 돈을 내고 누군가는 싸게, 누군가는 비싸게 마시도록 돼 있었다. 사소한 수준이긴 하지만 k의 술집에서는 매일밤 행운과 불행이 발생하는 셈이었다. 부슨 속셈인지 이따금 k는 값비싼 30년산이나 수집품 수준의 빈티지 위스키를 섞어 내놓음으로써 그날밤 행운과 불행의 격차를 크게 벌려놓기도 했다.
나는 그처럼 일방적인데다 가격에서 결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는 술집이 문을 닫지 않는다는 게 정말로 이상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K였다.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정리할 단계일지언정 탕진할 계제는 아니었다. 나는 때때로 K가 순전히 남의 운을 시험하는 재미로 술집을 계속하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여느 술집과 비슷하던 주문방식을 지금과 같이 바꾼 것도, 직접 바텐더 노릇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자신의 잔인한 운명에 대한 보복으로 말이다.
그날 꼭 술집에 들러달라는 K의 전화를 받았을 때 께름칙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무렵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내게 등을 돌려버린 세상에 대해 일종의 적의를 품고 있었다. 아내가 우편으로 이혼서류를 보내왔고, 의료사고라고 주장하는 환자 가족과의 합의는 갈수록 난관에 부닥쳤다. 술에 취해서 입은 채로 쓰러져 자는 날이 많아지다보니 원장으로부터 근무태도에 대한 경고까지 받았다. 이 정도로 운 나쁜 상황이라면 K가 내놓은 세 개의 술잔 중에서 보나 마나 가장 싸구려 술이 든 잔을 선택할 것만 같았다. 그것을 보며 K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랜만에 K를 만날 일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K와 나에게는 불편한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집착의 다음 순서가 복수가 되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격이 다른 수많은 술을 똑같은 값에 내놓고 직접 골라 마시게 하는 K의 게임. 거기에서 K가 손님들에게 기대하는 점도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인간에게 아드레날린을 제공하는 데에 재미보다는 악의가 한 수 위일 테니까. 그리고 말 그대로 위스키가 ‘영혼’spirit이라고 불린다면 씽글모트야말로 그중에서도 가장 정제된 형태이며, 순수한 영혼은 천사뿐 아니라 악마의 것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나와 K는 첫눈에 같은 편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게임의 성원
병원 근처의 단골 바에서 저녁시간을 보낸 뒤 나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K의 술집을 찾았다. 택시로 이십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홀 가운데의 테이블에서 손님 한 팀이 막 일어서는 중이었다. 카운터 뒤에 서서 카드 영수증을 발행하고 있던 K가 나를 발견하고 눈인사를 보냈다. 남아 있는 손님은 혼자 온 남자 둘뿐이었다. 구석 테이블 자리의 중년 남자는 고개를 앞으로 꺾은 채 묵직한 자루처럼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술잔 옆에 안경을 벗어놓은 걸로 보아 잠이 든 게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양쪽 어깨를 들어올리더니 긴 한숨을 내뱉었다. 또 한사람의 손님은 은회색 아르마니 양복에 에르메스 넥타이 차림의 말쑥한 젊은 남자였다. 혼자서 바를 차지하고 앉은 그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다른 쪽 손가락으로 컵 속의 물을 찍어 탁자 위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집에 들어가기 싫은 모양이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청년의 곁을 지나쳐 카운터로 다가갔다.
K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갈색 머리와 오른쪽 귓불의 작은 귀고리, 호리호리한 몸매. 검은 스웨터 속에 받쳐 입은 차이나셔츠의 하얀 깃이 가톨릭 사제의 로만 칼라처럼 보였다. 그것은 미소년 같은 그의 얼굴과 대비되어 어쩐지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 비해 안색은 훨씬 나빴다. 나는 악수를 풀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꼭 와달라는 거야? K는 서두를 것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벽을 가득 채운 술병 가운데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가게 문 닫고 저도 마셔야겠군요. 제가 대접하는 거니까 술값은 없어요. 그 말은 술을 미리 준비해두었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술병의 라벨을 보았다. 맥캘란 21년산. 불만이 있을 수 없는 술이지만 K가 일부러 초대할 만큼 귀한 물건은 아니었다.
저분들을 불러서 함께 마실 생각인데 괜찮죠? K가 턱으로 가리키는 대로 나는 늘어져 있는 중년 남자와 아르마니 청년에게 차례로 눈길을 주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뇨. 새 위스키잔을 꺼내 하얀 리넨 천으로 튤립 모양의 주둥이를 정성스레 닦으며 K가 대답했다. 저쪽 구석의 테이블 손님은 보다시피 계속 마시는 중이고, 바에 있는 저 젊은 손님은 술도 안 마시면서 일어날 생각을 안하네요. 그런데 말이죠…… K의 한쪽 눈이 윙크하듯 가늘어졌다. 저 손님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담담했다. 오늘밤에 특별한 위스키를 내놓았거든요. 저기 있는 두 손님만 그걸 선택했어요. 특별한 위스키? 네, 1972년산 글렌리벳 쎌러 컬렉션이요.
가격은 121만원으로 매겨져 있지만 국내에 아홉병밖에 수입되지않아 훨씬 높이 쳐주는 술이라는 말을 K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런 빈티지를 술집에서 팔아치울 생각을 하다니, 더구나 스탠더드급과 같은 가격으로. 대단한 위악이거나 오만, 둘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로는 장기 기증이라도 고려해볼 단계에 이른 말기 환자라는 것도 있을 테지만, 선행이야말로 K와는 가장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나는 바의 탁자 위에 위스키잔 네 개를 차례차례 늘어놓는 K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자, 성원이 되었으니 게임을 시작할까요, 거의 그런 표정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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