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가르치는 사람, 김종철
김종철은 배움을 멈추지 않고 가르침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녹색평론」을 발간하면서 거의 하루 25시간을 매달려 실사구시의 철저한 검색과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글을 청탁하고 번역했다. 그는 애매하거나 정확한 조사연구가 덜 된 주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이같은 엄격한 태도는 가식과 몰염치가 판치는 이른바 교수들과 학자들의 학문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김종철은 누구보다도 염치를 중시하고 염치를 아는 독서인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생태주의 삶을 실천하는 듯이 화장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족의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예 상종을 피했다. 그가 존경하는 이반 일리치를 굳이 ‘이반 일리히’라고 부르는 일종의 허세와 고집에 대해서도 지독스러울 만큼 싫어했다. 그가 거액을 주는 강연 요청을 거절할 때는 그 강연을 요청한 사람이나 단체가 염치를 모르는 허세와 가식으로 치장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아무리 적은 소수의 사람이 모여 있어도 녹색 사상을 넓고 깊게 할 수 있고 「녹색평론」의 정기구독자를 늘릴 수 있는 강연 요청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종철이 2004년 영남대 총장의 뺨싸대기를 후려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정규직의 대학교수직을 미련없이 때려친 것은 이 시대의 대학교육은 이제 더 이상 배움과 가르침의 현장이 아니라는 선언과도 같았다. 예수의 성전 파괴와 같은 행동이었다. 그 뺨싸대기는 근대 대학교육 자체에 대한 후려치기였고, 대학교육 자체에 대한 사망선고와 다름없었다. 이후 근 십여 년 동안 김종철은 매주 토요일 ‘일리치 읽기모임’이라는 배움과 가르침의 독특한 공동체를 지속시켜 왔다. 젊은 청년 몇몇과도 ‘김밥 모임’김종철과 밥 먹는 모임을 오랫동안 이어 왔다. 공생공락의 삶을 강조하고 실천한 김종철의 다정다감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모임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의 평소 일관된 소신에 따라 그의 장례식은 일체의 행사나 의례 없이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지만, 아쉬움에 장례식장에서 조용히 추모 모임을 가졌던 것도 이들 ‘일리치’ 식구들과 ‘김밥’ 식구들이었다.
근본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 행동하는 사람 김종철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파한 뒤 김종철은 녹색당 창당에 나섰다. 녹색당 창당은 김종철이 근본주의자이자 동시에 몽상가가 아닌 현실주의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어 래디칼radical은 뿌리라는 뜻의 영어 root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한다. 김종철은 그 어원에 딱 들어맞는 래디칼리스트, 근본주의자였다. 김종철의 글에서 가장 많이 발견하는 단어 또한 근원적, 근본적, 본질적 등등일 것이다. 진보와 개발에 대한 인민의 맹신을 뿌리부터 뒤엎지 않으면 문명과 세상의 종말은 물론 생명체 자체의 멸종 또한 피할 수 없다는 김종철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김종철은 누구보다도 실현 가능한 생태 전환 사회와 국가를 추구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녹색당 창당은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녹색평론 초대 편집장이었던 장길섭이 홍성에서 2년제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전공과정을 개설할 때 이를 누구보다도 앞장서 격려하고 적극 후원한 사람은 김종철이었다. 그가 줄기차게 주장하던 소농사회의 복원을 따르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있으면 누구든 김종철은 격려하고 후원했다.
국가에 대한 생각의 변화 역시 김종철의 현실주의자 면모를 여실히 입증한다. 김종철은 2016년 2월 1일 딴지일보의 초청으로 벙커1 특강 「국가 같은 소리 하네」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왜 아나키즘의 국가부정론에 공명하다가 국가를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후쿠시마 이후 녹색당 창당에 발 벗고 나선 현실주의자 김종철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강연이었다.
밑바닥 인생 편에 선 사람, 김종철
마지막으로 김종철은 자비와 연민을 중요시한 사상가였다. 그는 개발과 성장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탐욕을 멈추어야 한다고 재삼재사 강조했다. 탐욕을 멈출 때 사람은 비로소 내면에서부터 자비와 연민의 고유한 감정과 생각을 키울 수 있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 김종철은 자비와 연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다. 자비와 연민이란 돈으로 환산된 동정이나 자선과는 뿌리부터 다른, 공생공락과 우애, 환대의 인간관계에서 유래되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과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자이기도 했던 윤중호 시인을 아꼈던 것도 윤 시인이 우리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 청소부와 일용직 노동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그들에 대한 자비와 연민의 시를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른바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대학교수를 역임한 우리 사회의 상층 기득권에 속했지만, 그런 기득권을 거부한 사람답게 육체노동을 하는 우리 사회의 하층 계급에 대해 늘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김종철은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김종철이 필자와 인연을 맺은 계기도 필자가 노동운동의 생태적 전환을 주장한 2004년 「당대비평」 가을호의 글이었다. 당시 그 글 전문이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는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실리고 논쟁으로 전개된 적이 있었다. 김종철은 그 글과 논쟁을 지켜보고 한참 뒤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김종철은 늘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의 생태적 방향 전환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성장과 개발의 최일선 담당자들인 ‘산업화의 역군’ 노동자와 농민 자신이 성장과 개발을 거부하고 생태적 전환의 회심을 하지 않는 한 체제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녹색평론 창간호를 꺼내 다시 읽었다. 그리고 김종철이 그렇게 두려움까지 느끼고 연구 금지 모라토리움이라도 해야 한다는 인공지능의 구글 유튜브 검색도 해보았다. 벙커1 특강 「국가 같은 소리 하네」도 인공지능이 알려 준 것이다. 30여 년 전 「녹색평론」 창간호의 시애틀 추장 연설을 읽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다시 떠올랐다. 170여 년 전 아메리카의 대자연 속에서 생태순환의 삶을 살고 있던 인디언들이 개발과 성장의 백인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하면서 절규하던 말은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생생한 녹색 저항의 언어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 본 기고글은 「프레시안」에 실린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