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라는 스웨덴 소녀가 있다. 2003년생이니 올해 만 16세다. 지난 3월, 그레타는 2019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범지구적 기후위기에 대한 그레타의 일관된 신념과 행동 덕이다.
그레타는 초등생인 8세 때 기후위기를 처음 배웠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란 것을 직감한 그는 부모나 친구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모두들 “맞다” 하면서도 아무도 ‘행동’하지는 않았다. 11세 때부터 그는 말문을 닫았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부모를 포함, 온 세상이 위선자였다. 세상이 미워졌다. 기후위기만 골똘히 생각했다. 의사는 이를 ‘아스퍼거 증후군’이라 했다.
그러나 마냥 어른들의 애완견으로 머물며 지구의 죽음을 기다릴 순 없었다. 게다가 평균 16도 내외였던 스웨덴의 8월이 2018년 평균 34도 폭염으로 들끓으면서 결정타를 더했다. 15세의 그레타는 “기후를 위한 등교거부”라는 팻말을 들고 스톡홀름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시위를 시작했다. 학기 중엔 매주 금요일 등교를 거부하고 의사당에 갔다.
이제 전 세계 160여 나라 수백만 청소년들이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구호 아래 그레타와 연대한다. 그레타가 직접 비판한 정치의 무능함과 무책임에 대한 문제제기는 나라마다 사회적 공론을 키웠다. 유엔은 물론 세계의 정치·경제 거물급 모임인 다보스포럼, 또 유럽의회조차 그레타를 주목하고 연설까지 청했다. 2019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선 녹색당 돌풍도 불었다. ‘그레타 효과’였다. 보수 세력이 그를 폄하하려고 강조한 ‘자폐증’은 맥락상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아스퍼거 증후군’은 위선적 세상에 대한 그의 당찬 대응이었던 셈.
그레타의 명언을 모아보자. “우리에게는 이제 변명거리가 고갈됐다. 시간이 얼마 없다. 인류에게 화가 다가옴을 알리려 직접 나섰다. 더 이상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탄소배출 중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늘 우리를 무시한다. 탄소배출은 계속 증가한다. 눈앞의 이익 때문이다. 불편하더라도 분명해지자. 화석연료를 땅에 그대로 둬라. 기존 시스템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시스템 자체를 바꿔라. 미래 후세대들은 아직 행동할 시간이 있었던 그때지금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냐고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지금 그들의 미래를 훔친다. 정치가들은 인기 상실이 두려워 녹색성장이나 지속가능 발전만 외친다. 거대한 산림파괴, 유독성 대기오염, 사라지는 곤충과 야생동물, 산성화하는 해양…. 인류 문명의 종말을 초래할, 돌이킬 수 없는 사태들. 이제 당신들은 패닉을 느껴야 한다. 소리치고 마구 날뛰는 패닉이 아니라 노트르담 화재 때처럼 차분하게 지구를 구하는 패닉이 필요하다. 막연한 희망보다 중요한 게 행동이다. 행동을 시작하면 희망이 생긴다.”
이런 딸 앞에 부모도 서서히 변한다. “우리도 바뀌기 시작했어요. 2016년 아내말레나 에른만가 먼저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했고 저도 늦게 동참했어요. 전등도 줄이고 고기나 유제품도 안 먹어요.스반테 툰베리”
그런데 그레타가 노벨상을 받고 집집마다 생태적 실천을 하며 나라마다 파리 기후협약만 지키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 이는 사실상 그레타의 근본 질문! 과연 참된 해법은 어디에 있나?
우선,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처럼 “학생들의 시위는 배움의 시간 낭비” 또는 “나중에 과학자가 되어 환경 문제를 풀자”는 식은 안 된다. 또, 녹색성장이나 지속가능 발전, 탄소세 같은 자기기만적 해법도 버리자. 특정인에게 ‘구체적 대안’을 닦달하는 것도 문제다. 성급한 대안은 또다시 문제만 키운다. 기후위기는 자본주의 총체적 문명 위기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그러니, 중대 사안을 정치가·전문가들에게만 맡길 순 없다. 예로, 스웨덴의 녹색당은 사민당과 연정하며 탄소배출에 일익을 담당한 ‘바텐팔’ 발전소를 전면 폐쇄하는 대신 거액으로 제3국 매각에 동의했다. 유럽 선진국의 녹색당 약진에 비해 막상 스웨덴에서는 ‘그레타 효과’가 사라진 까닭EU선거 득표율: 15%→11%을 일부 설명한다. 이런 식으로는 다른 유럽 녹색당도 위험하다. 그레타의 선거·상품용 소비 역시 곤란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분위기. 스웨덴의 ‘노란조끼’ 부대는 그레타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가 인상”에 반대한다. 이미 사용하는 자동차나 각종 기계, 난방장치 등을 전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실’의 편리나 기득권을 유지한 채 삶의 위기를 풀겠다는 발상은 자가당착이다. 비용과 위험, 책임의 ‘외부화’가 문제다. (돈, 권력, 인기 등에 중독된) 전반적 사회구조와 일상적 생활방식의 혁명! 그레타와 함께 열린 대화, 공동 책임, 근본 대안으로 나아가는 삶의 혁명, 과연 가능할까?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