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힘겨웠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공포영화 얘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사실 저는 공포영화 마니아는 아닙니다. 공포 그 자체의 감각을 즐기는 수준에는 절대로 못 미치지요. 텔레비전에서 <전설의 고향> 예고편이 튀어나오면 황급히 채널을 돌리게 되고, 공포영화를 패러디한 광고만 나와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공포영화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장르입니다. 공포영화는 다른 어떤 장르 못지않게, 동시대의 사회적 무의식을 민감하게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공포영화가 무엇을 공포의 대상으로 조명하는지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서 지금 처벌받아야 할 두려운 죄나 불길한 욕망은 무엇인지, 집단적인 죄의식의 근원은 어디인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공포영화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과 해석들을 담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한국 공포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은 가부장제의 희생자인 여귀(女鬼)였습니다. 그들을 공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주체는 남성적인 억압자의 시선이겠지요. 원한 맺힌 여귀들은 가부장적 체계의 ‘희생자’이지만 처참한 복수극의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불길하고 위협적이며 적법한 절차(애도와 같은)에 따라 퇴치되어야만 합니다. 전형적인 원귀(寃鬼) 이야기들은 이렇듯 남성 중심적인 지배이데올로기의 공포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공포를 제의적으로 해소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회복/강화하는 양상을 띱니다. 이런 경향은 여성의 과도한 욕망이나 탐욕(<분홍신>, <요가학원>), 모성의 결핍과 부재(<4인용 식탁>, <아카시아>), ‘스위트홈’ 신화의 붕괴(<장화·홍련>) 등을 단죄의 대상으로 다루는 최근 공포영화들 속에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같은 경향을 벗어나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또 다른 공포를 발견하는 공포영화들은 좀 더 눈길을 끕니다. 원귀의 존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여자)고등학교라는 일상적 공간과 그 속의 교육 현실임을 일깨웠던 <여고괴담>(1998)은 그 좋은 예입니다. <여고괴담> 시리즈는 미학적 차원이나 완성도의 측면에서 상당한 편차를 드러내지만, 과도한 입시경쟁, 집단 따돌림, 학생들 사이의 동성애, 동반자살 등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문제 상황들을 때맞춰 공포영화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아직 이 사회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한 십대들을 불안하고 두려운 타자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깔려 있을 것입니다.
<고사: 피의 중간고사>(2008)와 <4교시 추리영역>(2009)으로 이어지는 ‘학원(學園) 공포물’이 이미 상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란 모두가 다 아는 끔찍한 지옥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런 영화들은 입시제도와 교육 현실을 비판하는 기능을 하기보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학생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어른들의 죄의식을 건드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진짜 ‘가해자’들로서, 우리가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공포영화들을 통한 한바탕 ‘푸닥거리’가 과연 우리 죄를 덜어줄 수 있을는지요.
최근 개봉한 공포영화 <불신지옥>과 <독>은 ‘아파트’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사소한 경험들의 리얼리티가 그 자체로 충분히 공포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일상적 삶의 공간 전체를 생생한 지옥으로 묘사하는 공포영화가 등장한 셈이지요. ‘여기가 지옥이야’(<불신지옥>)라는 한 인물의 말은 지금의 현실 전반에 대해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각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회 곳곳에서 목도하게 되는, 차마 받아들이기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죽음들과, 그럼에도 멀쩡한 듯 계속되는 일상의 잔인함만 떠올려 봐도 말입니다.
영화 <불신지옥>이 직접 겨냥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내재한 기복적(祈福的) 성격입니다. 작은 딸의 병이 낫고 ‘우리 가족 다 잘 되라고’ 기도하며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되뇌는 엄마의 기복신앙은, 이 영화에서 미신적인 무속신앙의 다른 얼굴로 그려집니다. 빙의(憑依)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바로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의 끈질긴 기복의 욕구입니다. 내 기원만 이뤄진다면 무엇을 믿든,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도 없는 인물들의 욕심이 그들의 삶을 참혹한 ‘불신지옥’으로 만듭니다.
<독>에서 공포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것은 번듯한 아파트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 아래 감추어진 폭력성입니다. 표준화된 행복의 틀에 진입하기 위해 평범한 한 가족이 저지른 죄악과 그로 인한 죄의식은 그들의 삶을 구석구석 갉아먹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죄의식을 떨쳐내기 위한 도피처이자 기만적인 행복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같은 교인끼리’ 돕고 살자는 이웃의 말은 음산한 불안감을 증폭시킵니다. <불신지옥>과 흡사하게 이기적인 기복의 욕구와 맹신으로 얽힌 그들의 관계는 결국 서로를 이용하고 협박하며 철저히 파괴할 뿐입니다.
<불신지옥>의 이용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 정부 역시 기복 종교의 산물 아닌가. 바르게 사는 걸 버리고 오직 잘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대통령을 뽑았으니까.” 지금의 지옥 같은 현실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다른 모든 가치를 접어버린 죄,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터무니없는 맹신에 의지한 죄, 바로 그 대가가 아닐는지요. 아직 살아남은 자들끼리 손을 잡고 나보다 더 약한 사람들의 희생을 정당화한 죄까지, 우리 사회는 지금 도무지 처치 곤란한 집단적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불신지옥>이나 <독> 같은 공포영화들은 이 같은 병적인 상황의 문화적 증상일 것입니다.
당분간 한국 공포영화는 우리 삶의 현실에 밀착될수록, 정치사회적 현실을 환기할수록 더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영화가 되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불안과 집단적 무의식을 끌어내어 가시화하는 것, 공포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런 작업이 때로는, 억압된 죄의식을 바깥으로 분출하여 잠시 완화시켜주는 작용을 하는 데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현실의 지옥에 어떻게 대응하고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그 다음 문제는 결국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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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