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vs <호밀밭의 파수꾼> 마지막회
6. 방황의 기술, 헤맴의 자유
정말 문제였다. 어디서도 아늑하고 평화로운 장소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런 곳은 없는 것이다.
-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어떻게 하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불멸로 소유할 수 있는지를 나는 예감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 같은 느낌이었다.
- 헤세, 『데미안』 중에서
첫사랑의 순수와 열정으로 세상을 대한다면, 만물은 저마다 자신이 지닌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우리가 저마다 통과해 온 첫사랑만큼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향해 열정을 쏟을 수 있다면, 못 이룰 꿈은 없을 것만 같다. 싱클레어에게는 에바 부인이, 홀든에게는 제인이 그런 존재였다. 특히 에바 부인은 일찍이 칼 구스타프 융이 이야기한 ‘남성 내부의 여성성, 아니마’를 상기시키는 존재로서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친구의 어머니’가 아닐까. 싱클레어의 첫사랑은 바로 그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스승인 데미안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연인에 대한 사랑’과 ‘지식에 대한 탐구’는 기묘하게 닮은 데가 있다. 싱클레어가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데미안과 재회했을 때, 싱클레어는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그 절실한 환상 속의 여인이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었음을 깨닫는다. 시작되는 순간 금지된 사랑이었지만, 데미안과 에바 부인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결코 싱클레어를 말리지 않는다. 에바 부인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 또한 싱클레어에게는 또 하나의‘아프락사스’였기 때문이다. 희열이자 공포이고, 남성이자 여성이며, 죄악인 동시에 순수인, 천사이자 사탄이며, 인간이자 동물인. 그 양극단을 모두 끌어안는 진실이 바로 아프락사스였기에.
싱클레어는 책장을 넘기듯 에바 부인을 탐독하고, 에바 부인을 애무하듯 책장을 쓰다듬는다. 에바 부인과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사랑과 진리의 동일성을 깨우쳐준다. 에바 부인을 향한 광기 어린 사랑을 통해 싱클레어는 불같은 연애와 미칠 듯한 탐구욕이 동일한 열정의 소산임을 깨닫는다. 에바 부인은 자신을 향한 싱클레어의 뜨거운 시선을 거부하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는다. 어설픈 훈계로 싱클레어를 계몽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내버려두는 것. 그것이 곧 싱클레어가 그토록 갈망하는 진실을 찾는 길과 같은 길일 수 있음을, 에바 부인은 온몸으로 암시한다. 에바 부인에게 키스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억누르면서, 싱클레어는 진실을 탐구하려는 자가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끔찍한 고통을, 마침내 고통조차 아름다운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우리가 지금 아프락사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우리의 새로운 신앙은 좋은 거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상의 것이라네. 그러나 그는 아직 젖먹이지! 아직 날개가 돋아나지 않았어. 아, 외로운 종교, 그건 아직 진정한 종교가 아니야. (…) 자네는 틀림없이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꿈을 꿀 게야. (…) 그것을, 그 꿈들을 그대로 살게, 그것을 유희하게. 그것에 제단을 세워주게! (…) 자넨 열여덟 살이네, 싱클레어. 길거리 창녀한테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사랑의 꿈, 사랑의 소망을 가져야 하네. 어쩌면 그 꿈들은 자네가 무서워하는 그런 것이겠지. 무서워하지 말게! 그것들은 자네가 지닌 최상의 것이야. (…) 아무것도 무서워해선 안 되고 영혼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되었다고 해서는 안 되지.
-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데미안』, 민음사, 1997, 150~151쪽.
한편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려 했던 홀든은, 제 몸보다 더 커 보이는 여행 가방을 질질 끌고 오빠와 함께 떠나겠다며 따라나서는 여동생 피비를 통해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몇 번의 퇴학과 가출 끝에 진정으로 찾고 싶었던 것은, 이제 세상이라는 절벽에서 곧 추락할 것만 같은 자신의 지친 몸을 진정으로 붙잡아 주는 손길이었음을. 남동생 앨리의 죽음 이후 저마다 각자의 고통에 몸부림치던 홀든의 가족은 아직 그 혹독한 이별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불면증과 신경과민에 시달리는 엄마는 점점 더 불안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또 다른 아들 홀든의 외로움을 미처 보살피지 못한다.
그러나 홀든에게는 엄마 못지않게 든든한 존재, 피비가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오빠를 붙잡고 온몸으로 오빠의 영원한 추락을 막고 있는 여동생 피비를 바라보며 홀든은 비로소 알게 된다. 뼈아픈 고독과 절망에 빠졌을 때, 진정 만나야 할 대상은 정신과 의사나 멘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벌거벗은 마음이라는 것을.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름다운 세상은 여동생 피비의 눈물 속에 투명하게 고여 있었다.
내 동생 앨리는 왼손잡이용 미트를 가지고 있었다. (…) 그 애는 손가락 위도 좋고, 주머니도 좋고, 어디에나 시를 써 놓았다. 초록색 잉크로 말이다. 그 애 말로는 수비에 들어갔을 때 타석에 선수가 나오지 않았을 때 같은 때 읽으면 좋다는 것이다. 지금 그 애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메인 주에 살고 있던 1946년 7월 18일, 백혈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 난 겨우 열세 살이었을 때, 차고의 유리를 다 깨부수는 바람에 정신 분석 상담을 받기도 했었다. (…) 내가 그 애가 죽던 날 밤 차고로 숨어들어, 유리창을 전부 주먹으로 깨부쉈으니까. 그 해 여름에 샀던 스테이션 왜건의 유리창도 전부 깨보려고 했지만, 내 손은 이미 엉망으로 다쳐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걸 나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앨리가 어떤 아이였는지 알지도 못할 테고 말이다. 지금도 비가 오기만 하면, 손이 욱신거리고, 더 이상 주먹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주먹을 꽉 쥐지 못한다는 말이다.
- J.D. 샐린저, 공경희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57~58쪽
싱클레어와 홀든의 힘겨운 방황이 끝난 후 그들이 얻은 것은 인생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아니라 더 많이, 더 처절하게 방황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 눈부신 자유의 속살이 가장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고통이었음을 깨달은 싱클레어와 홀든. 가장 사랑하는 존재, 가장 그리운 존재가 내 곁을 영원히 떠난다 해도,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이미 떠나간 그 사람의 그리운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혼자만의 고독한 방황 끝에 깨닫게 된다. 이곳에서 견딜 수 없다면 저곳에서도 견딜 수 없음을. 저 멀리 내가 꿈꾸던 그 어딘가에서 삶을 견딜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