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데미안』 vs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②
싱클레어 vs 홀든: 아무도 나를 모른다
갑자기 나는 이 방에서 뛰어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제부터 끔찍한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사람들도 더러 있을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 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인간을 보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
-헤세, 『데미안』 중에서
‘아무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항변은 곧 누군가 내 마음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강렬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은 아무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읽어줄 타인을 찾는다. 이제 막 영혼의 사춘기에 접어든 싱클레어와 홀든에게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을 꿈꾸기 시작한다. 고슴도치가 제 세끼에게 느끼는 조건 없는 어여쁨이 아닌, 첫사랑에게 느끼는 이성적 호기심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 나 스스로가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제대로 읽힐 수 있는, 난해하고 신비로운 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온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비행 청소년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어른들 말이라면 곧 죽어도 듣지 않을 것만 같은 괴짜 소년 홀든 콜필드. 홀든은 어른들의 ‘관심’이라는 포장지로 위장된 ‘지배’의 욕망을 견딜 수 없다. 걸핏하면 낙제를 거듭하던 홀든이 퇴학을 앞두고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 행세를 하려할 때, 어른들은 예외 없이 그에게 ‘나이’를 묻는다. 너 몇 살이니? 이런 질문 안에는 벌써 나이로 인간을 판단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깃들어 있다.
택시에서도 호텔에서도 술집에서도, 홀든은 번번이 숨길 수 없는 앳된 얼굴 때문에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한다. 그에게 섣불리 충고를 하려는 어른들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홀든은 ‘나이’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짜증을 버럭 낸다. 내가 몇 살이든,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애송이가 아니야.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그 판단은 틀렸다고. 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애정 어린 관심도 아니면서 어린 소년이라면 일단 ‘통제’부터 하려는 어른들의 습관이 홀든을 골치 아프게 만든다.
어른들의 온몸에 달린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살고 싶은 욕망.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시선의 네트워크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부모님이 일생을 바쳐 가꾸어 온 행복의 정원을 사랑하지만 그 평화의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일탈의 본능. 내가 괴로울 때 달려가면 언제든지 안아주실 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젠 왠지 어머니 품의 따스함에 굴복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미묘한 반항심. 이제 갓 열 살에서 열한 살로 넘어가는 소년 싱클레어의 마음에는 벌써부터 그런 불온하지만 너무도 정상적인 성숙의 조짐이 시작되고 있다.
교양의 향취가 물씬 느껴지고 예술의 향기가 곳곳에 가득한 집안에서 자라난 싱클레어는 이제 막 ‘부모님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어둡고 은밀하고 잔혹한 세계가 뿜어내는 위험한 매혹에 눈을 뜬다. 부모님이 걸어왔고, 자신이 걸어가야만 할 올바르고 단정한 길 바깥에 서 있는 존재들. 악당과 탕아와 요부, 폭력과 죽음과 유혹이 가득한 바깥 세상은 이제 막 부모님이 물려주신 영혼의 태반에서 떨어져 나온 싱클레어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한다. 조무래기들의 소꿉장난과 골목대장 놀이에는 흥미가 딱 끊긴,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싱클레어의 마음 속에서는 ‘악’과 싸우기보다는 ‘악’에 흠뻑 탐닉하고 싶은 유혹과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이 팽팽한 내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밖에 없었다. (……)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가 불려졌다. 그곳에는 성탄절 잔치가 있었다. (……)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게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줏간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 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랬다. 나 자신이 가장 심하게 그랬다.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데미안』, 민음사, 1997, 1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