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데미안』 vs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①
싱클레어 vs 홀든: 멘토, 지상에 없는 구원을 찾아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이 막연한 그리움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기는 한데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털어놓고 싶은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미칠 듯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시작하기만 하면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온다. 내 곁의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내 말을 들어줄 단 한 사람의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줄 독심술의 귀재는 없을까. 내 마음을 읽더라도 내 마음을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그저 내 마음의 무늬와 빛깔을 가만히 바라봐 주는 사람은 없을까.
게다가 난 아직 어른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필요하다. 마법에 걸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렸으면 좋을 것 같은 날도 있고, 영원히 어른 따위는 되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게다가 어른이 되어봤자, 저렇게 따분하고 골치 아픈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면, 차라리 어른이 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영원히 아이 상태에 머무른다면, 그것 또한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저기서 아무 생각 없이 뛰놀고 있는 저 조무래기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평생 동안 유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생각하면 문제는 어른인가, 아이인가 따위가 아니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는가 없는가 따위도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 그 자체가 문제다. 저기 부모님이 평생에 걸쳐 갈고닦아 온 삶의 기반이 있다. 저들처럼만 따라 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한 채 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모범시민의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부모님의 유전자를 그대로 빼다 박은 자식이 아닌 것 같다. 내 형제들도 모두 저렇게 말쑥하고 얌전하기만 한데, 나 혼자만 저들과 다른 돌연변이가 아닐까. 도대체 금방이라도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이 숨막힘, 이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춘기 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주로 저런 불안하기 그지없는 감정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하루하루를 거뜬히 보냈던 것 같다. 완전한 아이도 완전한 어른도 아니었을 때 나 또한 저런 고민들을 하며, 저렇듯 금방이라도 낭떠러지에서 추락할 것만 같은 기분을 신기하게도 ‘정상’처럼 여기며, 어른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그 시기를 거쳐왔다.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었는데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내 손으로 번 첫번째 화폐를 만져보았을 때도, 아직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저런 고민들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나지 않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내가 너무 쉽게, 저 고민을 미처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내게 문득 떠오른 두 작품은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성장소설의 대표선수들이지만, 성장소설이라는 규범적인 레테르가 너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이 두 작품들은 언제 읽어도 새롭고 묵직한 화두를 던져준다.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른도 아이도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일 수 있는, 그 미칠 듯한 시간을 각자 다른 힘으로 버텨낸 소년들의 이야기다. 나무들의 사춘기인 6월에는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과 함께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오솔길을 산책하고 싶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들을, ‘친구’로 만들어주는 커플 매니저가 되고 싶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데미안』, 민음사, 1997,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