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7일
후가자와 시치로의 「나라야마부시考」를 읽다
며칠 전 후가자와 시치로의 「나라야마부시考」를 읽고, 이른바 ‘고려장高麗葬’이라고 불리는 풍습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몇 국어사전은 이것을 “늙은이를 산 채로 광중壙中에 두었다가 죽으면 그곳에 매장하였다는 고구려 때의 풍속”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2007~2008년 사이, 어느 신문에 자신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추억 속 내 영화’라는 글을 연재했던 한 원로 문학 평론가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동명의 소설을 갖고 만든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1983)를 보고 나서 “고구려 때 늙고 쇠한 사람을 산속 구덩이에 넣었다가 죽은 후에 장사지냈다는 일을 가리킨다고 사전에 적혀 있다”라고 감상문의 허두를 뗐을 때, 그는 국어사전의 풀이를 모범적으로 되풀이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고려장이 고려는 물론이고 고구려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고려 때 고려장이 행해졌음을 입증하는 자료나 유물·유적은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으며, 어쩌다 시골 촌로들에 의해 옛날에 고려장을 했던 곳이라는 장소가 전해오고 있지만 고려장과는 관계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이 허무맹랑한 고려장을 역사적 사실인 듯이 믿게 된 데에는, 고려장 설화가 ‘전래 동화’ 내지 민담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채 각종 동화책과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고려에는 고려장이 없었다
고려장에 얽힌 설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ⅰ) 옛날에 늙고 병든 아버지를 그의 아들이 지게에 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인을 산에 버리고 돌아올 때는 지게도 함께 버려야 하는데, 마침 같이 데리고 간 어린 아들(손자)이 그런 관례도 모르고 지게를 걸머지고 따라왔다. 아버지가 “지게는 그대로 놔두어라”라고 역정을 내자, 어린 아들은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이 지게로 져다 버려야지요”라고 대꾸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발길을 돌려 늙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와 돌아가실 때까지 잘 모셨다.
ⅱ) 옛날 고려시대에 연로한 어머니를 둔 효심 깊은 아들이 있었다. 나이 칠십이 되면 나랏법대로 고려장을 지내야 했으나, 아들은 어머니를 산속에 몰래 숨겨 놓고 매일 밥을 날랐다. 그런 가운데 아들로부터 나라에 큰 우환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나라를 구할 비방을 알려준다. 아들은 그것을 왕에게 고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왕은 그제서야 고려장이 나쁜 풍습이라는 것을 알고 고려장을 폐한다.
이처럼 유사有史 이래 고려장이 한반도에서 법제화된 풍습인 양 여겨지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던 두 설화가, 실제로는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 ⅰ)은 중국의 『효자전孝子傳』에 실려 있는 「원곡原穀 이야기」가 원전이다. 또 ⅱ)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에 수록되어 있는 「기로국棄老國 이야기」의 변용으로, ‘노인을 버리는 나라’라는 뜻을 가진 기로국 이야기는 원래 『잡보장경雜寶藏經』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설법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이래로, 한반도에서 고려장이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문헌은 도서관에 널려 있다. 먼저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⑤ 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한길사, 1999)에 나오는 「‘고려장’ 풍속은 허구이다」를 보자. 예시된 설화 가운데 ⅰ)을 전문 인용해 놓기도 한 지은이는 “이 이야기는 『논어』와 『효경』을 널리 가르치면서 효도를 장려하려고 만든 이야기이지 결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다. 효를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하던 고려사회에 이러한 악습이 있었을 리가 없다”(296쪽)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이보다 앞서 쓴 『한국사 이야기①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한길사, 1998)에서, 이미 고려는 “국자감國子監과 같은 공공 교육기관만이 아니라 사학私學이 발전하여 여염집에서도 『논어』와 『효경』 등의 유교 경전을 배우고 익혔다”(270쪽), “유교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나 효제孝悌로 소문난 사람을 추천”(275쪽)하여 이들에게 일정한 벼슬을 주었다고 쓰고 있다. 고려 왕조가 “전국에 걸쳐 효자·열녀를 찾아내 마을에 정려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해 주고 이들에게 “벼슬과 재물을 내려 효와 절개를 장려”했던 이유는, 윤리적 측면도 있었지만 중앙집권화 된 국가의 통치술이기도 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근본에 힘써야 한다. 근본에 힘쓸 때 효보다 나은 것이 없다. 가문에서 효자가 나오면 반드시 충신이 일어나게 마련이다”(이상 276쪽)라고 했던 성종의 말이 그것을 입증한다.
고려는 유교적인 원리를 국가 통치 체제로 삼았지만 내면은 불교 국가였다. 그렇다면 유교가 고려장을 허용할 리 없었던 것과 달리, 불교는 그것을 허락했을까? 불교와 효의 관계를 살피면 금방 답이 나온다. 불교의 교리를 몇 개의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지만, 불교가 강조하는 ‘자비慈悲’와 ‘연기설緣起說’은 결코 고려장을 좌시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의 고통을 함께 슬퍼하면서 무차별적인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는 불교가 고려장을 용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연기설은 모든 생명의 바탕이 하나에서 나왔으며, 서로가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하므로 자신의 근원인 부모를 유기한다거나 핍박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불교의 부모 공경 사상은 석가모니의 입을 빌린 여러 경전에 나온다. ‘행복의 길’로 가고자 하면 “첫째로 부모를 잘 섬기고 처자를 잘 보살펴라.”(『길상경吉祥經』),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라도 죄를 면치 못한다.”(『범망경梵網經』), “누구나 극락세계에 양생하고자 하면 먼저 부모를 봉양하여 사장師長을 봉사奉事하고 자비심으로써 살생하지 말 것이며 십선업十善業을 닦으라.”(『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부모를 봉양하고 순종하며 불도를 행하라.”(『불설사천왕경佛說四天王經』), “아버지가 베푸신 은혜가 높아 태산과 같고 어머니가 베푸신 은혜가 깊어 바다 속과 같다.”(『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觀經』) 등등.
특히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부모의 은혜 열 가지를 나누어 말하면서 부모의 은혜가 망극하므로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수미산을 백 번 천 번 돌아 살가죽이 터져 뼈가 드러나고 닳아서 골수가 보이더라도 보답할 수 없다고 하였고, 흉년을 당하여 어버이를 위해 그 몸의 살을 오려내고 뼈를 갈아서 티끌같이 하기를 백천 겁劫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어버이를 위하여 잘 드는 칼로 자기의 염통을 오려내어 피가 흘러 땅을 적시고 고통을 사양하지 않기를 백천 겁을 지나도록 하더라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부모은중경』은 말한다.(이상은 다시 언급될 김민한의 책에서 인용함).
기원 1세기경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불교는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6세기 초에는 신라에 전파됐다. 불교를 받아들인 삼국이 유교와 함께 불교의 규범을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는 마땅한 증거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로 충분히 입증된다. 화랑이 지켜야할 다섯 가지 계율 가운데 ‘부모에 효도를 다할 것’을 당부한 두 번째 계율 사친이효事親以孝는, 불교의 부모 공경이 한 국가의 통치 원리에 스며든 경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동시에 그것은 유교의 규범이기도 하다). 사정은 고구려와 백제도 다르지 않았으니, 삼국시대의 후대인 고려 시대에 와서 부모 공경 사상이 갑자기 뒤집혔을 리가 없다.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책과함께, 2007)를 쓴 박은봉은 같은 책 46~54쪽에 실린 「고려장은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이다?」라는 충실한 소논문을 통해, 고려장이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이 아닌데도 고려장이라 불리게 된 까닭을 추적한다. 지은이는 글머리에 “부모가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징역 1년, 상이 끝나기 전에 상복을 벗는 자는 징역 3년, 초상을 숨기고 치르지 않는 자는 귀양 보낸다”라는 『고려사』의 법규를 들고 나서, “유교와 불교가 이미 뿌리내려 효와 예 같은 윤리가 중시되던 고려 사회에서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리는 장례 풍습이 발붙일 자리는 전혀 없었다”라고 쓴다.
고려장은 일제 식민통치 유산
한국인들이 고려장을 사실인 양 두루 믿게 된 것은 일제시대부터다. 박은봉은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나온 역사책, 지리서, 수많은 문집들 어디에서도 노인을 산 채로 버리는 고려장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면서, 일제시대에 들어 일반인들에게 고려장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일본인에 의해 수집·편찬된 동화책의 역할이 크다고 말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인이 글로 확인할 수 있는 고려장 이야기는 1919년,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미와 다마키의 『전설의 조선』에 실린 「불효식자不孝息子」가 최초다.
물론 그보다 40여 년 전인 1882년, 미국인 그리피스가 쓴 『은자의 나라 한국』에 고려장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거기서 그리피스는 조선왕조가 전래된 두 가지 악습을 철폐했다면서 고려장Ko-rai-chang과 인제In-chei, 人祭를 들고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노인을 산 채로 묻어 버리는 풍습과 산신이나 해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두 가지 악습이 조선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성행되었다면서, “자비를 표방하는 불교의식으로도 이들을 폐하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한국을 두 번이나 짧게 다녀갔던 그는, 고려장과 인신제사에 대한 지식을 일본 측 자료에 의거했으며, 시종일관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고려장이나 인제에 관한 판단은 그것이 법제화되어 있었느냐, 아니냐를 구분하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 없는 언술이다.
미와 다마키의 『전설의 조선』보다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이다. 여기에 실린 25편의 전설과 민담은 이후 다른 동화집에 그대로나 약간 변형된 채 재수록되면서 우리나라 전래동화집의 원형이 되고 전범이 되었다. 그 가운데 「어머니를 버린 남자」가 바로 고려장 이야기다.
『조선동화집』을 편찬한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는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필요한 학교 교과서 편찬과 각종 교육 관련 발간물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때문에 『조선동화집』의 편찬 동기와 의도를 식민통치와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심은,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를 다룬 손진태의 『조선민담집』이나 박영만의 『조선전래동화집』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지은이의 연구에 따르면, 손진태는 고려장 이야기를 싣되 제목을 「기로전설」이라고 하고 있으며, 박영만이 채록한 75편의 전래동화 중에는 고려장 이야기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은 해방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어린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전래동화의 원전이 되었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전래동화집 중에 고려장 이야기는 거의가 『조선동화집』의 고려장 이야기를 답습한 것이다. 「노인을 버리는 지게」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기로설화는, 효도를 가르친다는 원래의 목적과 달리, 고려장이 마치 고려 때 실제 있었던 것처럼 선전하는 역효과만 낳았다. 게다가 현재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지은이가 이 책을 쓰면서 했던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 3학년 『읽기』 교과서의 「소년과 어머니」,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도덕』 교과서의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실려 있는 삽화(어머니를 업고 고려장을 하러 가는 아들의 모습)는 고려장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확고히 한다.
박은봉이 「고려장은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이다?」에서 강조한 것은, 고려장에 대한 역사적 오해가 “설화가 사실로 혼동되어 굳어진 것”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중요하게 떠오른 문제는, 동화의 무거운 역할이다. 내 세대는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제방에 난 작은 구멍을 발견한 한스라는 소년이 어른들에게 알릴 틈이 없이 점점 커지는 구멍을 자신의 손가락과 팔뚝으로 막은 끝에 나라를 구하고 죽었다나, 기절했다나 하는 이야기 말이다. 요즘엔 그 이야기가 네덜란드 사람들조차 모르는 허구라는 게 밝혀졌다지만, 이런저런 신문 칼럼에서는 여전히 사실로 취급된다.
김민한의 『한반도에 고려장은 없었다』(세종출판사, 2009)는 이 주제의 결정판이다. 지은이는 삼국시대와 고려의 교육제도와 효사상을 세세히 소개하고, 거기에 여러 학자들이 내어 놓은 효와 관련된 고려의 법제를 요약해서 보탰다. 고려시대에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고, 『고려사』 별전은 17명의 효자에 관한 기록까지 남기고 있다. 대부분의 고려장 이야기는 고려장을 치르는 나이를 70세로 잡고 있는데, 고려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70살 이상의 부모 봉양문제를 법률로 엄격히 규정”(72쪽)하고 있어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린다는 풍습이란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은이는 “특히 불효죄不孝罪를 엄격하게 처벌한 것이라든가 70살 이상의 부모 봉양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하여 부모에 대한 효덕孝德을 강조한 것은 오히려 이조시대보다 더 비중을 크게 두었다고 볼 수 있다”(74쪽)면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동화집 속에 “‘고려장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은 일제식민정책으로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풍속을 말살하고 우리가 얼마 전까지 야만족이었음을 은연중에 심어주기 위한 것”(71쪽)이라는 역사가들의 의견에 동조한다.
박은봉과 김민한은 고려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려장’이라는 말이 후세에 생겨난 원인으로 두보의 시 「곡강曲江」 가운데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일 절을 꼽는다. 이 구절은 “사람이 칠십까지 살기는 예부터 드문 일”이라는 뜻인데, 마지막에 나오는 ‘고래희’가 ‘고래장古來葬’이란 말장난으로 바뀌었다(그러면 “사람이 칠십이면 예부터 장사를 치루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말장난 삼아 바뀐 고래장이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인 양 둔갑한 것이 고려장이다. 김민한은 여기에 두 가지 설을 더하고 있다. 하나는 인도의 기로국에서 행해졌다는 ‘기로장棄老葬’이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기로국 이야기」가 『고려대장경』에 수록되어 있었던 탓에 자연스럽게 고려장으로 불리게 되었을 가능성이다(기로국은 인도에 실존했던 나라이기 보다, 석가모니가 설법을 위해 지어낸 가상의 나라라고 보는 게 맞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풍자를 위해『걸리버 여행기』의 몇 나라를 지어 낸 것처럼).
“우리는 기로 설화로 왜 이런 소설을 못 썼을까”
이제껏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고려장의 원판이 고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사 이래 즉, 한반도에서 농경이 정착되고 중앙집권국가가 탄생한 이래, ‘살아있는 노인을 내버리는 장사 풍습’은 우리나라에 없었다. 효친 경로사상이 가장 꽃피던 고려시대에 고려장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어떤 국내 사료나 유적으로도 증빙된 바 없다. 하므로 고려장을 역사적 사실인 양 수용하거나, ‘신판 고려장’이니 ‘현대판 고려장’이니 하고 함부로 비유를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반도에 고려장은 없었다』의 지은이가 주장한 것처럼 “‘고려장’이란 말은 고려와는 관계없는” 말이므로 “‘기로장’으로 고쳐 부르기를 제안”(76쪽)한다.
‘나라산楢山’의 ‘노래節’에 대한 ‘이야기考’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 「나라야마부시考」는 일본 전래의 ‘기로 설화’를 소재한 작품이다. 뛰어난 인류학적 보고서로도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을 읽고 나면, ‘고려장은 일제 식민통치의 조작물이다’라는 조건 반사적인 반박을 하기 이전에, 왜 우리는 유사 이전의 어느 지역에나 있었던 기로 설화를 가지고 ‘이만한 소설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무척 우울하게 만든다.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은 일본인이 우리에게 붙여 놓은 ‘조선적인 것(후진적인 것)’이라는 딱지에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에서 시작한다.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잘못된 것은 맞지만, 고려장은 우리나라의 것이 아니라면서, 유사 이전에 한반도에 실재했을 게 분명한 기로 풍습마저 부인하는 피해의식 구조가 「나라야마부시考」와 같은 소재를 쓰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나라야마부시考」는 성산聖山을 숭배하는 민속 신앙과 불교의 교리 가운데 하나인 해탈解脫(육근청정六根淸淨) 사상이 기로 설화와 접맥되어 있는 데다가, 부자와 빈자 사이의 습속 차이마저 가미되어 있어 풍부한 독법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기로 풍습이 생겨난 인류학적 진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로 풍습은 생산력이 보잘것없던 시대에, 노동력을 잃은 노인을 추방함으로써 가정과 공동체의 존속과 안위를 보장할 수 있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비롯한다. 이 작품에서 그 원리는 아흔아홉 살의 여주인공 오린의 ‘치아齒牙 모티브’로 강조되고 있다. 그녀의 성한 치아는 동네 사람들의 비난거리이자 가족의 수치다. 오린은 하나도 상하지 않은 자신의 튼튼한 치아가 부끄러워서 남이 보지 않을 때마다 조약돌로 자신의 이를 쪼아댄다. 오린은 상처를 한 장남이 어렵사리 과부를 새 아내로 얻자, 신바람이 나서 돌절구 모서리에 냅다 이를 부딪쳐 성한 이빨을 부러뜨린다. 한 사람의 가족이 느는 만큼, 한 사람의 입은 덜어야 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는 굉장히 많은 민요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 다음의 민요 역시 노동력을 잃은 ‘노인의 입口을 더는 것으로, 후세의 식량을 아낀다’는 기아 풍습의 기본 원리와 닿아 있다.
콩을 먹자면 물에 식혀라.[불혀라]
아빠는 소경, 앞을 못 본다.
저 노래에서 아빠는 노인 일반을 가리키며, 노인은 반드시 소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늙은이는 눈이 어두워 앞을 못 볼 수는 있지만, 귀는 밝다. 하므로 늙은이보다 더 배가 고픈 젊은이들이 늙은이에게 들키지 않게 콩을 먹으려면, 생으로 먹거나 볶아 먹기보다 물에 불려 먹는 게 좋다. 그러면 콩을 씹을 때, 바작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노인을 내다 버리는 기로 풍습 혹은 기로 설화는 인도·중국·일본·몽골·시베리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유럽과 중동 지방에도 비슷한 예가 발견된다. 서양의 민담이나 전설에는 젊은 길손 앞에 늙은이가 나타나 도움을 구하는 대신 자신의 지혜를 제공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 늙은이들은 상징적으로 천사나 신의 심부름꾼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사실적으로 해석하면 집에서 쫓겨나거나 버려진 노인들로 봐야 한다. 하지만 이 풍습은 기근·전쟁·천재지변 등의 위기 상황에만 한시적으로 적용되었지, 유사 이래 법제화된 경우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법이란 농경이 정착되고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야 생기는 것이다. 정착된 농경 생활은 앞서 말한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기아의 필요를 대폭 줄여 주었고, 중앙집권화는 피통치자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 ‘문화’를 통치의 원리로 삼게 된다. 하므로 유사 이래 기로 풍습이 굳건히 유지되기는 어렵다. 여기에 농경이 정착되면 될수록, 노인들의 지혜와 상식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사항 또한 덧붙여야 한다. 이를테면 「나라야마부시考」의 오린이 마을의 누구보다 더 많은 송어를 잡는 데는, 노인의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비결이 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기로 풍습이 궁금하여 집에 있는 몇 권의 인류학 서적을 뒤적여 보았다. 그러나 어떤 책에도 기로 풍습 내지 기로 설화라는 항목이나 색인 자체가 없다. 그것들과 가장 흡사한 게 ‘영아 살해’인데, 노인과 유아라는 정확히 반대되는 연령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기로 풍습과 영아 살해는 똑같이 노동 능력이 없는 입을 줄여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다.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기로 풍습은 남녀를 가리지 않지만 영아 살해는 여아女兒가 대상이다. 여아는 고대 사회의 중요한 생산 수단이자 생존에 필요한 전쟁에 소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장은 고려 아니라 오늘날 생긴 신풍속
『한반도에 고려장은 없었다』를 쓴 김민한은 ‘신판 고려장’이니 ‘현대판 고려장’이니 하는 잘못된 용법을 쓰는 신문·영화·텔레비전·문학 작품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예로 백용운의 단편소설 「고려장」만 달랑 들어 놓았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백용운의 창작집 『고려장』(범우사, 1977)을 찾아, 1972년에 발표되었다던 표제작을 읽어 보았다.
작가는 감원 돌풍(600명!)에 휩싸인 어느 회사를 무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사원부터 ‘목을 자르는’ 처사에 분개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하긴 옛날 고려 때는 자기 친부모들을 늙으면 땅속에 산 채로 묻어 죽였다는 얘기가 있지요.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 제도가 부활되는 셈이군.”(247쪽), “옛날엔 자기를 낳은 부모들도 늙으면 지게에 져다 생매장을 했다는데…… 지금 역시 우리 현실이 그때처럼 긴박한 것이다. 늙고 쓸모없는 폐물들이 불필요한 소비를 하고 남아 돌아가는 엘리트들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이 남아돌아가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년이 가까운 잉여인간들은 그 정년까지 기다리게 할 여유가 없어 목을 잘라 생매장을 하는 것이다.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고려장 시대로 전환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259쪽) 그러면서 ‘새로운 고려장’의 특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그런데 말이지, 이번 고려장이 우리 같은 늙은 축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달린 가족들까지 고려장하는 거란 말입니다.”(266쪽)
지금 읽고 있는 전상국의 단편집 『우상의 눈물』(민음사, 2005, 3판)에도 「고려장」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둘째아들이 망령든 70세 모친을 한겨울 길거리에 유기하는 이 소설을 보면, 고려장이 고려시대의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생긴 신풍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스를 통해, 관광지에 버려진 치매 노인들의 이야기가 간간이 들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