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4일
『한국의 「화도사」 연구』(남윤수, 역락, 2004)를 읽다
지난 회에 왕유에 대한 글(완전한 탈속을 이룬 산수전원시의 대가, 왕유)을 마치면서 나는, “산수전원파에 속하거나 산수자연시에 전념한 중국의 시인들은, 도연명이 만든 귀거래와 무릉도원이라는 ‘문학적 토포스’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라고 썼다.
귀거래와 도화원(무릉도원)은 각각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라는 시부詩賦로부터 기원한다. 「귀거래사」는 도연명이 나이 40세에 관직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며 쓴 시로, 속세를 잊은 채 고향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겠다는 염원을 드러낸다. 또 「도화원기」는 한 어부가 우연히 산속에 숨은 평화로운 마을을 발견한 이야기로, 난세에 지친 백성들의 평화롭고 풍족한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한국의 「화도사和陶辭」 연구』를 쓴 남윤수는 “도연명은 中·韓·日로 대표되는 한자문화권의 정신사에 2가지 토포스를 남겼다. 문학에서 토포스란 ‘A configuration of motifs'로 주제상主題上 또는 수사상修辭上의 한 형식’을 지칭한다. 그 두 가지 토포스란 ‘귀거래歸去來’와 ‘도화원桃花源’이다”라고 도연명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오늘의 한국인들은 알게 모르게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를 되뇌며 산다. 힘들 때마다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라고 푸념을 하거나, ‘좋은 세상’을 꿈꾼다. 도연명의 작품을 읽었든 아니든, 또 글을 쓰든 아니든, 그렇다.
조선의 사대부, 도연명에 화답하다
남윤수의 『한국의 「화도사」 연구』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영향을 받아, 거기에 화답한 시를 ‘화도사’라는 별개의 장르로 지칭하면서, 근 800년 동안 한국에서 쓰여진 150여 수의 화도사 가운데 71수를 모아 놓고 분석하고 있다. 지은이가 확인한 한국인 최초의 화도사는 고려 무신정권기에 쓰여진 이인로李仁老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며, 가장 최근의 것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통분한 나머지 “귀거래할 것이 아니라, 정면 대결 의지를 펴 맞서 싸워야 함을 역설”했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1956년에 쓴 「반귀거래사反歸去來辭」다.
위 책의 지은이가 “우리 선인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더욱 알게 되는바, 도연명의 시에 화운和韻한 ‘화도시和陶詩’ 몇 편이라도 없는 문집은 거의 없었다”라고 쓴 것처럼, 대부분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거의 한 편 이상씩의 화도시를 썼다. 그러므로 허다한 조선의 사대부로 하여금 화도사를 짓게 했던, 도연명의 원작품을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 가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이미 내 스스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어찌 괴로워하고 홀로 슬퍼만 하랴?
이미 지나간 일은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장래의 일은 올바르게 할 수 있음을 알았네.
참으로 길을 잘못 든 것이 멀지 않은 때에,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깨달았네.
고향으로 가는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나아가고,
바람은 살랑살랑 옷자락에 나부끼네.
뭍에 올라 행인에게 앞길을 물어서 가노라니,
새벽빛의 희미함이 원망스럽네.
이윽고 사립문과 지붕 바라보고는,
기쁜 마음에 가슴은 설레고 발걸음은 한달음.
머슴들은 반갑게 마중 나오고,
어린 자식들은 문에서 기다리네.
꽃심어 가꾸던 세 갈래 좁은 길은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있네.
어린 자식 손잡고 방으로 들어가니,
담근 술이 술통에 가득 차 있네.
술병과 잔을 들어 자작하면서,
정원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기쁜 표정을 짓노라.
남창南窓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만족함을 즐기고,
좁은 방일망정 안락의 쉬움을 깨닫네.
뜨락을 거니는 것으로 하루의 취미를 이루고,
대문은 있으나 찾는 이 없어 늘 잠겨 있노라.
지팡이에 의지하여 내키는 대로 거닐다가 쉬며,
때로는 머리 들어 멀리 향산香山을 바라보노라.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는 날기에 지치면 제 둥지로 돌아옴을 아네.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지려하고,
홀로 서있는 소나무 어루만지며 머뭇머뭇 배회하네.
돌아왔음이여!
교제를 그만두고 교유도 끊으리라.
세상은 나와 어긋나 있으니,
다시 수레를 타고 나선다 한들 무엇을 구할 것인가?
친척들과 정겨운 대화에 희열을 느끼고
소금素琴과 서적을 즐기니 근심 걱정 사라지네.
농부가 나에게 ‘봄이 되었다’고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이랑에서 봄갈이 하리라.
때로는 포장을 씌운 수레를 타기도 하고,
더러는 작은 배를 노 저어가며,
깊고 멀리 배 띄워 골짜기 찾고,
수레 타고 험한 언덕도 넘어,
나무는 싱싱하게 물올라 잘도 자라고,
샘물은 끊임없이 졸졸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네.
만물이 때를 얻어 피어오름을 부러워하면서,
내 생이 휴식에 다가감을 느끼노라.
끝났음이여!
천지간에 이 몸이 맡겨 있는 동안이 그 얼마나 되랴?
어지 본심을 따라가고 머물음을 자연에 맡기지 않으리?
무엇을 위하여 황황급급히 어디로 가겠다는 건가?
부귀는 나의 소원이 아니고,
선계仙界는 기약할 수 없네.
좋은 날이라 생각되면 혼자 나서서,
때로는 지팡이 꽂고 잡초도 베고 북돋기도 하리라.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기도 하고,
맑은 물을 내려다보면서 시를 읊으리라.
애오라지 천지자연의 변화를 따라 목숨을 다할 뿐이니,
저 천명을 즐길 것이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남윤수에 따르면 4단으로 되어 있는 「귀거래사」를 통해 도연명이 말하고자 한 것은, 다음의 세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①1단에 나오는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었으니以心爲形役” ②3단에 나오는 “장차 서쪽 밭이랑에서 봄갈이 하리라將有事於西疇” ③4단에 나오는 “저 천명을 즐길 것이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樂夫天命復奚疑”. 세 구절을 주해하면 “‘以心爲形役’은 마음이 육신의 부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사회적·인위적 자아를 떠나 본래적 자아인 참된 나를 찾는 것이며, ‘將有事於西疇’는 손수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겠다는 것이고, ‘樂夫天命復奚疑’는 부여받은 천명에 순응하겠다는 현실 수용의 자세”를 다짐한 것이다.
도연명은 나이 40세 때, 마지막 관직이었던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을 80여 일 만에 사퇴하고 63세로 죽을 때까지 20여 년을 은거 생활로 마쳤다. 그 사이에 황제가 그를 저작좌랑에 징소(徵召: 국법으로 부름)했으나 불응했다. 그는 전원에 묻혀 음풍농월吟風弄月을 하거나 소작인들의 농사를 감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지었다. 남송南宋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에 걸쳐 활약하였던 증선지曾先之가 태고太古 때부터 송나라 말기까지의 중국의 역사를 요약·편찬한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남편이 앞에서 갈면 처는 뒤에서 호미로 흙을 잘게 부수”었다니, 실제로 도연명은 벼슬을 청산하며 지었던 「귀거래사」처럼 살았던 것이다.
도연명의 삶에 공감하여 「귀거래사」의 운에 맞춰 모방작을 썼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화도시는 대부분 원본과 같은 형태의 4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보다 길거나 한 단 짧은 3단짜리도 간혹 있다. 그러나 단락의 길이와 상관없이 1단의 첫 줄은 반드시 “돌아가리라!歸去來兮!”로 시작하고, 마지막 단의 첫 줄은 반드시 “끝났음이여!已矣乎!”로 시작한다. 또 2단은 긴장을 늦추고 변화를 주고자 했던 원시와 같이 자유로운 서두로 시작한다. 형식을 익히기 위해 맛보기로 두 편을 들어 본다. 먼저 선조宣祖대의 명신으로 영해寧海 부사를 역임했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
돌아가리라!
벼슬살이 즐겁다지만 돌아감만 못하리라!
무엇이 나를 기로에서 헤매게 했던 것인가?
홀로 방황하며 근심에 겨워하노라.
나중엔 후회한들 그 어찌 늦지 않으리.
미혹의 길에 든지 이미 오래됨을 알았고,
내 차마 잘못 저지를까 저어하노라.
잠簪도 홀笏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설려薛茘 여라女蘿를 마름질하여 옷을 만들리라.
깨끗한 우직성을 온전히 지켜 귀거래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꽁꽁 숨어 현미玄微의 세계에 잠기리라.
저 명성과 이욕을 돌아다보니,
뭇사람들의 치열한 경쟁.
궁달窮達은 명命이 있는 것이요,
앙화와 복록은 일정한 문이 없는 법.
즐거움은 전원에 있으며,
나의 사념이 뛰노는 곳이어라.
배고프면 가마솥에 밥짓고,
목마르면 표주박으로 떠마시리.
일단식일표흠一簞食一瓢飮을 바꾸지 않을 것이지만,
감히 안연[顔淵=顔回: 공자의 촉망을 받은 제자였으나, 일찍 죽었다]을 바랄 수야 없지.
어려서부터 고량진미에 젖지 않았고,
가난한 나날의 생활에 안분지족 하리라.
흰 구름은 날아서 장막이 되고,
푸른 산은 둘러서 문이 되도다.
간천澗川이 졸졸 흐름을 고요히 듣고,
바위 위에 꽃이 핌을 그윽히 바라보노라.
때로는 소나무 오솔길로 풀을 헤치고 들며,
고라니 사슴이랑 함께 오고 가노라.
홀로만의 꿈속의 말 알리지 않고,
오로지 일구일학一丘一壑을 오며가며 지내리라.
돌아왔음이여!
애오라지 우유도일優遊度日로 생을 마추리로다.
진실로 내 마음 속의 세계는 쫓을 것이로되,
어찌 뜬 구름 같은 부귀를 구하랴.
오직 취한 듯 살다가 꿈꾸듯 가는 것이,
참으로 내가 마음속으로 우려하는 것이다.
옛 성현께서 나에게 떳떳한 행동을 가르치셨거늘,
내 이것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일컬어 호랑이 같은 심보요,
정이란 배처럼 두둥실 떠 흘러가는 것이라고.
도에 뜻을 두고 외정外情에 쏠리는 마음을 쫓아 버리고,
높은 언덕에 부용꽃을 함께 심으리라.
다행히 이미 처음 관직에 나아가던 마음을 되돌아 볼 수 있으니
바라건대 마침내 형편없는 존재로 타락함을 면할 것일세.
분화함을 떨쳐버리고 염담허정恬惔虛靜을 키우리라.
맹세코 이 생명 끝나고야 그만 둘 것이로다.
끝났음이여!
인간의 일생은 허무한 것이요.
살 같은 세월은 나를 위하여 멈춰주지 않는 것,
어찌하여 어리석게 갈팡질팡하랴!
과거는 이미 미칠 수 없지만,
그 누가 무위 속에서 얻음이 있다 하는가?
곳집이 그들먹함은 농업에서 오는 것인데.
숙흥야매夙興夜寐로 부지런히 일하며 욕됨이 없으리라.
시경 소아小雅 보전장甫田章의 분명한 교훈을 따르리라.
진실로 지극한 즐거움은 여기에 있는 것,
진리를 알았으니 조문석사朝聞夕死한들 또 무엇을 의심하리오.
다음은 중종中宗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明宗대까지 이조판서·한성부좌윤 등의 관직을 맡았던 간제艮齊 최연演崔의 「화도사和陶辭」.
돌아가리라!
성현이 아니라면 내 뉘와 돌아갈 것인가?
하늘이 만물을 냄에 각각 그 적재適材를 주었나니,
물오리의 다리를 길게 이어대면 슬픈 것이니라.
처음 학문을 시작하면서 옛 성현들을 살펴,
정도正道의 자취를 존봉尊奉하여 높이 나아가려 하였네.
현인군자를 이어받아 내면을 가꾸어,
종선여류從善如流할 것을 기약하고 잘못을 고치리라 다짐하였네.
안연이 누항에 살면서도 안빈낙도 하시면서,
나물밥과 거친 옷에도 불개기락不改其樂하셨네.
아아! 뭇사람의 욕심이 틈새를 들어내나,
도덕적 양심은 어두워질수록 더욱 은미한 것이네.
감정의 물결이 도탕해지며 거세어지네,
마음이 날뛰는 말처럼 걷잡을 수 없네.
신상에 자색紫色의 인수印綬를 끌면서,
발길은 권문세족의 문턱에 이르네.
장과 곡 두 사람 모두 양을 잃기는 마찬가지요,[장곡구망臧穀俱亡]
진정한 존재는 나라는 존재임을 알라.
눈으로 미인을 바라보며,
마음은 향기로운 술에 취하네.
신령스러운 거북 고기를 버리고 남의 것에 침을 흘린다면,
항상 귀를 막고 얼굴을 숙이리라.
물질의 근본을 새기면 참됨을 잃나니,
편안한 삶은 사람을 해치는 짐새의 깃털 술.
긴 끌채를 구절양장으로 몰아,
몸으로 무겁게 잠긴 빗장을 들어올리리라.
당초의 마음을 돌아보니 아직도 오히려 마땅치않아,
문득 깊이 생각에 잠겨 반구제기反求諸己하노라.
아예 방심放心을 수습하고 떠났던 것을 함께 모아,
팔환[八還 : 불교에서 말하는 매우 추운 여덟 지옥]에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붙이리라.
성품 다지기를 외성外城을 쌓고 적군을 막듯이,
자아自我를 고양하는 무장武裝으로 다져 굳세게 하리라.
돌아가리라!
육근六根의 정욕을 막고 자연에 자적하리라.
흘깃 봄에도 도가 있음이여,
내 이것을 버리고 또 무엇을 구하리?
만약 속으로 반성하여 허물이 없다면,
마음이 넓고 몸이 편안해져서 걱정이 없느니라.
그리 멀리 이탈하지 않았기에 돌아올 줄을 알게 되었나니,
좋은 땅에 아름다운 벼를 키우리라.
나는 환한 거울을 더욱 갈고 닦아,
나 자신을 마음의 배에 띄우리라.
분화紛華스러움을 끊고 근본으로 돌아감이여,
인류仁類의 본분을 체득하리라.
나의 뜻에 얻어짐이 있음을 기뻐하노라.
모로 흐르는 욕망의 물결을 막았네.
명분의 가르침 속에 자연히 행복이 있음을 찾으며,
다시 무슨 사연으로 돌아가 쉴 것인가?
끝났음이여!
진덕수업進德修業은 때가 있는 것.
세월은 만류하더라도 그래도 흐르는 것이거니,
아아! 애를 쓰면서 어디로 가려는가?
과거는 따라잡을 수 없지만,
미래는 오히려 기약할 수 있는 것.
민둥산이 된 우산牛山에 싹돋아 오르게 북주고
가라지 따위의 잡초를 쳐버리고 혹운혹자或耘或耔하리라.
옛 사람을 살펴 마음의 벗을 삼으리라.
어찌 그저 송시誦詩만을 일삼을 것인가?
샘물이 나지 않으면 우물을 버리는 법,
이 언사는 지극간절한 것이니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
대량생산되는 화도시의 레시피
예로 든 두 편의 시는 모두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똑같이 1단의 첫 줄은 “돌아가리라!”, 2단은 각자의 자유로운 창의cadenza, 3단은 다시 “돌아가리라!”, 마지막 4단은 “끝났음이여!”로 첫 구절을 시작한다. 하지만, 뒤이어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동일한 형식이라도 먼저 나온 우복의 작품과 뒤에 실린 간제의 작품은 지향하는 초점이 퍽 다르다. 그래서 『한국의 「화도사」 연구』를 쓴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도사陶辭의 원운을 밟아 화운작和韻作을 쓰는 데도,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의식과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각도의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 「화도사」 연구의 한 가지 결론이다. […] 100여 편의 「화도사」는 매편마다 고유의 철학과 미학이 들어 있어, 단 한 편이라도 버리고 싶지가 않다. 어떤 「화도사」는 강호자연江湖自然과의 친화를 감동적으로 묘파하였으며, 또 다른 「화도사」는 능력과 국량이 상당한데도 미관말직이나 외직으로만 저회하고 있는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적군은赤君恩을 외쳐 마치 상감이나 고위직에게 읽혀져서, 자기를 인정받아 내직이나 상위직으로 승차되기를 바라는 듯한 충분한 자尺을 가지고 쓴 느낌이 드는 작품들도 보인다. […] 또한 귀거래의 지향처가 단순히 자연에의 회귀나 귀고향歸故鄕만이 아니고,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만이 학문적 요체이니, 지금까지의 사장지학詞章之學을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겠다는 방향 전환이기도 하며, 우주와 인생의 오묘한 철리는 『주역周易』에 있으니, 일심으로 위편삼절 하겠다는 귀거래, 주일무적主一無敵의 경공부敬工夫에 전념하겠다는 귀거래, 어머님 공양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귀거래 등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이 같은 변모작變貌作들은 각 개인의 정신현상학에 따라 큰 편차인 절정 체험Peak experience이 다르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우복의 「차귀거래사」는 1단에서부터 “벼슬살이 즐겁다지만 돌아감만 못하리라!”라고, 단호히 귀거래의 의지를 밝힌다. 이어지는 2단의 “즐거움은 전원에 있으며,/ 나의 사념이 뛰노는 곳이어라”나, 4단에 나오는 “곳집이 그들먹함은 농업에서 오는 것인데,/ 숙흥야매로 부지런히 일하며 욕됨이 없으리라”는 우복의 귀거래 결심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한다. 도연명이 그랬듯이, 또 스스로 “일하며 욕됨이 없으리라”라고 했던 것처럼, 진짜 밭을 갈고 논을 맸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반면 간제의 「화도사」는 3단에 “좋은 땅에 아름다운 벼를 키우리라”, 4단에 “가라지 따위의 잡초를 쳐버리고 혹운혹자하리라”라는 시구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도연명의 귀거래와는 거리가 멀다. 인용된 두 시구는, 위기지학의 염원과 거기에 이르기 위한 자기 절제를 은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1단에 “나물밥과 거친 옷”이 나오지만, 그것은 간제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거나 살겠다는 게 아니라,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불우하고 가난했던 안연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연을 떠올리며 옷깃을 잠시 여며보았다고나 할까? 남윤수에 따르면, 간제의 귀거래는 도연명처럼 낙향하는 귀거래가 아니라, 그 방향이 “수양을 쌓고 학업을 닦는 ‘진덕수업’”을 향해 있는 그런 귀거래다.
그렇다고 해서, 우복과 간제의 귀거래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멀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한 오해도 없을 것이다. 우복과 간제의 두 작품은, 어느 사람이 자신의 한 팔을 앞으로 쭉 뻗친 다음 손가락을 폈을 때, 그 손가락 끝과 심장 사이의 거리만큼도 안 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차귀거래사」와 「화도사」뿐 아니라,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 실린 71수의 작품이 모두, 자동차왕 포드의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자동차처럼 똑같다는 것이다. 같은 책의 지은이는 “매편마다 고유의 철학과 미학”이 담겨 있는 제각기 다른 맛의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화도시가 제작된 원리recipe는 다르지 않다.
이 책에는 한 명의 상인(上人: 스님)과 한 명의 사대부 부인, 그리고 두 명의 중인 계급 문인(여항문인)이 쓴 화운시가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벼슬을 한 사대부가 쓴 작품들이다. 화도시를 쓴 창작 담당 층의 이런 특질이 화도시의 공통된 특질을 낳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려서부터 경학을 통해 ①조선의 지배 이념인 유학을 익히고 ②과거에 나가 자신이 배운 세상에 펼치는 것으로 교양(배움)과 생활을 완성시켰다. ①과 ②는 체제의 도덕이나 가치에 내화되는 과정이면서, 호구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요구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는 독서인은 없었다. 그것이 출사出仕다. 그런데 조정朝廷은 잠시도 풍파가 그치지 않는 만만치 않은 곳인 데다가, 핵심 관료가 아닌 다음에는 수명도 그리 길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책에 담긴 대부분의 화도시들이 30대 후반에서 40대 말년 사이의 관료들에 의해 쓰였다는 것이 증거다.
출사와 은구, 유학의 처세 이념
중앙의 주요 관직에서 밀려나면, 중앙의 한직을 나돌거나 지방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럴 때마다 사대부들은 은구隱求=隱逸를 생각했고, 그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한편, 값을 올리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은,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인사과에서 당신을 명예퇴직자 명단에 올려놓고, 책상을 치운다거나 오지로 발령을 내리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더러워서……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 그런다고 떨어진 나의 값이 다시 오를까?
어쨌든, 아무리 더러워도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를 좀체 실행할 수 없는 오늘의 도시 월급쟁이들과 달리,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귀거래를 호기롭게 읊으며 은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고향에 땅과 소작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서 두 대목을 인용한다.
대체로 조선조 사대부들이 귀거래와 정치 참여를 함께 할 수 있었음은 ‘재지성在地性’에 있었다 함은 이미 밝혀진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재지사족들이라 용사행장에 신축성이 자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은 직접 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즐거움과 성스러움은 아닌 것이며, 조선조 한문소설에 가끔 등장하는 감농監農이나 하면서 느긋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전원생활은, 몸소 땅을 파면서 준농準農에서 순농純農의 참 생활인이 되어, 자연을 읊은 도연명과는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한다.
바로 이런 때문에 우복은 “벼슬살이 즐겁다지만 돌아감만 못하리라!”, “즐거움은 전원에 있으며,/ 나의 사념이 뛰노는 곳이어라”, “곳집이 그들먹함은 농업에서 오는 것인데/ 숙흥야매로 부지런히 일하며 욕됨이 없으리라”라며 고향이 있는 상주尙州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한 번도 조정을 잊지 못하였나 보다. 도연명은 공자의 “사십이면 불혹이라四十而不惑”는 가르침에 맞추어 귀향을 한 뒤에 63세로 몰하기까지, 20여 년 넘도록 영영 벼슬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우복은 45세 어름부터 대구 부사와 강릉 부사직에 다시 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우복의 행태를 위선적이라고 지탄할 필요는 없다. 출사와 은구는 공자孔子가 명한 유학의 처세 이념이다. 『논어論語』 「위영공衛靈公」 편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계시季氏」 편에서는 “숨어 살 적에는 그 뜻을 구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의를 구하라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들은 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邦有道 출사하고, 나라에 도가 시행되지 않으면邦無道 은거하여 자기 뜻을 찾으라’는 지침이다. 또한 굴원屈原 역시 「어부사漁父詞」에서 “창랑지수가 맑으면 갓 끈을 씻고, 창랑지수가 흐리면 발을 씻고 숨으리라滄浪之水 淸兮可以濯我纓, 滄浪之水 濁兮可以濯我足”고 선비의 처세를 가르치고 있다.
도연명이나 도연명을 따라 한 우복은 모두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하겠다는 포부가 여러 가지 난관에 꺾였을 때 귀거래를 읊었다. 물론 귀거래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 낙향 이후에 보여준 태도는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앞서 본 것처럼 도연명은 「귀거래사」의 정신인 ① ② ③ 모두를 실행했으나, 우복뿐 아니라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 수록된 모든 화도사의 주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도연명이 워낙 다른 길을 갔을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다. 맹호연에 대한 독후감에서 이미 썼듯이, “한자문화권 속에서 은일과 출사는 도가와 유가의 관계처럼 시차적이며, 구심력(은일)과 원심력(출사)처럼 한 편이 다른 편을 이상화하면서 긴장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복과 간제는 서로의 이면裏面으로 보아야 하며, 그런 뜻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화도사는 물제勿薺 손순효孫舜孝의 「화귀거래사」다. 조선시대의 태평성대였던 성종成宗대의 총신이었던 그는 50세에 쓴 같은 작품에서 “도잠[陶潛: 도연명]을 의모意慕”하지만 “진실로 태평성대를 저버릴 수 없음이여”라고 노래했다. 그러면서 귀거래는 미래에 “기약하겠다”고 끝맺었다. 다시 말해, 귀거래를 동경은 하지만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것. 이건 귀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어려서부터 경학을 통해 ①조선의 지배 이념인 유학을 익히고 ②과거에 나가 자신이 배운 세상에 펼치는 것으로 교양(배움)과 생활을 완성시켰던 사대부들의 이상이요 현실이면서, 그들의 로도스Rodhos였다.
귀거래, 마모된 독서인의 치료소
자신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도연명은 유교 문화권의 ‘슈퍼스타’다. 맹호연과 왕유는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그를 흠모했던 문학적 친자親子들이지만, 그들은 물제만큼도 솔직하지 못했다. 산수전원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천하 주유와 은거를 반복하면서 일평생 벼슬에 대한 욕구를 끊지 못했던 맹호연이 손가락질 받는 것에 비해, 왕유는 탈속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된다.
맹호연은 평생을 전원에 은거하였지만 공명에 대한 욕망을 접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실의와 분개의 감정이 종종 드러나 있어, 일반적으로 왕·맹(왕유·맹호연)이라 병칭하며 당시 산수전원시의 대가로 평가하지만 왕유와 같은 탈속적인 작품이 적다.(류성준 선역, 『왕유시선』, 해설)
그러나 왕유의 약력을 따져보면, 위의 평가가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왕유는 진사시에 합격한 21세부터 관직 생활을 했으나 크게 요직을 맡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30세에 아내와 사별하면서부터 불도에 몰두하게 되고, 반은 관직에 있으면서 반은 은거를 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된다. 그가 관직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55세에 안록산의 난으로 횡액을 당하고나서이며, 장안을 떠나 종남산의 망천 별장에 은거하게 된 때는 58~9세에 이르러서다. 그리고 나서 2년 뒤에 죽었으니, 어찌 온전한 귀거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으랴?
왕유가 쓴 「기무잠의 귀향에 부쳐送綦毋潜落第還鄕」를 보면, 그 또한 유학의 ‘구심력(은일)과 원심력(출사)’이라는 ‘10m 왕복달리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숭이였다.
본래 태평성대에는 은거하는 자 없고,
현명하고 재주있는 선비들이 모두 조정으로 모여든다.
동산에 은거하던 선비로 하여금
은거생활을 할 수 없게 하였구나.
또 도연명의 출발점이 그랬고, ‘짝퉁 산수전원시인’이라고 호된 비난을 받는 친구 맹호연이 그랬던 것처럼, 왕유의 귀거래 동기 역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일 수밖에 없었다. 「떠나 보내며送別」와 「초가을 산에서早秋山中作」에서 한 대목씩을 뽑아보자.
그대는 말하네 속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해
종남산 근처로 돌아가 은거할 거라고.
재능 없이 관직에 머물러서 있을 수 없으니
동쪽 시냇가로 돌아가 옛 울타리 지키고 싶어라.
『한국의 「화도사」 연구』의 지은이는 “외부적 갈등이 재래齎來했을 때, 또는 벼슬을 떠난 사람의 물외간인적物外閒人的 생활을 누리면서 한 생을 마칠 때, 동양인의 심성을 사로잡는” 것이 도연명의 귀거래적 인생관과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거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쓴 화도사를 모아 놓은 이 책을 보면서, 무엇인가 모자란다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런 대목에서다. 왜 중국과 한국의 사대부들은 관직을 박탈당하는 말년에 가서 하나같이 “자연 발생”에 가까운 귀거래 정서를 느끼는 것일까? 앞서, 이 정서의 정치적 원리(술수)와 경제적 토대는 간략하나마 설명이 됐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유가가 사대부들에게 강요하는 ‘성인聖人 만들기’와 출사는 개인의 자아를 굉장히 억압한다. 말이 좋아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지, 그 과정은 개인이라는 ‘모서리’를 깎고 깎아서, 차츰 자신보다 더 넓은 것의 ‘머릿돌’로 바치는 과정이다. 출사에 성공하면 할수록, 성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나’라는 바닥짐은 사라지는 게 유가의 완성태가 아닐까? 그럴 때, 사대부들은 토끼가 너럭바위 위에 자신의 간을 말리려고 널어놓았다고 거북이를 속이는 것처럼, 자신의 손상되지 않는 자아를 고향에 은닉해 놓았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인간이 ‘공적 이성公的 理性(치국평천하)’에 너덜너널해진 한참 뒤에, 공적 이성으로부터 방면되었을 때, 손상 받지 않은 내 자아의 한 부분이 어느 곳에 간직되어 있으리라는(혹은 어느 곳에 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는) 원초적인 믿음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쉽게 말해, 귀거래는 공적 이성에 마모 당한 독서인이 자아치료하는 심미적 공간이다.(이런 헛소리가 그럴듯하다는 게 아니라, 답답해서다. 왜 유교권을 이루고 있는 중국과 한국의 관료들만이, 다른 문화권의 관료들보다 더, 퇴직하고서 ‘고향/자연’을 되찾고자 하는가? 이런 게 궁금하다)
화도사의 다른 패러다임, 농민시와 민중시
남윤수는 자신의 책 끝에 ①“앞으로의 세대는 한문 세대가 아니다”라면서, ②우리나라에서 “한문으로 쓰여지는 ‘화도사’의 제작은 무망”하리라고 전망한다. 그러면서 ③“앞으로도 다른 패러다임으로 ‘화도사’는 계속 쓰여질 것”이라는 미련을 남겨 두었다. 하지만 지은이의 전망과 달리, 앞으로의 세대는 ‘한문 세대’가 될 공산이 크다. 21세기에는 한국만 아니라, 지구 전체가 ‘영어 회화 붐’보다 더 위력에 찬 ‘중국 회화 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 한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우리나라 것이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읽을 엄두도 못 냈던 조선시대의 온갖 문서를 다시 읽을 수 있는 은총을 마련해 준다. 그것은 우리나라 문학과 역사가 부흥하는 계기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이다. 그런 뜻에서 ①은 터무니없다.
한문이 살아나니 누군가 화도사도 쓰게 될 것이다. 하므로 ②도 정확한 전망은 못 된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앞으로의 세대가 한문 세대가 되더라도 화도사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도연명이 한자 문화권에 선사한 두 개의 문학적 토포스는 참으로 강력했다. ‘귀거래’는 오랫동안 사대부 계층의 숨은 자아로 기능하고, 상처받은 자아를 치료하는 정신 병원 역할을 해왔다. 또 ‘무릉도원(도화원)’은 지배 계층이 벌이는 전쟁이나 수탈에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고, 무릉도원에 대한 상상력은 중국 농민으로 하여금 종교적 결사와 결합한 농민봉기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유교권 대중이 품은 이상주의적(유토피아적) 대중운동이 딱히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가리키는 게 아니게 되었다.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는 백성의 곤경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온 마음을 바쳐 봉사하겠다는 시구가 빛나는 화도사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사대부는 자신의 교양(배움)과 생활이 합체된 채, 체제 내화 되어 있었던 때문에, 혁명을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의 귀거래는 지극히 사적인 은일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읊거나 누렸던 귀거래의 현대적 양태는, 중산층이면 기를 쓰고 누리고자 하는 ‘웰빙Well-being’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웃기는 것이,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고향/자연’으로 내려가려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오늘의 도시 중산층은 아파트 거실에 앉아서 다 해먹으려고 한다(이렇게 말하면, 오늘의 도시인들에게는 시늉을 해 볼 ‘고향/자연’조차 없기 때문에 더 불행하지 않느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걸 없앤 장본인이 본인들인 바에야!)
①, ②는 빗나간 전망이 되었지만, ③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대목이다. 전통적인 ‘귀거래사류’는 기본적으로 낙향한 사대부가 ‘고향/자연’ 쪽에서, ‘수도/왕궁’을 애모하며 바라보는 시였다. 이때 노래를 하는 창작자는 일종의 대기 발령 상태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대시에서 볼 수 있는 ‘농민시/민중시’는 여전히 ‘고향/자연’ 쪽에 있지만, ‘수도/왕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때 노래를 하는 창작자는 더 이상 대기 발령 상태가 아니다. 그들은 ‘수도/왕궁’의 부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선 자리를 생산과 투쟁의 기지로 삼는다. 전통적인 귀거래사류는 창작자 자신을 ‘수도/왕궁’으로부터 주변부화하는 동시에 ‘고향/자연’으로부터도 소외시킨다. 반대로 “다른 패러다임”의 귀거래사류인 현대의 ‘농민시/민중시’는 정확히 그것과 반대되는 양태를 보여준다.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 나온 시들과 한국 현대의 ‘농민시/민중시’를 비교하면, 창작 주체와 결부된 더욱 흥미 있는 비교점이 보일 것이다.
체제의 관리인으로 국록을 먹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아무리 잘 봐주어도 독립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없다(중국과 조선의 사대부들이 쓴 시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문학 작품이 아니다. 오직 중국과 한국의 과거 사대부들이 쓴 시와 오늘의 문학 작품을 비교할 때만, ‘순문학純文學’이라는 말이 허용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쓰겠다). 때문에 ‘고향/자연’은 사대부 문인들의 심신을 치료하는 임시 공간이었을 뿐, 나의 문제의식을 담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고향/자연’을 무대로 처음으로 ‘농민시/민중시’를 쓴 사람들 또한 결코 농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립적인 예술가의 눈에 포착됨으로써 ‘고향/자연’은 비로소 사실주의적인 대변자를 갖게 됐다(농민들이 전문 작가의 ‘사실주의’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항상 불만스럽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