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엄숙한 우리나라 미술관에 익숙해져 있다가 유럽이나 미국의 미술관에 가면 엄청난 소음이 신기하면서 신선하기까지 합니다. 단체 관람객들을 대동한 가이드들의 설명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선생님을 따라 미술관에 온 어린 학생들은 미술관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선생님의 설명을 듣기도 하죠. 시간이 있으면 이런 단체 관람객들 사이에 슬그머니 들어가서 작품 설명을 들어도 좋습니다. 우리나라 미술관에서는, 특히 특별전시회에서는 관람객이 조금만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눠도 전시실에 배정된 직원이 다가와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죠. 이런 주의를 안 받으려면 모두 속삭이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하다 보면 옆 관람객들이 속삭이며 주고받는 대화 소리가 간혹 들려옵니다. “저건 뭐야?” “저건 어떻게 그린 거지?” “무엇으로 그린 거야?”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런 질문들을 들으면 미술 고수처럼 보이는 관람객들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궁금한 것이 많은 초보 감상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자면 음악회에 갔을 때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갔을 때 궁금한 것들이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독주회에서는 연주곡 수가 더 늘어나기도 하지만, 음악회에서는 대개 짧은 서주나 서곡, 협주곡, 교향곡, 이렇게 세 곡 정도가 연주됩니다. 연주회에서는 한정된 두세 곡만 집중해서 들으면 되기 때문에 연주곡들과 연주자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음반을 미리 들으며 준비할 수가 있습니다. 앙코르 곡의 제목이 궁금한 경우가 간혹 있지만 연주회에서 궁금한 점이 생기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전시회에는 최소 몇십 점에서 몇백 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몇천 점 이상의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많으니까요. 전시회 팸플릿에서는 대표적인 전시 작품 몇 점만이 홍보되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 전시되는지 미리 알기도 어렵고, 전시회에 가기 전에 도록을 구하기도 힘들어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관람할 때는 상황이 더 어려워지죠.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대표작품을 소개하는 책들을 미리 훑어보는 방법이 있지만 책에 실린 작품들은 전체 소장품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소장 작품 전체를 살펴보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부지런한 감상자는 드물 뿐만 아니라, 소장 작품들을 살펴본다고 해서 작품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이런 저런 이유로 음악회보다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궁금한 점이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음악회에서는 적어도 길을 물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궁금한 것이 생기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 궁금증을 해결하시나요? 여러분이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1. 인터넷을 검색한다.
2. 전시실 직원이나 안내 데스크에 문의한다.
3. 지인에게 전화로 물어본다.
4. 옆 관람객에게 물어본다.
5. 집으로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책을 찾아본다.
6. 미술관을 나오는 순간 잊어버린다.
요즘에는 스마트폰 덕분에 미술 작품을 관람하다 궁금한 점이 생기면 즉석에서 궁금증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리움 미술관에서 ‘청자퇴화국화문 병’과 ‘분청사기승렴문 병’이라는 도자기를 봤습니다.
청자퇴화 국화문 병, 靑磁堆花菊花文甁, 고려, 12세기 |
분청사기인화 승렴문 병, 粉靑沙器印花繩簾文甁, 조선, 15세기 |
‘퇴화堆花’와 ‘승렴문繩簾文’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동양철학을 전공한 지인에게 문자메시지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굳이 지인 찬스를 쓰지 않고도 답을 알 수 있었더군요. 스마트폰으로 구글에 들어가서 ‘퇴화’와 ‘승렴문’을 입력하면 바로 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퇴화는 ‘청자퇴화기법은 점력이 강한 백토白土나 자토紫土를 이용하여 점을 찍듯이 시문무늬를 새김 ─ 편집자하거나 두꺼운 면이나 선을 그리는 기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고 승렴문은 ‘빈틈없이 줄지어 찍힌 점이 발을 쳐놓은 것처럼 보이는’같은 사전 문양이라고 합니다. 저는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미술관 관람을 하다가 인터넷 검색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특정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직원들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궁금증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작품을 보고 싶을 때 인터넷으로 그 작품의 위치를 찾기는 힘듭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나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은 일자형 구조여서 건물 한쪽 끝에서 시작해서 전시실을 따라 다른 쪽 끝에 이르기 때문에 길을 잃거나 방을 놓치고 지나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러나 런던의 국립 미술관이나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빈의 미술사박물관,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미술관 같은 곳은 한 전시실이 여러 개의 전시실로 연결돼 있어서 자칫하면 못 보고 지나치는 전시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작품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각 전시실에 배치된 직원에게서 항상, 정확하게 얻을 수 있지만 저처럼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직원이 지도에 별 표시까지 해주며 전시실을 알려줘도 미로 같은 전시실들 속에서 한참을 헤매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길을 잃었던 적이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에서 한 남자 직원에게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1400?~1464의 「어느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1460이 전시된 위치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저처럼 작품 위치를 묻는 관람객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 직원은 관람객들이 자주 묻는 미술관의 대표 작품들의 위치가 정리돼 있는 수첩을 보여 주며 몇 작품은 위치를 외웠고, 외우지 못한 작품들은 수첩을 보고 알려준다며 웃더군요.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여인의 초상」, 1460. 패널에 유화, 47×32cm.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
미술관에서 길을 묻다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찐팬”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 Baptiste Simeon Chardin, 1699~1779의 정물화들이 전시된 방을 찾다가 직원에게 샤르댕의 방위치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있던 관람객이 자신도 샤르댕 그림을 찾고 있다며 함께 가자고 말을 걸더군요. 즉석에서 샤르댕 팬클럽이 결성된 거죠.
궁금한 점이 생기면 안내 데스크에 가서 궁금증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미술관에는 J.M.W.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전시실이 여러 개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구상화에서 시작해서 점점 추상화로 넘어가는 터너의 “금빛 안개” 그림들을 원 없이 볼 수 있죠. 수장고에 보관 중인 터너의 다른 작품들도 많이 있을 것 같아서 안내 데스크에 가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터너의 작품이 몇 점이나 되냐고 물었습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약 이천 점 정도의 작품이 있다고 알려주더군요. 도쿄의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the Sumida Hokusai에서는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9?의 우키요에 작품들을 관람하다가 작품에 사용된 파란색 물감의 원료가 궁금해졌습니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파란 색 물감이 일본의 전통적인 천연 안료인지, 아니면 합성물감인지 물었더니 한 직원이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서 유럽에서 수입된 합성물감인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라고 알려주더군요. 리움 미술관에서는 족자 그림의 족자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것인지, 아니면 미술관에서 그림에 맞춰 제작한 것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전시관에 있던 직원 말로는 미술관에서 족자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미술관에 이메일을 보내서 궁금증을 해소하기도 합니다. 도쿄의 DIC 가와무라 기념 미술관DIC川村記念美術館, DIC Kawamura Memorial Museum of Art에서는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1912~1962의 그림에 물방울 자국 같은 얼룩이 보였습니다. 그 얼룩이 화가가 그려 넣은 것인지 아니면 보관 과정에서 생긴 손상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전시실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모른다고 해서 입구 쪽에 있는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문의했습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미술관 안에 상주하는 큐레이터가 없다면서 홈페이지에서 이메일로 질문해보라고 알려주더군요. 서울로 돌아와 이메일을 보냈더니 그림 속 물방울 자국들이 보관 중에 생긴 얼룩이라는 답이 왔습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방에 큰 그림을 답답하게 일곱 점이나 전시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림들 사이에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어달라는 로스코의 부탁 때문이라는 답도 함께 들었습니다. 물론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이메일을 보내도 답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의 「새 보물 납시었네」2020년 전시회에서 왕조실록들의 크기가 왕마다 다른 것을 보고 그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유럽에서는 종이 크기에 따라 전지, 2절지폴리오folio, 4절지쿼토quarto 같은 규격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규격이 없었는지 안내 데스크에 문의했지만 박물관 학예사에게 이메일로 문의해 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집에 와서 바로 이메일을 보냈지만 박물관으로부터 아직도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생면부지의 옆 관람객에게 질문해서 궁금증을 해결하기도 합니다. 2020년 여름에 「새 보물 납시었네」 전시회를 보러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을 때였습니다. 전시된 작품들의 캡션설명문에 작가 이름 다음에 “필筆”이라는 단어가 전부 들어가 있더군요. “작作”이라는 단어는 자주 봤지만 “필”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혹시 글씨에만 “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서 회화 작품 캡션과 다시 대조해 봤지만 회화 작품이건 서예 작품이건 작가 다음에는 모두 “필”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정ㅗㅗ李霆, 1554~1626의 회화 작품 「풍죽도風竹圖」1594에는 “이정 필 삼청첩”이,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서예 작품, 「대팽고회大烹高會」1856에는 “김정희 필 대팽고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글씨에만 “필”이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림에도 “필”이 들어간 것이 이상했어요. “필”이 누구의 작품이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처음 보는 용어라 마음에 새겨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중에 보니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소장품 검색을 하면 ‘전 이징 필 산수도傳李澄筆山水圖’ 식으로 작가 소개에 ‘필’이 들어가 있더군요.) 옆에서 남자 관람객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충 들은 바로는 이정이 그린 산수화가 열다섯 점 있는데 이번에 정말 간만에 한 그림이 전시된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설명하고 계신 어르신이 우리나라 고 회화에 조예가 깊은 고수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고수에게 물으면 제 궁금증이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저 죄송하지만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긍정의 침묵. (고수들은 대개 흔쾌히 대답해 줍니다.)
“그림에도, 글씨에도 왜 ‘필’이라고 적혀 있나요?”
“조선 시대에는 글씨와 그림을 같은 개념으로 파악했기 때문이에요.”
“이징 말고도 감지금니紺紙金泥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또 있나요?”
“이건 검은색 바탕이니까 감지가 아니고 묵견墨絹이에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다. 금니金泥는 금분에 아교풀을 개어 만들고 은니銀泥는 은분을 개어 만듭니다. 감색 종이나 비단에 금니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감지금니가 되고, 은니를 사용하면 감지은니가 됩니다. 흑색 비단이나 종이에 금니로 글씨를 쓰면 묵견墨絹에 금니라고 표현하고요. 상수리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를 삶은 물에 담가서 염색한 갈색 종이에 금니로 글씨를 쓰면 상지금니橡紙金泥가 됩니다.)
“금니로 그린 그림이 많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금이 비싸서 그랬을 겁니다. 이정은 가정 형편이 나아서 금을 써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아, 이징이 종친이라 형편이 괜찮았나 보네요.”
“이징이 아니라 이정입니다. 이징과 이정은 다른 화가입니다.”
“아, 이게 이징 작품이 아닌가요? 저는 이징으로 읽었어요.” (제가 또 틀렸습니다. 노안 때문에 돋보기안경 없이는 글씨를 읽을 수도 없는데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안경을 꺼내기 귀찮아서 그냥 읽다가 생긴 오독이었습니다. 더구나 전시실이 어두침침해서 감지, 아니 묵견에 그린 금니 그림이라 당연히 이징의 그림일 것이라 지레짐작했었거든요. 이정이라는 화가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습니다. 이정1554~1626과 이징1581~1648 이후 모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종친화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즉석에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으면 대단히 운이 좋은 겁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직원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미술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아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궁금증을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자료를 찾아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어떤 궁금증은 인터넷만 뒤져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지만, 또 어떤 궁금증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연히 책이나 미술 동영상을 보다가 풀리기도 합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는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궁금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궁금증을 잊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불완전하더라도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미술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제 자신이 가졌던 궁금증이나 주변 사람들의 질문을 모아 놓은 질문 노트입니다.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공부를 하다 보니 저 스스로 제기한 질문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이나 친구들,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은 질문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 중에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받은 공통된 질문도 많습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공통의 질문들을 통해 제가 미술관에 다니면서 궁금해했던 것이 저 혼자만의 궁금증이 아니고, 미술 초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궁금증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제가 궁금해했던 것을 다른 누군가도 똑같이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 나도 그랬는데. 나도 그게 궁금했었는데.”라며 맞장구를 치게 됩니다. 미술 전공자나 전문가들은 오랜 시간 미술을 접하고 공부해왔기 때문에, 미술 초보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사소하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리처드가 한국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유학생들이 영문법 수업에서 원어민 학생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에 놀랐던 일을 떠올리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어떤 것이 문법적으로 맞는지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배워야 하잖아. 우리는 그냥 알아You have to learn everything about English, but we just know. 그게 다른 점이야.” 리처드의 말은 미술 전공자와 비전공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미술 전공자들이 훈련 과정 속에서 “그냥” 알게 된 것들을 미술 비전공자들과 미술 감상 초보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배워야 합니다. 초, 중, 고등학교 미술 수업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최근까지도 시판 중인 유화 물감과 아크릴 물감의 색상이 수십 가지에 달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게다가 이 수십 가지 색상의 이름 중에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도 수두룩하더군요.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파란 색에 피코크 블루Peacock blue, 시아닌 블루Cyanine blue, 인디고Indigo, 울트라마린Ultramarine, 마린 블루Marine blue 같은 여러 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빨간 색에도 차이니즈 레드Chinese red, 주홍색, 크림슨Crimson, 진홍색, 베니션 레드Venetian red, 등적橙赤색, 카민Carmine, 암적색, 버밀리언Vermilion, 주홍색, 나프톨 레드 라이트Naphthol red light, 밝은 빨강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헛갈렸지만 몇 달 동안 자주 쓰게 된 물감의 이름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지더군요. 그러나 “그냥” 알게 되는 이런 자연스러운 학습 경험이 미술 비전공자들에게는 전무하거나 흔치 않습니다. 미술 비전공자들과 미술 감상 초보들에게는 색상 코드 같은 가장 기본적인 지식부터 전문적인 미술용어들, 화가 이름과 작품 제목들, 시대별 사조에 이르기까지 미술에 관한 모든 것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습득해야 하는 학습대상입니다.
미술 전공자들과 미술 초보들은 원어민과 외국인 학습자처럼 서로 출발점이 다릅니다. 미술 전공자들에게는 당연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미술 초보들에게는 한없이 궁금하고 신기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미술 초보들이 느끼는 그런 사소하고 쓰잘데없는 궁금증들을 모아서 미술 비전공자이자 미술 초보의 입장에서 답을 찾아보는 과정을 미술 초보들과 공유하고자 할 뿐입니다. 미술 초보가 미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다른 미술 초보들과 수다를 떠는 거죠. 제가 에른스트 곰브리치 경Sir Ernst Gombrich, 1909~2001처럼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같은 미술사를 쓰거나,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1903~1983처럼 『그림을 본다는 것Looking at Pictures』 같은 전문적인 미술 평론을 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미술에 대해 수다 수준의 경험담을 공유할 뿐입니다. 제 수다를 들으면서 평소 미술에 대해 궁금했지만 굳이 알아보기 귀찮아서, 혹은 다른 더 중요한 일들에 밀려나서 마음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질문들을 저와 함께 다시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제 궁금증을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여러분도 품고 있었을 궁금증이 함께 해소될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답을 못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