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내내 뜨거운 햇살 아래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차갑고 음울한 뉴욕의 1월과 마주친 열여덟 살 흑인 여자아이의 기분은 어떨까?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안티과 출신 루시는 오페어au pair로 뉴욕 맨해튼의 백인 부르주아 가정에 입주하게 된다. 오페어는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일정 기간 동안 아이들을 돌보는 일자리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자전적인 소설 『루시』문학동네, 2021에서 화자인 ‘나’ 루시는 1960년대 낯선 땅으로 이주했던 일종의 ‘지구촌의 하녀’였다. 한국의 여자아이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간호부가 되어 독일로 떠났다면, 안티과의 루시는 오페어가 되어 뉴욕으로 향했다. 루시는 남동생들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했지만 엄마는 딸이 부쳐주는 달러로 아들들만 공부시키기로 작정한다. 딸의 희생을 강제하는 엄마에게서 느낀 배신감에 루시는 분노한다. 지독히 애착하고 사랑하는 엄마여서 루시의 배신감과 살모충동은 배가 된다.
채 읽기도 전에 독자로서 편견이 작동했다.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에서 자메이카 출신 앙투아네트는 음산한 영국 날씨와 마주치면서 미쳐간다. 그와 유사하게 첫 장면부터 음산한 날씨가 강조되는 『루시』에서 ‘나’의 ‘불행극복 서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지레짐작이 되었다. 3세계 식민지 출신의 가난한 흑인 소녀가 1세계 백인 부르주아 가정에서 일해야 한다면, 국가, 인종, 계급, 젠더 차별은 기본적으로 경험할 것이라는 독자로서의 편견이 스멀거렸다.
『루시』는 그런 독자의 편견을 조롱하고 독자의 기대를 단숨에 배반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학대와 차별로 어린 루시가 불행해지지 않을까라는 독자의 조마조마한 염려를 이 소설은 보기 좋게 좌절시킨다. 안주인 머라이어는 관대하고 상냥하다. 네 명의 아이들은 천사 같아서 전혀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 루시는 인형처럼 예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정도의 일만 하면 된다. 머라이어는 루시더러 가족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라고 말해준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진짜 가족에게 가족‘처럼’ 대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수선화」에 등장하는 수선화는 정작 안티과에는 없다. 본 적도 없는 「수선화」를 암송해야 한다는 사실에 식민지인으로서 경험했던 자괴감과 수치심을 루시가 말하자, 머라이어는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느껴보라면서 노랗게 하늘거리는 봄철의 수선화 정원을 보여준다. 루시는 식민의 역사적 맥락을 제거해버리고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머라이어의 무심과 무지가 짜증스럽다. 다른 한편 머라이어는 사진에 관심이 많은 루시가 사진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미술관에 데려다주기도 한다. 루시의 고향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편지가 오면 임금의 두 배를 지불해준다. 머라이어는 루시에게뿐만 아니라 주변의 취약한 존재들, 동물들, 식물들에게까지 베풀고 연민한다. 그녀는 재개발로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환경단체에 기부금을 보내고 사라지는 식물종을 세밀화로 그려둔다. 이만하면 머라이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안주인은 아닐까?
머라이어의 남편 루이스는 뉴욕에서 성공한 변호사다. 그는 잘생겼지만 자신의 외모에 무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아내에게 충실하고, 딸들에게 자상한 아빠‘처럼’ 보인다. 백인 부르주아 가정의 가장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상하고 교양있는 부모, 행복하고 건강하고 천사 같은 아이들. 머라이어의 가정은 이상적인 부르주아 핵가족‘처럼’ 보인다. 하지만 루시는 이상적인 루이스 가족에게서 ‘폐허’를 본다. 열여덟 살에 불과한 루시는 외관상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너머에 있는 폐허를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
마흔인 안주인 머라이어는 현상 너머를 보지 못한다면, 어린 보모인 루시는 현상 이면의 것들을 꿰뚫어 본다. 그래서 루시는 매사에 분노하고 냉소적이다. 루시는 머라이어를 사랑하면서도 안쓰럽게 여긴다. 안주인과 하녀의 관계는 뒤집힌다. 어디로 보나 우월한 위치를 점할 것 같던 머라이어는 루시의 연민의 대상이 된다. 루시는 루이스의 합리적 이미지 이면의 폭력성을 보는 주체다. 머라이어는 텃밭의 채소를 갉아 먹는 토끼의 선량함과 모든 생명의 존엄함을 토로한다. 반면 루이스에게 토끼는 자기 텃밭을 망친 사악한 외부침입자, 약탈자로서 처치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토끼 사건에서 보다시피 이들의 어긋난 관계는 루시의 눈을 통해서 보여진다. 루시는 루이스의 애정없는 애정행각에서 불행을 감지한다면, 머라이어는 정작 그런 점들에 맹목이다.
루시는 1세계 백인 부르주아 가정의 물질적 풍요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파악하는 비판적 안목 또한 갖추고 있다. ‘아는 주체’로서 루시는 머라이어의 취약성을 간파한다. 머라이어는 영악한 부르주아 가장인 루이스라는 경제적 버팀목이 없이도 자율적으로 살 수 있었을까? 부르주아 가족 안에서 자유로운 수인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루이스의 가부장제적 질서 안에서 보호받고 사는 머라이어가 이혼한다고 하여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루시라면 이런 의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백인 부르주아 가족신화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한 것처럼 만드는 지배계급의 사회적 기제로 기능한다. 그런 기제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부와 여유가 오로지 자신들의 노력과 능력으로 공정하게 성취한 것이라는 자부심에 바탕하고 있다.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착취하고 있는지는 비가시화된다. 그런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을 루시는 가차 없이 폭로한다. 그들이 누리는 풍요가 세계의 다른 지역을 희생한 대가라는 점에 루시는 주목한다. 머라이어가 자기네들 별장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개발로 사라지는 것들에 애통해하지만, 정작 남편 루이스의 주식투자 수익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브라질의 열대우림을 파괴한 대가라는 점에는 무지하다. 이처럼 루시는 글로벌 금융경제와 환경파괴의 흐름까지 꿰뚫고 있다!
편견에 찌든 독자로서는 루시가 어떻게 그처럼 인식론적으로 탁월한 위치에 설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이지만 이 소설이 출판된 것은 1990년이다. 그 말은 열여덟 살 루시 안에 포스트식민 이론을 익히 알고 있는 1990년대 40대가 된 작가의 목소리가 이야기 전개에 개입하고 있다는 말이다. 1세계 백인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인물이 머라이어라고 한다면, 루시는 그런 한계를 보는 3세계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스트처럼 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면 또 다른 이유로는 루시에게는 행복 추구가 아니라 “기억이 있고 분노가 있고 절망이 있었”(108쪽)기 때문일 것이다. 대충 봉합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절망적이라도 진실과 마주하고 싶다는 작가/루시의 삶의 태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절망적 상황이 행복 추구를 삶의 목표로 삼는 지배계급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을까?
현재 루시는 머라이어의 집을 나와서 친구인 페기와 함께 방을 얻어서 생활한다. 카메라 가게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고 스스로 자기 침대를 구입하고, 자기 방세를 지불할 수 있게 된다. 페기가 주선한 파티에서 만난 화가 지망생인 백인 남성 폴과의 성행위가 즐겁다. 루시는 그것이 아무리 만족과 쾌락을 주어도 폴에게 사랑을 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결심한다.
어느 날 폴은 루시에게 은행원이었던 한 남자가 편안한 1세계의 삶을 버리고 타히티로 떠나 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루시는 그 은행원이 타히티로 간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폴은 그 남자가 자유를 찾아서 모험을 떠났다고 말한다. 폴은 대양을 건너 탐험에 나섰던 위대한 탐험가들은 단지 “돈만이 아니라 자유를 찾아 떠났고”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루시는 “자유를 향해 가는 길에서 누구는 재물을 얻고 누구는 죽음을 얻지.”(103쪽)라고 식민지인의 경험에 바탕하여 신랄하게 반박한다. 폴은 폴 고갱처럼 원시의 신비함을 숭배하고 소비하는 남자다. 루시는 자신이 그런 원시를 상징하고, 자신이 그런 소비의 대상임을 투명하게 들여다본다. 소녀 감성으로 사랑의 황홀과 선망을 말하는 대신, 루시는 제국주의적인 사유가 원시를 착취하는 문법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
원시를 타자화하는 폴에 맞서 루시는 폴을 자신의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면서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한다. 난 네게서 쾌락을 원할 뿐 사랑하지는 않아, 라고 믿으면서. 자기 이름이 타락천사 루시퍼의 여성형이라는 것을 알고 루시는 너무나 기뻐한다. 악마, 나쁜 여자, 마녀, 사랑의 배신자, 위악적인 여자가 되는 것에서 삶의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고자 한다. 그녀는 누구의 사랑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독립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희망이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루시는 그 과업을 성취한다.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성취였다”(129쪽)고. 앞으로 자신의 미래가 머라이어가 선물로 준 공책처럼 펼쳐질 것으로 상상한다. 루시에게 백지인 공책에 글 쓰는 행위는 여성적인 역사이자 사적인 일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 방을 셰어하고 있는 친구 페기와 ‘나’의 남친 폴은 자주 집을 비운다. 둘이 함께 뭔가를 하느라 바쁜 것처럼 보인다.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첫 문장을 적으면서 루시는 수치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눈물을 떨군다. 공책에 떨어진 눈물로 잉크가 다 번져 글자들이 뭉개지고 얼룩으로 번져나간다. 혼자이고자 하는 그녀의 삶이 소설 속으로 들어오는 첫 장면이다.
1세계 엄마, 3세계 엄마, 백인 친구 페기, 남자친구 폴, 그들 모두로부터 분리되어 혼자가 되기 위해 결코 그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을 거야, 라고 했지만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사랑이었던 것임을 마지막에 이르러 이 성장소설은 말하고 있다. 결국은 엄마들, 연인, 친구, 세계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열아홉 살의 눈높이에서 이 소설은 끝나고 있다. 이 소설은 그처럼 똑똑한 루시의 위악이 상처 입은 여자아이의 슬픔이라는 점에서 탈식민 교재가 아니라 허구로서 마침내 리얼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