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응급실. 병상 앞에 앉아있는 소년이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여자에게 속삭인다. 그건 벌레 같은 거라고. 벌레가 생긴 순간을 기억에서 찾아내라고. 죽어가는 여자는 이 시골 마을에서 겪은 끔찍한 며칠의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소설은 아르헨티나 작가 사만타 슈웨블린Samanta Schweblin의 중편이다. 공포소설 대가의 이름을 딴 ‘셜리잭슨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밤의 대화를 나누는 여자 아만다와 소년 다비드가 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아만다와 다비드는 다비드의 엄마 카를라를 통해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다비드가 몸에 벌레가 생긴 순간을 기억해내라고 재촉하기 때문에 아만다는 다비드의 엄마인 카를라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딸 니나를 데리고 이 마을을 떠나려 바로 떠나지 못했던 후회의 순간까지를 복기한다.
도시에 사는 아만다는 직장에 다니는 남편을 두고 딸 니나만 데리고 이 시골 마을에 여행 왔다. 아만다는 빌린 빌라 옆에 사는 카를라가 도시여자처럼 멋지다고 느끼면서 첫눈에 매혹된다. 창작물 속 ‘옆집 여자’는 그저 옆집 여자일 수 없다. 옆집 여자인 카를라에게도 기괴한 비밀이 있었다.
카를라가 아만다에게 누설한 비밀은 소설 초반에 공개되면서 눈길을 끈다. 카를라의 아들 다비드가 6년 전 아기였을 때 카를라의 부주의로 집 근처 개울의 물을 맛보고 뭔가에 중독되었고, 이 마을의 무능한 의사 대신이라 할 수 있는 녹색집 여자로부터 마술적인 ‘이체’ 치료법을 받고 ‘괴물’이 되었다는 것. 카를라는 사랑했던 아들이 뭔가가 섞인 낯선 존재로 변했고 이제 다비드는 자식이 아닌 견뎌야 할 어떤 것이라고 아만다에게 고백한다.
그러면 책의 현재 시점에서 아만다의 이야기를 듣는 다비드는 ‘괴물’인 건가? 괴물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다비드는 이 대화에서 아만다가 벌레를 만난 순간의 기억을 지연시키려 할 때나 말이 갈피없이 산만해지려 할 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 이야기를 이끄는 단호하고 명민한 소년인데도?
대화로만 채워진 이 소설은 다비드와 아만다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비드의 벌레찾기 재촉과 아만다의 그 치명적 순간에 대한 지연을 통해 서사가 꾸려지는데, 다비드가 직접 벌레가 몸에 들어온 순간을 찾아내는 탐정이 아니며 오직 아만다의 기억을 통해 아만다의 몸에 들어온 벌레의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사실 아만다 내부의 이야기로 보인다.
일차적으로 마을을 오염시킨 ‘벌레’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손에서 이 책을 놓을 수 없다. 하지만 진짜 과녁은 다른 데 있다. 벌레찾기로 나아가면서도 그것을 지연시키는 두 사람의 대화는 ‘공조하는 대결구조’라 할 수 있다. 이 특수한 서사 형식은 딸 니나를 중독에 빠트린 실수 밑에 숨어 있는 아만다 자신의 의도 ―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 의도 ― 가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하고 납득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시골을 바로 떠나지 않았던 이유를 딸에게 납득시키고 싶은 미칠 듯한 욕망 때문에 이 기억의 복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만다는 고열에 시달리는 병자처럼 끊임없이 ‘구조 거리’란 단어를 되뇐다. ‘벌레’만큼 중요한 것이 이 ‘구조 거리’다.
구조 거리란 작가가 만들어낸 말이다. 이 소설의 아르헨티나판 원래 제목Distancia de rescate이기도 하다.(미국판 제목이 피버 드림Fever Dream이다.) 구조 거리란 엄마가 외부의 위험 정도에 따라 아이를 구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직관하는 거리로 짐작된다. 외부 위험이 크면 구조 거리는 팽팽하게 짧아진다. 엄마가 어떤 이유에서라도 무기력해지면 아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조 거리는 한없이 짧아진다.
아만다는 딸 니나가 벌레에 오염되기 전에 어떻게 늘 구조 거리를 염두에 뒀고 구조의 노력을 했었는지 떠올린다. 카를라의 아들 이야기를 들은 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보를 하나라도 직접 얻으려고 했던 것(집 밖으로 나가 이체 치료법이 행해지는 녹색집으로 가보는 것),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생각하면서 카를라의 불행에 공감하고 그러나 곧 마을을 떠나려고 결정했던 것, 그런데도 정상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마을을 바로 떠나지 않고 장애아의 엄마가 된 카를라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찾아가는 것이 그 노력이다.
하지만 이 무구한 의도로 느껴지는 작별인사가 벌레에 오염되는 길일 줄이야. 니나를 구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조해야 할 엄마인 아만다 또한 밤의 응급실에서 오염되어 죽어가고 있다.
시골 환경을 오염시키는 벌레, 공기와 물속을 떠도는 불안한 그 입자를 찾아내는 걸로 추리소설은 끝나야 한다. 이 소설은 벌레를 찾아낸 뒤에야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후반부가 소설의 백미다. 벌레는 맥거핀이다. 끝까지 읽으면 벌레가 몸에 생기는 순간 따윈 시작과 끝이 분명한 디지털화나 청소의 환상으로 잡아낼 수 없는 어떤 연속성 안에 포함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벌레는 이미 시골 마을에 와서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들어왔던 것일지도 모르고, 우리 모두에게 이미 벌레는 오래전에 도착해 바로 옆에서 살아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벌레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았다 해도 치명상을 당한 딸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의료기술이나 방역과 청소의 환상일 뿐이다.
아만다는 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맞았는지, 왜 구조 거리를 놓쳤는지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아이에게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용서를 빌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론 세상의 극심한 오염에 대한 엄마란 이의 직관이 엄마 자신들을 궁지에 모는 게 아닐까. 자기 아이를 위해 남의 아이를 희생시킨다 해도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너무 나빠지고 있어서, 환경은 날로 이상해지고 있어서, 남의 아이가 희생된다 해도 그것이 자기 아이의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불안.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다는 감각. 그래서 타자를 쉽게 타자화해 없애버릴 수 없는 윤리성. 아만다는 이런 변명들을 오염된 니나에게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탯줄을 통해 연결되어 있을 때 구조 거리는 확보된다. 아이가 태어나 탯줄이 잘리고 엄마의 바깥이 되면 엄마는 아이를 잃을 것 같은 불안과 아이에게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불안 사이에서 진동한다. 아이를 잃을 것에 대한 불안과 혹시 아이를 내 몸에 들어온 벌레처럼, 타자처럼 여겨 귀찮아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구조 거리를 일부러 놓치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자책감 사이에 엄마의 불안이 자리한다.
아만다가 뭉그적대지 않고 도시로 와서 시골의 오염을 수사해달라고 경찰과 보건당국에 맡겼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까. 니나와 아만다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 거대자본의 무차별적인 자연개발이 초래한 환경오염은 만만한 시골에서 시작돼 도시를 덮친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타겟이 되지만 자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와있어서 자연의 보복은 시작에 불과하다.
역사 속의 타자였던 여성들은 남성보다 타자성을 받아들이기 쉬운 것 같다. 여성인 엄마들은 질끈 눈 감고 남의 아이는 죽든 말든 내 아이만 잘되면 돼, 하는 식으로 세상을 무시하긴 힘들다. 다른 아이또는 타자가 죽는다고 내 아이가 안 죽으리란 법이 없고 재난은 이미 닥쳐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타자든 쓰레기든 바이러스든 쓸어버린다 해도, 내 눈앞에서는 사라진다 해도 자연은 균형을 잃어서 내 아이에게 보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서 내게까지 미칠 거라는 직관 속에서 내 아이를 어떻게 구조할 건가.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 카를라의 아들 다비드와 자기 딸 니나가 같은 아이로 겹쳐 보이는 순간, 다비드가 어쩌면 니나일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 아만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시골을 떠나지 못한 게 아닌가.
엄마들은 그간 아이를 잃을 것에 대한 걱정과 아이를 귀찮아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두 가지 심리 사이에서 불안했다. 이제 너무 나빠진 세상에서 일찍 유령이 된 불쌍한 아이들이 어쩌면 내 아이일 수도 있다, 라는 윤리적 고뇌까지 더해져서 엄마의 딜레마는 더 커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