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두 딸이 살해되었다. 두 딸과 함께 살았던 시절의 눈부신 환희는 사라지고 슬픔만 남았다. 살해범들에게 어떤 천벌이 내리면 정의가 실현된 것일까? 어떤 처벌이 과연 두 딸의 죽음과 맞바꿀 수 있을까? 뼈를 후벼파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늙은 여자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가? 신이 죽어버린 시대에, 여자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될 수 없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순결한 새끼동물의 살해범을 처벌한다. 하지만 세속화된 시대에 국가만이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집행한다. 사적인 처벌은 그 자체가 범법행위다. 게다가 여자는 사적인 폭력을 휘두르기에는 너무 늙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헛것을 보고 환각 증세에 시달린다. 그런 몸으로 두 딸의 억울한 죽음을 법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갚아달라고 하소연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라면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그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은 그녀의 이전 작품인 『태고의 시간』 『낮의 집, 밤의 집』 『방랑자』와는 사뭇 다른 서사 결이다. 융의 영향 아래 있는 『태고의 시간』은 원형적·집단적 무의식과 역사적·심리적 기억이 어우러져 있다.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역사의 그물코로 낚아 올린 이야기들은 폴란드의 참혹한 현실이 된다. 폭파된 건물의 잔해더미처럼 이 작품에서 이야기의 파편들은 여기저기 털뭉치처럼 뭉쳐져 있다. 『방랑자』도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전개된다. 파편화된 이야기들은 텅 빈 중심을 희미한 아우라로 감싼다. 그것이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에 ‘별무리constellation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전작들과는 전혀 다르게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차용하고 있다. 왜 스릴러 장르여야만 했을까? 그렇다고 대중적인 스릴러 장르의 관행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복수를 정당화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 그보다 나은 장르가 없다고 작가는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논란이 분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윤리적 스릴러’라고 못 박는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관한 시적 은유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지는 죽은 이들의 무덤이다. 죽은 자들은 썩어서 대지의 거름이 된다. 그들의 뼈 위에서 산 자들은 쟁기를 끌고 씨를 뿌리면서 살아간다. 같은 어머니 대지 위에 대대손손 씨를 뿌린다는 점에서, 인간의 실존 자체가 근친상간적 관계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 자체가 윤리적일 수 있을까? 체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 고원지대의 작은 산골에서 살고 있는 예순이 넘은 늙은 여자 두셰이코는 부자들의 여름별장을 겨울 동안 관리해주면서 ‘자연인’처럼 지낸다. 고원지대에서 여름이라고는 반짝 3개월이다. 나머지 기간 동안은 인간이 생활하기에 너무 가혹한 환경이다. 여름별장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들이 서둘러 도시로 돌아가고 나면 이곳은 쓸쓸한 오지가 된다. 한때 그녀는 시리아, 리비아 등지에서 다리를 건설했던 교량 건설 엔지니어였다. 증상이 발현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귀국하여 교사로서 일하다가 다시 강제퇴직을 당했다. 지금은 이 산골동네에서 시간제 영어교사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근근이 생활한다.
고원지대의 외딴 산골동네라도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나 그렇듯 문제로 넘쳐난다. 이곳의 권력층 역시 쾌락과 소유를 위해서라면 못하는 짓거리가 없다. 산골동네에서 사냥은 합법이지만 밀렵이 더욱 기승이다. 러시아 마피아와 결탁한 사업가들은 여우 사육과 밀도살을 통해 털가죽을 밀반출한다. 가톨릭 신부는 동물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설교한다. 경찰서장은 수상한 거래를 통해 돈벌이에 혈안이다. 학교는 교회의 뜻에 따른다. 사냥 달력을 만드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냥은 합법적인 게임이다. 숲속의 동물들은 포식자 인간들의 사냥감이 되고 놀이감이 되어 도륙된다.
인간과 동물뿐만 아니라 개미와 딱정벌레, 식물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모든 존재들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두셰이코의 신념이다. 그녀는 자기 신념에 위배되는 부패와 불의에 눈감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녀의 일상은 민원과 탄원으로 분주하다. 고통받는 동물들에 대한 연민으로 그녀는 미칠 듯이 분노한다. “분노를 느끼고서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에 따라 그녀는 동물학살을 막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우선 행동한다. 하지만 어느 관청도 그녀의 탄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자기 집 개를 학대하고 밀렵한 사슴을 잡아먹는 야만적인 이웃인 ‘왕발’의 불법행위를 고발하지만 그녀의 고발은 철저히 외면당한다. 사냥꾼의 수호성인인 위베르를 기념하는 성극聖劇이 공연되면 아이들은 결석하고 무대에 오른다. 그런 산촌에서 동물권을 주장하는 두셰이코야말로 낯선 존재다.
낯설다 못해 그녀는 이 동네의 골칫거리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괴팍하고 늙은 미치광이다. 월요일독서클럽의 윤정 씨 표현에 따르면 ‘민원 할망구’다. 동물 사랑이 지나쳐 인간을 증오하는 인물이다. 사사건건 민원, 탄원으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녀는 산골동네의 구경거리인 SUV 자동차 경주대회에 진저리친다.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만든 SUV 차량들은 산길에 깊숙이 패인 자국을 남기고 괴로운 소음과 엄청난 배기가스를 유발한다. 그녀는 마을 대표를 찾아가서 이 끔찍한 차량들이 참가하는 경주대회를 중단하라고 항의한다.
그녀에게는 밀렵이든 ‘합법적’ 사냥이든 잔인한 살육행위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인간은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그들을 올무, 덫으로 고통스럽게 포획하면서 착취해왔다. 인간이 동물을 지옥으로 내모는 순간 온 세상은 지옥으로 변한다. “동물을 대하는 그 나라 사람들의 태도가 어떤지에 따라 그 나라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다.(148쪽) 비열한 인간 범죄자에게는 영혼이 있지만 동물들에겐 영혼이 없다고 서구철학이든 종교든 가르쳐왔다. 영혼 있는 인간들의 영혼 없는 동물살해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고 그녀는 분개한다.
분개를 넘어서 그녀는 인간 포식자에게 희생양 동물들이 복수할 것이라고 믿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에 나오는 사슴신의 복수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지만 동물들에게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 있”다. 그러므로 동물들도 자신들의 정의를 구현하고 포식자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그녀는 철썩같이 믿는다. 왕발은 밀렵한 사슴고기를 먹다가 사슴뼈가 목구멍에 걸려서 질식사한다. 그녀는 왕발의 급사를 사슴신의 복수로 해석한다. 그녀의 점성학 점괘에 따르더라도 왕발은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다. 점성학에 밝은 그녀는 하늘의 별자리를 해석하고 인간의 성격과 운명을 예측한다. 한 알의 모래 알갱이 속에서 우주를 보았던 블레이크처럼 그녀는 하찮은 미물인 딱정벌레 유충 속에서도 우주의 신비를 읽어낸다.
여기서 문제는 고통받는 동물에 대한 그녀의 과잉동일시다. 건강해서 아픈 적이 없었던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알기는 힘들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아픈 것이 건강한 것이다. 그녀의 고통은 타자의 고통과의 동일시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타자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 되는 초공감증후군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고통받는 동물에 대한 그녀의 애도는 끝 간 데 없다. 그녀는 언제나 상중喪中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동일시뿐만 아니라 그녀는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경계 없는 동일시가 가능하다. 가족을 잃고 눈밭에 서 있는 쓸쓸한 사슴에게도, 세련되고 우아한 백여우에게도, 물오르는 나무들에게도, 나무에 서식하는 딱정벌레 유충에게도, 하늘의 별들에게도 그녀는 아무런 격의없이 일체화된다.
그녀의 환각 속에 끊임없이 출몰했던 두 딸은 암캐들이었다. 그녀에게 두 마리 개는 물론 가족이자 딸들이었다. 그들이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기득권 사냥꾼 무리들의 사냥감이 되었던 것이다. 딸들의 살해와 기득권층의 만행을 목격하고서도 그녀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작품에서 반전은 논란이 분분한 지점이기도 하다. 증상으로 시달리던 늙은 여자 두셰이코는 놀랍게도 한때는 폴란드 국가대표 투포환 선수였다. 나이가 들었지만 건장한 피지컬의 소유자다. ‘미친 할망구’가 아니라 제자인 디오니시오스디지오와 함께 윌리엄 블레이크를 읽고 번역을 돕는 지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아무런 장벽 없이 주변 사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탁월한 교감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사슴이 되고, 개가 되고, 나무가 되고, 딱정벌레가 된다.
‘멀쩡한’ 그녀가 느끼는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 전이된 증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와 세계의 경계가 없는 정신병자인가? 아니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혁명가인가? 그녀에게 사적으로 복수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정신분열증적인 확신범인가? 아르테미스와 같은 여신인가?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가난한 가게 점원 여자아이 ‘기쁜 소식’, 왕따 번역가 디지오, 곤충학자 보리스, 은퇴한 서커스단원 ‘괴짜’기쁜 소식, 괴짜, 왕발 등은 그녀가 붙여준 별명이다 등과 공모해서 저지른 일을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들이 도와주었다는 것 자체도 그녀의 환각인가? 기득권층이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한다면, 사회주변부 약자들, 여자들, 동물들 또한 그들만의 연대를 통해 불의에 저항하고 복수할 수 있다. 그런 복수는 사회정의를 빙자한 또 다른 범죄행각인가? 공적 정의라는 것 자체가 사적 복수의 정당화인가? 폭력적인 인간들을 폭력으로 징벌하는 것은 합리화될 수 있는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무수한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두셰이코식으로 말하자면 코로나 감염병은 동물의 영토를 점령한 인간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다. 그렇다면 동물의 영토를 약탈하고 학살하는 야만적인 인간들은 지구상에서 제거되어야 하는가?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동물의 시체를 맛있게 뜯으면서 동물학살에 기꺼이 공모하고 불의에 순종하는, 흡혈귀 당신들에게 저주 있으라,는 두셰이코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