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언젠가 오겠지만 적어도 내 생전은 아닐 거라고 굳게 믿었던 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멸종, 그 종말 과정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입과 코를 내놓고 말을 나누는 것이 불결한 일이 되어버리고, 무리 지어 활동하는 인간의 모습이 야만적으로 느껴지는 세상이 내가 사는 진짜 현실이라니! 불과 몇십 년 후에 후대는 ― 물론 후대가 남아 있다면 ― 지금의 우리를 두고 어떻게 그토록 어리석을 수 있었는지, 종말의 징후가 그렇게 명백하게 나타났는데도 예전의 삶이 곧 다시 회복될 거라고 믿고 태연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다고 평가할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한목소리로 종말의 경고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수 세기 전부터 불임과 불모에 대한 수 없는 예언이 되풀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째서 그걸 무시했을까 의문이라고.
2133년에 발신되었지만 2008년이란 시간의 문을 지나, 2021년에 비로소 내게 도착한 한 편의 글은 바로 그런 후대의 의문을 전해주고 있었다. 발신자는 국제 T. S. 엘리엇 학회 발표자인 인간명 애쉴리 조안나제조번호, NAL1434802433라는 휴머노이드, 전달자는 클라투 행성 지구 주제 특파원이자 인간 세계에서는 소설가로 불리는 조현(그는 시베리아로 추방된 작가 파슬라프스키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란 제목의 이 단편 소설이 올해 월요일 독서클럽 대화방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얼마 안 되는 인원의 대화방은 잠시 술렁거렸다. 우리는 이렇게 독특한 소설이 무려 2008년도(신경숙, 공지영, 황석영 같은 작가들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해에! 이 작가들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당시의 작품들과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을 비교해보면, 이 글이 시간의 균열을 통해 미래에서 왔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년에 온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불길한 예감에 딱 부합하는 내용이란 사실에 다시금 놀랐다.
특히 나는 ‘냅킨 혹은 T. S. 엘리엇의 ‘황무지’ 중 “IV. Death by Water”에 대한 한 해석’이란 긴 부제가 붙은 이 짧은 소설에 첫 문장부터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는데,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거장이자 영문학사의 위대한 시인으로 손꼽히는 T. S. 엘리엇이 그저 평범한 ― 어쩌면 실존 여부조차 의심스러운 ― 한 여자의 말과 글을 사실상 거의 다 표절했다는 발칙한 발상이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말과 글이 본격적인 연설문이나 철학 논문도 아니고, 사랑에 들뜬 여인의 조잘거림과 연애편지였다니!
“사랑하는 엘리엇, 저는 지난주 살롱에서 당신과 식탁 위에 놓인 종이 냅킨에 대해 얘기했던 것을 심사숙고하고 있어요. 그때 당신은 제 얘기를 들으며 이런저런 식으로 종이 냅킨을 접고 있었지요. (중략) 그래요, 그것은 문화의 탄생과 확산이자 동시에 불임을 뜻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엘리엇, 마치 지난 4월 우리가 산책한 템즈 강변의 꽃나무가 싱그러운 초록으로 싹을 돋워 냈지만 전 거기서 이미 볼모를 엿본 것처럼 말이죠.”
이 여자, 메리 설리번은 자신 앞에서 심드렁하게 종이 냅킨이나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는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심오한 철학(종이 냅킨이 문화의 탄생과 확산이자 동시에 불임을 예고한다는 문화사회학적 이론을!)을 읽어낼 수 있고, 그와 함께 산책한 템즈 강변의 흔한 꽃나무에서 단숨에 ‘불모’(그 유명한 「황무지」의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시구를 탄생시켰을)를 꿰뚫어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아이디어를 무감각하게 받아먹으며 작품과 이름을 남기는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T. S. 엘리엇이다. 서구 모더니즘 예술이 얼마나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문화였는지 ― 물론 안 그런 예술이 없지만 ― 그러면서도 남자 예술가들의 잘난 업적을 기록한 역사의 갈피 사이사이에 숨겨지고 지워진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하면, 실제로 이러지 않았을까 의심하고도 남을 만한 발상이었다.*
*모더니즘 시대에 대부분의 남자 예술가들은 여자들로부터 헌신적인 조력과 영감을 얻음으로써 (혹은 빼앗음으로써) 창작활동을 유지했는데, T. S. 엘리엇의 경우에는 실제로 에밀리 헤일이라는 여자와 25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나중에 헤일의 편지를 전부 불태울 정도로 철저하게 그녀의 흔적 ― 단지 흔적이었을까? ― 을 숨기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데이비드 앨런의 『빅토리아 시대의 양치류 열기』나 필립 고세의 『수족관』, 그리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같은 실제 문헌들과 『신세기의 문화적 발현과 불모: 시인이 견지해야 할 종이 냅킨 혹은 종이 냅킨 접기에 대한 우아한 철학』1918과 같은 존재하지 않는 문헌들을 정교하게 엮으면서 모더니즘의 전복 혹은 서지학적 메타픽션처럼 펼쳐지던 조현의 이야기는 “예일 대학교의 필립 W. 하운즈 교수국제 T. S. 엘리엇 협회 명예 회장, MKY3731098220”라는 엘리엇 연구의 최고 전문가를 슬쩍 언급하는 대목부터 놀라운 반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발표자들의 이름마다 따라붙는 저 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런 의문이 살짝 떠오는 순간, 사실 인류는 2042년 넵튜늄 에너지 발전소 폭발로 이미 멸종해버렸다는 뜻밖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T. S. 엘리엇과 메리 설리번에 대해서, 20세기 초반 서구 문화와 계급에 대해 이토록 진지한 연구를 발표하고 있는 이들은 인류가 멸망한 지 백 년이 넘은 이후에도 인간들의 문명을 답습하고 있는 휴머노이드들이었던 것이다! 모든 인류가 멸종하고 인간의 문명 또한 소실된 미래에 인간이 지어낸 시와 이야기는 그 다음 지구를 물려받은 존재들에게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되고 있었다. 마치 지금 우리가 공룡의 발자국이나 화석에 열광하듯이, 그래서 천하무적이었던 공룡들이 왜 멸종의 운명을 맞아야 했는지 온갖 가설을 세우듯이.
이쯤에서 우리가 놀라는 점은 인류가 멸종했다는 것보다 ― 무엇 때문인지 인류는 늘 자기 종족의 멸종을 예감하며 살아왔다 ― 오히려 인간 이후의 세대가 T. S. 엘리엇 같은 고리타분한 시인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빌 게이츠나 트럼프도 아니고, 지금 인간들도 잘 모르는 모더니즘 시대 시인을? 아니, 대체 왜? 2133년 국제 엘리엇 학회에 모인 이 휴머노이드들은 “멸종한 수많은 인류 중에서 왜 특별히 T. S. 엘리엇이라는 시인에 주목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가 최초로 문명의 불임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따라서, 왜 그 사람의 경고를 당대의 그리고 그 후세대들이 대체적으로 무시해왔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결국 그의 경고대로 인류는 그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꽃을 피운 4월에, 개화 후 약 1세기 만에 불임의 파국을 맞았는데, 이 일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오랜 의문인 것이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 대한 일반적 해석은 이 시가 서구 문명의 불모성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무지」의 불모성은 흔히 생각하듯 모든 것이 죽고 황폐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죽지 않고 썩지 않음 ― 마치 오늘날의 플라스틱처럼 ― 에서 비롯된다. 썩지 않는 것은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없고, 죽지 않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죽지 않고 썩지 않음이 불임과 불모를 낳고 인류 문명의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불모성을 다름 아닌 휴머노이드, 영원히 죽지 않고 결코 썩지 않을, 그리고 무엇보다 잉태할 수 없는 존재가 주목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휴머노이드들의 의문처럼, 우리 인간들은 왜 T. S. 엘리엇을 비롯한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수많은 예언과 경고를 다 무시했을까. 조현이 이미 2008년에 전달한 이 짧은 소설 한 편만해도 이토록 명백한 결말이 담겨 있는데. 2133년 T. S. 엘리엇 연구가 애쉴리 조안나는 메리 설리번이라는 이 여성의 존재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하나의 경고는 온전히 진실해야 하고 행동을 수반해야 하는 법인데’, 엘리엇의 예언은 남의 말을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엘리엇 자신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코트를 고쳐 주거나 머플러를 둘러 준다든가 하는 아주 사소한 ― 그러나 진정 어린 ― 행동조차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코로나 시대에, 인간의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못한, 그러나 2133년 인간 연구가에 의해 겨우 되살아 난 메리 설리번의 편지 한 구절을 다시 마음에 새긴다면, 어쩌면 인간은 예정된 멸종을 조금이라도 더 유예할 수 있었을까. 모든 문화적 발화 뒤에 숨은 계급적 이해를 더욱 고착시키는 제스추어(종이 냅킨 접기나 골프 같은)가 아니라, 그걸 뛰어넘는 ‘하나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의 상징은 하나의 행동으로 연결될 때 우아하게 빛난다. 우리가 런던 뒷골목에서 사흘을 굶은 어린이를 보고서 검게 굳은 빵을 갈라 그 아이와 반 조각씩 나누어 먹는 것과, 단지 측은한 마음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천국과 연옥처럼 거리가 먼일이다. (…) 다야드밤(공감하라) 우리의 문명은 상징보다는 항상 재생하는 행동에 의해 종말을 유예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