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아름답고 청년도 역시 아름답다. 이것은 스투디움이다. 그러나 푼크툼은 그가 곧 죽는다는 것이다. 내가 (사진 속에서) 동시에 읽는 내용은 ‘그 사실은 존재할 것이고 그것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나는 죽음이 걸려 있는 전 미래의 공포를 느끼며 지켜본다. 사진은 포즈의 절대적인 과거를 나에게 제시하면서 미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 나는 위니코트의 정신병자처럼 ‘이미 일어난 재앙’에 대해 전율했다. 사진의 주체가 이미 죽었든 죽지 않았든, 모든 사진은 이와 같은 재앙이다.
─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동문선, 2006
이웃집 남자가 (또다시!) 여자를 죽였다. 이번에는 윗집 남자가 그의 아내를. 그러니까 이것은 또 다른 이웃집 살인 사건1에 대한 이야기일까? 야스미나 레자의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장리노?Babylone, 2』를 말하면서 살인 사건을 빼놓는 것은 분명 불가능해 보인다. 가령 이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려 한다면, 마치 경찰 조서처럼 살인 사건을 둘러싼 정황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살인이 일어났는가?이 주된 진술일 수밖에 없다.
1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점은 지난 번 서평을 썼던 다그 솔스타의 『안데르센 교수의 밤』과의 연관성이었다. 이웃집 살인, 또 다시 지연된 신고, 피해자가 아닌 살인자와의 유대 등등.
2 야스미나 레자의 부모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들로 프랑스 이주민이기도 하다. 『바빌론』이란 원제는 유대인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작가 본인은 이 제목이 자기 자신젊음, 꿈으로부터 유배된 채 살아가는 자들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암시한다고 말한다. “나에게 바빌론은 잃어버린 세계를 나타낸다. 우리가 어쩌면 살았을 수도 있었을 세계, 이제는 지나가버린 인간적인 모든 것들.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오직 우리 마음속에만 있다.”
파리 외곽의 한 아파트에 사는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문득 직장 동료들을 불러 봄맞이 파티를 열 생각을 하고, 부족한 의자를 빌리기 위한 방편으로 윗집 부부를 초대한다. 유쾌한 파티 중, 윗집 남자 장리노 마노스크리비는 유기농 닭고기만을 고집하는 아내와 말다툼을 벌인 끝에 집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목 졸라 죽이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 사실을 고백한다. 평소 그와 속내를 나누는 사이였던 엘리자베스는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부인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그를 도와주기로 한다. 하지만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마자 3층 여자와 마주치는 순간, 단박에 그를 도와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경찰에 자수를 권한다. 결국 마노스크리비는 체포되어 엘리자베스의 아파트와 일상에서 사라진다. 뭐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연극 무대에 오르는 희곡 작품 『아트Art』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들어 화제를 모았던 영화 『대학살의 신』의 원작자로 유명한 야스미나 레자는 우스꽝스러운 소동과 비극적 사건을 천재적 발상으로 결합시키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AFP와의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그런 발상의 기원은 음악가인 부모님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조반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소극과 드라마틱한 비극의 뒤섞임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장리노?』뮤진트리, 2017에서도 그와 같은 결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엘리자베스가 삶에 대한 충동적인 낙관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많은 유리잔과 의자들을 준비했던 봄맞이 파티와 유기농 사료를 먹은 닭을 둘러싼 마노스크리비와 부인 리디의 언쟁은 우스꽝스러운 소동 혹은 소극이며, 이 소극은 평범한 중년 가정의 우발적 살인이라는 예기치 못한 비극을 낳는다. 이 비극은 다시 죽은 부인의 시체를 처리하려는 마노스크리비와 엘리자베스의 어설픈 시도를 통해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소극 ─ 시체를 구겨 넣은 커다란 여행가방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루는 ─ 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서로에게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어떤 마음의 풍경을 보았다고 믿었지만 두 사람의 유대 관계 역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외부의 침입 앞에서 일순간에 버려지고 사라지는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파리 교외에 사는 평범하고 안락했던 두 가정이 봄맞이 파티라는 하루 저녁의 해프닝을 통해 맞이하게 된 파국, 즉 살인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사소한 부부싸움 끝에 어이없이 벌어진 살인 사건이고, 여기에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나머지 것들은 단지 살인 사건의 배경에 감상적인 색깔을 덧입히기 위한 소품 혹은 장치로 간주된다.엘리자베스의 젊은 시절에 있었던 첫사랑이나 단짝 친구, 어머니의 죽음, 마노스크리비의 어린 시절 그리고 무엇보다 창문에 드리운 색 바랜 망사 커튼이나 어울리지 않는 새 가죽점퍼를 입고 대머리를 가리려고 애쓰며 걸어가는 마노스크리비의 모습 같은 소소한 풍경들, 이런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이 어떻게 모두 언급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구성은 독자들의 조바심을 태우다 못해 답답함까지 유발하는 면이 있는데, 정작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살인사건은 전체 이야기의 3분의 1을 넘어선 지점에서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작가는 마치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 마냥 딴전을 피우며 잠깐 언급되고 사라져버릴 ─ 심지어 살인 사건의 복선조차 되지 못하는 ─ 에피소드와 장면들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오죽하면 이 책의 번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야스미나 레자가 2016년 르노도상을 받았을 때, 같은 해 공쿠르상을 받은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3를 거론하며 만약 『달콤한 노래』가 “아기가 죽었다”라는 다소 선정적인 문장으로 시작했듯이 이 작품도 “이웃집 남자가 자기 아내를 목 졸라 죽었다”와 같은 문장을 첫 문장으로 선택했다면 훨씬 대중적으로 유명한 콩쿠르상을 수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3 우연히도 바로 앞선 채윤정 씨의 서평에서 소개되었던 작품이다. 『달콤한 노래』역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장리노?』와 우발적 살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하나는 ‘가정’이라는 내부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이라는 외부 공간이라는 차이가 전혀 다른 양상을 낳는다.
하지만 야스미나 레자는 부부 살인이라는 소재를 들고 와서는, 역자의 표현대로 ‘뜬금없게도’ 한 장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고찰로 첫 문장을 시작한다. 혹시 무슨 복선이라도 될 만한 장면을 찍은 사진일까? 살인을 암시할 정도로 충격적이거나 절망적인 이미지라도? 그저 건물 벽을 등지고 거리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사진일 뿐이다.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여호와의 증인’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팔고 있는 남자. “비죽 튀어나온 두 귀, 겁먹은 눈빛, 짧은 백발, 여윈 몸매에 좁은 어깨.” 1955년에 찍은 사진이니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남자. 모든 게 사라지고 이제는 그가 등지고 서 있던 벽만 남아 있을 풍경. 62세의 엘리자베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 책’, 미국의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The Americans』을 40년 만에 다시 펼쳐 들고 이 남자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예순 살이 되던 날 마노스크리비와 처음 경마장에 갔던 일을 풀어놓는다.
바로 이 첫 장면, 이 사진 때문이었다. 이 책을 한번 읽고 던져버리지 못하고 자꾸 들여다보았던 까닭은. 산만하게 끼어드는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빼면, 이야기는 간단했고 담긴 내용도 명료했다.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장리노의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40년 만에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한낱 이야기의 소품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뭔가 더 이야기해주기를 요구하는 사진.
그리고 다시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깨달은 것은 단지 첫 대목에만 사진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처음부터 이것을 눈여겨보지 못했을까 의아할 만큼, 여기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첫 사랑인 조세프 드네와 찍었던 사진들, 낡은 서류와 함께 버린 카르디네 다리의 사진, 장리노 부부의 사진, 나치 협력자였던 요제프 맹겔레의 사진,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카이로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 모녀의 사진, 『미국인들』에 실린 또 다른 사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건 현장을 검증하는 사진까지. 이 작품 전체가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처럼 사진들의 나열과 그 사진에 대한 단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진들의 퍼레이드 속에서는 장리노의 살인 사건은 엘리자베스가 찍은 사진에 등장하는 하나의 피사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들은 무엇일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장리노의 살인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엘리자베스는 한 장의 사진을 먼저 내놓는다.
“우리의 작은 파티 때 나는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들 중 하나에서 장리노는 언제나처럼 잔뜩 멋을 낸 차림으로 소파에 앉은 리디 앞에 우뚝 서 있다. (…) 그들이 무엇 때문에 웃고 있었는지 나는 아주 정확하게 기억한다. 이 사진은 사건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 사진에는 다른 보통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은 것이 포착되어 있었다. 다시는 재현되지 않을 한순간, 어쩌면 반드시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석화된 한순간이. 하지만 그것이 리디 귐비네가 살아서 찍은 마지막 사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 사진은 은밀한 의미를 품고 있고 섬뜩한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25쪽)
이미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고 들여다보는 사진 속의 미소는 우리에게 얼마나 강렬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가. 지금 사진 속 그 사람은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 그 사람은 곧 죽을 것이고, 이미 죽었지만, 동시에 이렇게 살아있다. 활짝 웃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어지럽힌다. 사진이란 것이 과연 진실인가?”(26쪽)
하지만 이 현기증은 단지 죽은 사람의 사진뿐만 아니라, 모든 사진의 속성이다. 사진은 정확히 ‘바로 지금’을 포착하지만, 사진에 포착되는 순간 그 ‘지금’은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사진만이 그 사라진 것의 현존을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속성을 이렇게 말했다. “사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존재했던 것을 다만 확실하게 말한다. (…) 모든 사진은 현존의 증명서이다.”
우리는 매 순간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있으며,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우리가 지금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만간 무엇이 될 것인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지금 우리는 풍경 속 어딘가에 있고, 이윽고 때가 오면 더 이상 거기 없다.(10쪽)『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장리노?』에 등장하는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죽었거나 사라진 존재들이다. 1955년에 찍은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 속 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장리노와 리디도, 심지어 돌아가신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간직했던 사진들 속의 어린 손자들까지도. 결국 이 사진들은, 그리고 이 소설은 지금은 여기 없는 ─ 그러나 확실히 존재했었던 ─ 존재들에 대한 현존의 증명서인 것이다. 하지만 그 현존은 오직 시간이 정지된 사진 이미지 속에서만 보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죽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 장의 사진에서 죽음으로 보존된 현재를, 혹은 현재와 같은 죽음을 보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장리노의 외로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바르트의 사진에 대한 정의를 살짝 바꾸어 놓는다. “아무도 갖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조차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누군가는 당신에게 존재 증명서를 ─ 혹은 신용 증명서를 ─ 발부하는 셈이다”라고. 그렇다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 사람은, 혹은 누군가의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간직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현존의 증명서를 발부하는 것이며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