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학의) 현실이 모든 인습적이고 정상적인 현실을 분해시키며, 아주 다르면서 자주 비타협적인 현실을 묘사한다는 사실, 이런 현실 속에서는 평범한 것들이 종종 블랙 유머를 동반한 채로 기형과 불가능성의 풍경, 불안과 억눌린 절규로 점철된 풍경, 냉소적이고 끈질긴, 비난하고 해체되는, 사기를 잃고 술에 취한, 완전한 행복에 대한 믿음으로 치명상을 입은 그런 풍경을 통과하면서 결국 낯설고 두려운 위치로 옮겨가버린다는 사실.”
─ 다그 솔스타, 『안데르센 교수의 밤』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2016
문학은 “인습적이고 정상적인 현실을 분해시키며”, 현실의 모든 평범한 것들은 문학의 풍경 속을 통과하면서 “결국 낯설고 두려운 위치로 옮겨가 버린다.” 문학의 풍경, 그것은 (다그 솔스타의 표현에 따르면) ‘블랙 유머를 동반한 기형과 불가능성의 풍경’이며, ‘불안과 억눌린 절규로 점철된 풍경, 냉소적이고 끈질긴, 비난하고 해체되는, 사기를 잃고 술에 취한 풍경, 완전한 행복에 대한 믿음으로 치명상을 입은 그런 풍경’이다.
가령 신을 믿지도 않고 함께 보낼 가족이나 친구도 없으면서 트리 장식과 선물과 전통 음식을 갖춘 성탄절 전야라든가, 한때는 아방가르드에 심취한 젊은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의사, 행정가, 심리학자, 유명 배우, 문학 교수 등 사회의 주류가 된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과 같은 평범한 일상들. ‘특별한 하루’였다고 중얼거리면서 따뜻한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 곧바로 과거라는 궤짝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버릴 수 있는 시간들. 이런 것들은 낯설지도 두렵지도 않고, 무엇보다 ‘아이러니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평범한 현실이다. 그리고 ‘이웃집 살인’이란 특별한 일상도 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어디선가는 늘 벌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일상, 심지어 세상의 이런저런 뉴스들에 비하면 하찮게 보일 수도 있는 평범한 사건.
노르웨이 작가 다그 솔스타Dag Solstad의 세 번째 소설 『안데르센 교수의 밤』1996은 안락하고 평온한 중년의 삶에 어느 날 불쑥 끼어든 이 ‘이웃집 살인’에 대한 이야기다. 『안데르센 교수의 밤』의 첫 장면에 묘사된, 안데르센 교수가 홀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의 풍경은 몸에 깊이 배어들 정도로 철저히 인습적이고 친숙한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55세의 이혼남인 그는 “선진 기술과 부유함의 혜택을 누리는 나라의 수도에서, 20세기 끝을 향해 가는 지금” 함께 지낼 가족도 없고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도,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밝히고 정장을 갖춰 입고 크리스마스 전통 음식을 손수 차려서 천천히 의식을 치르듯 먹고 조카들의 의례적인 선물 ─ 문학 교수에게 책 선물이라니! 이보다 더 안전하고 적당하며 무의미한 선물이 있을까! ─ 을 풀어본다. 그러면서 안데르센 교수는 자신이 이런 관습의 무의미함과 허식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충분히 이성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풍습을 준수하고 그 진정한 정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자신의 행동과 삶의 방식에 ‘아이러니라고는 손톱만도 없으며’ 그저 ‘어린애 같은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신자지만 기독교 문화에 속해 있으니, 아이러니를 띠지 않고도 크리스마스 정신을 마음껏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가 거룩한 밤의 마지막 의례로 다른 가정의 행복한 풍경을 훔쳐보는 ─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거룩한 밤’에 동참하고 교감하는 ─ 시간을 갖고자, 가장 근사한 옷을 차려입고 길 건너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고 섰을 때, 반대편 아파트 창문에서는 그가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광경이 펼쳐진다. 어떤 남자가 긴 금발 머리의 여자를 목 졸라 죽인 것이다. 마땅히 행복한 가족의 풍경이 있어야 할 곳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폭력. 평화롭고 거룩한 밤의 이웃집 살인.
이웃집 남자가 여자를 죽였다. 우연히 살인을 목격한 그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나라,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내 이웃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라니! 이웃이란 단지 가까운 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이란 나와 비슷한 계층, 비슷한 삶의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의 범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웃집 살인이란 어디 먼 동네의 살인과는 다르게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된다. 게다가 모든 죽음이 살아서 아우성치던 입술을 영원히 침묵시키기 마련이지만, 살인만큼은 특별한 죽음으로 취급받지 않는가? 살아있을 때에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던 낯선 망자가 자신의 죽음을 책임지라며 끈질기게 외치게 만드는 기이한 현상, 그것이 바로 살인이다. 죽은 자의 요구, 그리고 공동체를 위협하는 또 다른 폭력의 가능성을 어떻게 그저 여러 일상 중의 하나로 되돌릴 수 있을까? 사실 답은 시시할 만큼 간단하다. 현대사회는 이미 산 자들을 위해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마련해놓고 있으니까. 전화기를 들고 번호만 누르면, 우리의 믿음직한 사법체계가 모든 걸 떠맡아 줄 것이다. 전화 한 통으로 우리는 죽은 자에 대한 책임감과 이해할 수 없는 악행에 대한 공포를 가볍게 떨쳐버리고 ─ 물론 번거로운 형식적 절차가 있겠지만 ─ 변함없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했다는 뿌듯함과 당분간 당신을 화제의 중심인물로 만들어줄 짜릿한 이야깃거리까지 안고서.
하지만 『안데르센 교수의 밤』의 주인공은 어쩐 일인지 이 손쉬운 해결책을 선뜻 택하지 않고 주저한다. 그는 본능적으로 전화기 쪽으로 걸어가지만 수화기를 들지는 않는다. 몇 시간 동안이나 어두운 거실에 서서 경찰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끝내 수화기를 들지 않고 잠이 들어버린다. 내일이 되면 살인은 없었던 일이 되고 모든 게 예전과 같아질지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으며.
실제로 다음날이 되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살인 사건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세상은 조용하고 실종자를 찾는 경찰도 나타나지 않는다. 안데르센 교수는 여전히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녀오고 새해 전야에는 또다시 고급 음식과 술을 마시며 건너편 건물을 주시하고 학생들에게 입센을 강의하고 외식을 나가기도 한다. 평범하고 친숙한 삶의 외형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예전 그대로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느낀다(그리고 주인공 안데르센 교수도 서서히 느낀다). 그가 살인을 목격하고 전화기를 들지 않는 선택을 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전과 다름없어 보이는 그의 일상은 전혀 다른 풍경, 낯설고 위협적인 곳으로 고스란히 옮겨져 버렸고, 그 이후의 삶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삶 전체에까지 지독한 아이러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저 평범하고 밋밋한 크리스마스이브의 풍경처럼 보였던 이 소설의 첫 장면이 사실은 한 줄 한 줄 신랄한 블랙 유머를 동반한 기형적 풍경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제 안데르센 교수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은 아무리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 ─ 그저 세련된 취향과 유머 감각을 갖춘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 같은 ─ 이어도 묘한 냉소와 조롱, 그리고 지독한 아이러니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누군가 건너편 창문을 엿보다가 살인 사건에 연루된다는 이런 설정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유명한 고전 영화 『이창』Rear Window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인 사진작가 제프는 안데르센 교수처럼 맞은편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집안을 엿보다가 한 남자가 부인을 살해했다는 정황을 발견한다. 하지만 직접 살해 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한 탓에 곧바로 경찰에게 신고하지 못하지만, 교수와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끈질기게 시도하여 결국 살인범을 붙잡고 이웃집 여자의 자살까지 막는다. 제프의 관음증적 행위는 이웃에 대한 윤리적 실천 행위로 만회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제프가 두 다리를 다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웃집 살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사실은, 명확히 살인 장면을 목격했고 육체가 멀쩡함에도 전화를 거는 간단한 행동 하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안데르센 교수의 정신적 무능과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안데르센 교수의 이 망설임, 이 지연이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 당연히 던지는 질문들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는 점이다. 원래 살인자에게 던져질 질문들이 이제는 목격자에게로 향한다. ‘그는 왜 여자를 죽였는가, 여자를 죽인 남자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대신 ‘너는 왜 신고하지 않는가, 신고하지 않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는 것이다. 갑자기 살인자에 대한 궁금증은 사라지고, 목격자의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풍경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살인자는 그저 평범한 이웃이고, 수수께끼와 의문의 대상은 오히려 목격자가 된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건 이 남자를 신고하는 일뿐이야. 그러면 그야말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고, 나를 막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이제부터 안데르센 교수는 계속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며 제법 진지하고 심오한 질문들과 대답을 끌어낸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공동체의 의무를 느껴야 하는 이유는 뭔가? 원초적 범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모든 문명의 전제이며 그 모든 것 뒤에는 궁극적 이유로서의 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왜 살인을 신고하지 않는 것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피해자인 여자의 고통은 어찌 되는가? 타인에게 그런 공포를 안겨주고 처벌을 피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살인자에게 어떤 형벌을 내리더라도 그녀가 되살아나지는 않지 않는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들.
독자가 귀담아들어야 하는 것은 목격자의 실존적 고민이었던 걸까? 하지만 작가인 다그 솔스타는 이토록 엄청나게 심오한 상념들 사이사이에 터무니없이 가벼운 그의 일상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시종일관 조롱과 냉소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안데르센 교수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여학생의 의미 없는 눈빛에 한껏 마음이 부풀어서, 그 좋은 기분을 기념하기 위해 이탙리아제 양복을 꺼내 입고 품격 있는 스시 바를 갖춘 일본 음식점에 가는 장면에서 작가의 블랙 유머는 절정에 달한다. 그 음식점에서 안데르센은 실존적 고민의 원인 제공자인 바로 그 살인자와 나란히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정작 그의 관심은 누가 더 젓가락을 능숙하게 하는지, 누가 더 외국 도시를 많이 가봤는지 하는 경쟁에만 온통 쏠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새 안데르센 교수와 (젊고 괜찮은 직업을 갖고 있고 아시아를 잘 아는) 살인자 헨리크 노르스트룀은 서로 집을 방문하고 개인사를 털어놓는 ‘이웃지간’이 되어버린다.
안데르센은 자신이 자꾸 빠져들고 있는 이 낯설고 기이한 상황을 다 떨쳐내고 뒤돌아가서 걸어가고 싶어 하지만, 고작 ‘따뜻한 목욕’ 이외에는 출구를 찾지 못한다.
결국 안데르센은 신고를 했었어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니까 작가는 이웃집 살인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공동체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주인공을 비난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경찰이 오고 사법기관에게 맡기면, 이 모든 아이러니와 부조리가 사라졌을까?
열린 결말로 끝나는 소설이니만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아마 가장 두려운 결론은 모든 부조리와 무의미가 이미 여기 있었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이웃집 살인 사건은 낯설음과 기이함의 원인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조명이었을 뿐. 혹은 일상의 평범한 것들을 낯설고 두려운 위치로 옮겨놓는 문학의 풍경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