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외곽에 있는 8층짜리 건물이 붕괴되었다. 당시 이 건물에는 여러 봉제업체가 입주해 있었고 이 붕괴사고로 그곳에서 일하던 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사고 전날 이 건물은 당국의 안전진단에서 긴급폐쇄 명령을 받았다. 왜 이 업체 업주들은 당국의 긴급 대피명령을 무시하고 사고가 난 다음 날에도 근로자들을 출근시켜 작업을 계속했을까? 붕괴된 건물의 잔해에서 이들이 봉제한 의류에 부착될 상표가 수거되었다. 스페인 의류업체 브랜드 ‘망고’, 영국 패션 브랜드 ‘프라이마크’가 발견되었고, 세관 기록에 의하면 이 봉제업체들이 납품한 의류는 이 밖에도 ‘월마트’, 네덜란드 의류 판매업체 ‘씨엔에이’, 이탈리아 패션업체 ‘베네통’, 미국 여성의류 및 액세서리 판매업체 ‘카토’ 등이었다. 이들 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한 달 최저임금은 고작 4만 원이었다. 방글라데시는 전 세계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의류 생산기지이다. 이 나라에는 약 5천 개가 넘는 봉제공장이 있고 삼백이십만 명 이상이 봉제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들 노동자들 대부분은 여성으로 이들의 값싼 노동력은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려는 유럽과 미국의 의류 판매업체들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축복 이면에는 노동자들과 이들 공장업주들의 가혹한 현실이 있었다. 납품단가를 낮추고 납품기일을 엄수해야 했던 공장주들은 공장을 이전하거나 폐쇄하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들에게 고용된 노동자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노동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허버트 웰스Herbert Wells는 1905년 작 『모던 유토피아』A Modern Utopia, Penguin, 2005에서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구촌에 대한 대안적 지구사회를 제시하면서 애덤 스미스를 구닥다리 정치·경제 체제의 산물로 치부했다(62~63쪽). 『모던 유토피아』에서 웰스는 지구인인 주인공이자 화자가 또 다른 지구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을 상상한다. 이것은 두 개의 지구이지만 하나의 지구, 혹은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처럼, 지구에 있는 또 다른 지구를 상상하는 것이다. 웰스가 시도하는 이런 상상은 거울 속에 비친 나를 타자로서 내가 응시하는 것처럼 상이한 문화와 역사를 갖고 있지만 또한 서로 닮은꼴인 지구가 지구 자신을 외계행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모던 유토피아』에서 화자는 지구의 분신인 외계행성으로서의 지구가 지구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웰스의 화자는 자유주의 고전경제학의 거두 애덤 스미스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가 『국부론』에서 정당화한 교역과 거래를 통한 상품의 매매차익에 따른 부의 축적이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모던 유토피아』의 반反 『국부론』 기조는 거래를 통해 이윤을 남기는 것이 인간의 사행심과 탐욕을 부채질하여 특정 개인이, 특정 계층이, 그리고 특정 국가가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는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킨다는 판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구에서] 부의 척도는 교환이 얼마나 일어났는가에 따라 정해졌다. 사회는 서로 갑을관계로 맺어진 사업적 협력관계 정도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사실상 수도 없이 많은 탐욕스런 성인 집단들로 보였다. 경쟁을 유발하는 요인들은 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62쪽)
이름 없는 일인칭 주인공의 입을 빌려 드러나는 웰스의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모던 유토피아』 출간 약 백 년 후 벌어진 방글라데시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참사와 놀라울 정도로 명징하게 조응되고 있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미국과 유럽의 패션·의류 판매업체들은 중간 거래상들이다. 그들은 노동자(제조자,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자들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노동자가 만든 하나의 물건이 최종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중간상인들이 많은 이득을 챙기는 구조다. 요컨대 상거래는 근본적으로 시장에 대한 정보를 독점한 소수가 노동자가 만든 물건과 최종 소비자 가격 간 시세차익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가져가는 불공정행위인 것이다.
『모던 유토피아』에서 웰스가 상상한 외계행성 지구에서는 더 이상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참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웰스가 기획한 새로운 지구촌은 국경이 없다. 지구촌 각 지역 언어들이 하나의 언어로 통합되면서 각 개인들이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다른 언어로 통역하거나 번역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전 세계인들이 그들 내면의 감정적 울림을 의미의 굴절 없이 직접적으로 공유하게 되었다. 이 세계어는 동태적 상태의 언어로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념을 반영하면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진화되어 나가는 언어이다. 또한 정착적, 토착적 삶이 파생시킨 지역성, 민족성, 국가주의에 매몰된 지구인들과는 달리 지구의 또 다른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다. 유토피아의 지구인들은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세계인이 된다. 웰스는 자신이 개진한 현대적 의미의 유토피아와 전통적 의미의 유토피아 간 대별점이 바로 이주적 삶과 정착적 삶이 갖고 있는 전혀 다른 정치·경제적 의미에 있다고 말한다. 이주적 삶의 경제학은 더 이상 국가 간 교역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구의 어떤 경제학자들도 민족주의와 정치가 배제된 경제적 시스템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국가 간 교역이었다. 여기 유토피아의 세계국가는 국제무역을 발도 못 붙이게 만들었다. [외계행성에서 떨어진] 운석 이외의 그 어떤 것의 수입도 수출도 없다. 무역은 지구의 경제학자들이 생각해낸 초기 개념이다. 그들의 출발점은 교환가치에 관한 수수께끼였는데 너무 복잡해서 알 수도 없거니와 풀 수도 없는 그러한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가 풀 수 없다는 것은 모든 교역이라는 것이 결국은 계량이 불가능한, 비교 불가능한 개인적 선호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59쪽)
웰스의 유토피아가 제시한 거꾸로 경제학은 상품과 농산물, 물자가 이동하는 대신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웰스의 『모던 유토피아』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을 차용한 유토피아 강설講說이다. 그는 『모던 유토피아』에서 플라톤의 『국가론』과 모어의 『유토피아』 등과 같은 전통적 유토피아가 담고 있는 집단적 공산체제를 비판하고 개인주의를 공유경제의 핵심으로 채택한 현대적 의미의 유토피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요컨대 웰스가 구상한 현대적 의미의 유토피아는 개인이 집단주의에 희생되는 전통적 유토피아를 극복한 것으로서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가운데 공유적 이념과 공유적 가치가 존중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모던 유토피아』는 여전히 지구이지만 전혀 다른 지구를 경험하고 지구로 귀환한 일인칭 주인공이자 화자가 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화자가 또 다른 차원의 지구로 가게 된 것은 스위스의 루센드로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도보 여행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다른 차원의 지구로 들어가는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던 유토피아』는 이보다 10년 앞서 출간된 웰스의 중편 공상과학 소설 『타임머신』The Time Machine, 1895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모던 유토피아』는 전작 『타임머신』이 그린 절망적 인류사회에서 유토피아적 희망을 꽃피우려는 시도이다. 요컨대 『타임머신』이 빅토리아 시대 당대 노동자 계층과 부유층 간 계층 양극화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환멸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모던 유토피아』는 물적 조건에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극복하고 이상사회를 구축한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웰스가 구상한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대안은 공유경제를 실현하는 것이며 토지는 국가로 귀속된다.
토지와 자연 그리고 자연에서 나는 모든 것들은 사유재산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현대 사상의 대체적 흐름이며 [현대적 의미의] 유토피아에서 이러한 것들은 세계국가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국가의 자산이다. 모두에게 이주할 자유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으므로 이주민들이 사용할 토지[공유지]는 개인이나 회사에 임대된다. 그러나 (…) 시한은 50년 정도로 그 이상은 절대 안 된다. (70쪽)
웰스의 이러한 공유경제 체제는 전통적 유토피아에서 나타나는 공유경제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아내와 자식, 가족으로부터 모든 형태의 동산,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의 사적 소유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공산체제를 주장했고, 모어도 『유토피아』에서 완전한 공산제를 참다운 공유경제 실현의 방식으로 제시했다.
참된 수호자란 앞에서 말한 조건과 방금 말한 조건, 즉 재산의 공동소유와 가족의 공동소유를 겸해야 한다는 말이네. 다시 말해서 이 양자에 있어서 똑같이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으로 구별하는 것을 방지하여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 즉 각자가 개별적인 처자와 개별적인 쾌락과 고통을 지니고 있는 개별적인 집에 각각 자기소유를 갖고 감으로써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을 걸세.
─ 플라톤, 『국가론』, 최현 옮김, 집문당, 220~221쪽
그리고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공공의 소유로 되어 있으므로 공공의 창고가 비지 않는 한 누구도 필수품 부족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어느 누구도 소유하는 바가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부자인 것입니다.
─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김현욱 옮김, 동서문화사, 111쪽
유토피아에서는 돈을 없앴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탐욕까지도 없애 사회문제들이 해결되었으며 수많은 범죄들이 사라졌습니다.
─ 토마스 모어, 112쪽
이에 반해 『모던 유토피아』에서 나타나는 웰스식 공유경제는 공산제와 사유제를 혼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토지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사유재산이 허용되는 체제이다. 사업체를 개인적으로 소유하거나 타인과 공동으로 소유할 수도 있고 돈을 모아 내가 좋아하는 사치품을 살 수도 있다. 웰스에게 있어 어떤 개인의 소유물은 곧 그 개인의 개성을 나타낸다. 개성이 존중된다는 것이야말로 웰스식 유토피아가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요체이다. 웰스의 공유경제는 결국 토지와 자연만 국가가 소유하고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개인의 사적 소유를 허용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적 공산제라고 할 수 있다.
웰스의 『모던 유토피아』는 전체의 행복이라는 기치 아래 개인이 선택할 자유를 제한해온 전통적 유토피아가 유실시킨 개인의 자유를 건져 올리는 새로운 유토피아 만들기이다. 공유를 통한 공동선의 실현을 꿈꾸는 유토피아 담론에서 공익의 정당성이야말로 늘 강조되어 왔다 ─ “모든 사람이 복리를 누리는 유일한 길은 재화의 완전한 균등분배뿐이라는 사실”(토마스 모어, 40쪽)이다. ─ 웰스의 눈에 비친 기존 유토피아 담론은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통치기구가 제정한 법규, 규정, 규칙, 조례 등에 개인이 완벽히 부응하는 완전무결 이상사회를 상정한 정태적 유토피아였다. 정태적 유토피아에서는 국가와 개인이 하나의 완전체로 작동하는 무변無變사회이다. 가령 모어의 유토피아는 원래 대륙의 일부였던 곳을 폭 24㎞의 바닷물길을 인공적으로 조성하여 대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킨 곳으로 외부세력과의 접촉이 사실상 단절된 공동체이다. 집단 전체의 행복을 위해 개인의 허영심과 탐욕이 제거된 이 유토피아에서는 산아제한을 통해 가족구성원 수를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사이가 되도록 법령으로 통제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의무적으로 2년 동안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며 같은 색깔의 외투를 입고, 밤 여덟 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모어가 상상한 이상사회에서 개인은 오로지 공공의 복리라는 명분이 만들어낸 법률과 관습, 제도에 철저히 희생된, 이른바 몰개성화된 자이다. 웰스는 이러한 유토피아가 “피와 온기가 사라지고 삶의 현실성이 결여된”(14쪽) 채 “개인성은 없어지고 오로지 일반화된 집단만” 남아있는 이상향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고전 유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웰스가 제시한 신 유토피아는 변화와 발전의 역동성을 견지하는 동태적 유토피아, 즉 “변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모습이 아니라 한 단계, 한 단계 우리가 소망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11쪽)으로 기획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