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성주의페미니즘와 관련해서 동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이 글을 통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도 매우 곤혹스런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비판의 화살이 남성 지배 질서 쪽을 향해서만 쏠 때는 편할지 모르지만, 이 비판의 화살은 늘 부메랑 효과가 있는 것이니까. 외부를 향해 던진 비판의 화살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나에게도 달려오기 마련인데, 이때의 화살들은 여성의 삶 전체의 기반을 흔드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이라고 할 때 상대적으로 남성지배질서와 맞선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동문학도 소수자인 아동을 위한 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그렇다면 진실로 한국의 아동문학이 상대적으로 소수자인 아동을 위한 문학으로 기능하고 있는가? 아이들 내면 속으로 들어가 아이들 내면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영혼의 친구가 되고 있는가? 지금 아동문학은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오히려 아이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어른의 욕망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포지엄을 주최한 쪽에서 같이 토론해 볼 작품을 안내해 주었는데, 작품을 살펴보니 일관된 주제가 보인다. 어린 생명을 길러내는 모성을 신화화 시킨 이야기들이 많다. 여성주의와 아동문학을 주제로 하는 토론에서 역시 넘어야 할 산 같기도 하고,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바로 이 모성의 문제일 것이다. 시작부터 너무 숨이 막히는 질문을 하는 건 아닌가 싶은데, 과연 모성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진정 아동을 위한 것인가? 어린이가 자기 욕망의 주체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절실한 이야기여서 이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또 많은 독자를 확보하게 되는 것인가? 먼저 이렇게 묻고 토론을 시작해 보자.
2
오랜만에 『마당을 나온 암탉』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 작품이 나온 해가 2000년이다. 아동문학 작품이 대중문학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데, 이 작품이 기여한 힘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읽어봐도 마지막 장면은 가슴이 짠하다. 잎싹암탉이 청둥오리 알을 품어 초록머리를 길러내 떠나보낸 뒤, 빈 둥지가 되어 마지막에는 자신을 괴롭히던 족제비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이다. 이 작품에서 모성은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견뎌내는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희생을 극대화시킨 캐릭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새끼를 키우는 족제비에게 자신을 내주고 마는 잎싹은 모성을 하나의 우주적인 지배 원리와 같은 절대 가치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작품을 다 읽고 나면 감정선의 곡선이 생기는데, 이 작품은 나의 내면 에너지를 아주 낮은 쪽으로만 흐르게 하였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 가슴이 짠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요당하는 느낌도 들어 불편한 마음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엄마모성는 일정 부분 안전기지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안전기지로서 건강한 관계를 담당하는 엄마의 역할과, 엄마 개인의 내적 욕망은 거세된 체 오직 자식을 길러내는 생물학적인 본능만을 극대화시키는 엄마의 희생적인 모습은 분명 구별되는 지점 또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엄마 아빠로 이어지는 가족주의 삼각형에서, 모든 희생을 감내하고 견뎌내는 삶의 전형으로 작동하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에서는 당연한 캐릭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2000년에 첫 출판되었다. 2000년대를 전후로 해서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모성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런 배경에는 1990년대 중반에 일어난 IMF 사태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남성지배 질서의 중심이 흔들리자, 가족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로 강한 어머니상이 부각되는 일종의 모성 이데올로기를 다시 불러내는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이 모성의 신화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아동문학에서 새로운 캐릭터는 발견되기 힘들 것이다. 잎싹은 과연 지금 이 시대에도 시간의 무게를 견뎌내는 캐릭터로 아이들에게 읽힐만한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모성의 신화가 과연 어린이를 위한 것인가? 신화화된 모성이 진짜 아이들을 위한 사랑일 수 있는가?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보여주는 모성의 내용은 남성의 지배를 순종적으로 받아들인 여성들의 내면에서 태어날 수 있는 왜곡된 삶의 신화가 아닐까.
아이들에게 안전지대로 작동하면서 유머러스한 놀이 감각을 일깨워주고 자기 욕망의 주체로 살아가게끔 자극하는 모성이냐, 아니면 가족주의 삼각형의 한 고리로서 남성지배를 받아들여 숙명적으로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인내해야만 하는 모성이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3
모성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되는 가족가정이란 개념은 근대에 태어난 산물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의 아동문학판에도 중산층 개념이 작동하면서 가족주의 개념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족의 개념은 학벌주의를 내세운 근대교육과 합쳐지면서 더욱 폐쇄적인 공간, 은밀하면서도 사적인 공간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가정가족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엄마는 쓰러져서는 안 되는, 절대적으로 자기 관리를 잘 해 내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아이 또한 관리해 내야 하는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학벌주의 시스템 속으로 아이를 편입시키기 위해, 엄마가 먼저 자기 욕망은 숨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거세한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엄마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보호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통제하고, 아이의 욕망을 거세하는 논리를 강요하는 가부장의 언어까지도 대신 사용해야 하는 이중 삼중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는데, 물론 예외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이런 모습이 가장 보편적인 한국 엄마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잎싹의 이미지는 묘하게도 지금 엄마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아동문학판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동화 읽는 엄마들을 만나 왔다. 엄마라는 모성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에서 나오는 공통의 에너지가 있기는 하겠지만, 이십 년 전의 어머니들이나, 지금의 어머니들이나 아이를 교육하는 내면의 상상력에서는 달라진 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나오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저 모성의 캐릭터가 자신들에게 진정한 사랑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간파한 아이가 있었다. 모성의 가슴에 아주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언어를 날린 아이가 있었다. 잔혹하리만큼 날카로운 언어를 날렸는데, 이런 언어를 보고 일반 어른 대중들이 ‘잔혹동시’란 이름을 붙여 가면서까지 극한으로 거부감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잔혹동시라 이름 붙여졌던 「학원 가기 싫은 날」이란 작품을 보자.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 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이 시가 실린 『솔로 강아지』이순영 지음, 가문비 어린이란 시집은 2015년에 출판되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나온 지 딱 15년 뒤에 나온 아이 작품이다. 어른들이 모성의 신화를 이야기하고, 『마당을 나온 암탉』 같은 작품에 감동을 하는 사이 세월은 바뀌어, 아이들은 오히려 모성의 신화를 지우려 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엄마들이 모성을 앞세워 아이 삶의 욕망을 거세하려 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저 어린 시인이 내는 소리를 한 아이의 특별한 감성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아이들이 지금 이 세상에는 오히려 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 아동문학판이 기대하고 발견해야 할 새로운 캐릭터는 이런 아이들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아동문학작가들은 아직도 저 2000년대 모성의 신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미 모성의 신화 밖으로 탈주해 가고 있는 아이들은 어른의 삶 속으로 들어와 심리적인 어린이 시기는 순식간에 다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어른 못지않게 가부장의 권력을 대신하는 모성으로 포장된 언어의 모순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두고 어른들은 아직도 너무나 한가한 당위적인 도덕관념의 캐릭터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모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억압하는 다양한 삶의 제약들이 이미 남성지배질서의 산물로 엄마 스스로도 행복하지 않은 모성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남성 지배질서에 갇혀 일종의 유령이 되어가고 있는 엄마를 상징적으로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그래서 저렇게 엄마를 향해 잔혹한 언어를 날리는 것이다. 아이가 쏟아내는 저 언어야말로 겉으로는 잔혹해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진정으로 엄마와 영혼의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시적인 언어가 아닐까?
아이가 보여주는 저러한 독한 언어를 잔혹동시라며, 엄마를 부정하는 것이라고만 해석한다면 아동문학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의 다리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캐릭터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4
당위적인 도덕관념에 갇혀 있지 않은 아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 아동문학 하는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 또한 이 물음에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해 봐야 한다. 저 아이는 미래에서 온 아이이고, 기존의 어른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가 탄생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니체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인륜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 온 법이나 전통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꺼이 복종하든 마지못해 복종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복종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랫동안 물려받아 마치 천성인 것처럼 쉽게, 그리고 기꺼이 관습에 따라 행동하는 자는 '선하다'고 불린다……. 악하다는 것은 곧 '관습에 매이지 않는'비관습적인 것이고, 나쁜 관습을 행하는 것이며, 전통이 아무리 합리적이든 어리석든 상관없이 그것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96절, 『니체 그의 삶과 철학』, 194~195쪽
저 위의 어린 시인은 모성의 신화에 복종하지 않았다. 아이의 욕망을 무시하면서 어떻게든 학원에 보내려고 하는 엄마라고 하는 신화화된 모성의 여신에게 아이는 복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관습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언어를 쓴 저 아이는 그래서 ‘선’하지 않고, ‘악’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관념과 아이는 지금 싸우고 있다. 기존의 관념을 깨는 캐릭터는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이가 될 것이다.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트릭스터처럼. 지금 우리 시대에 저 아이는 모성의 신화를 깨면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가족이라고 하는 구조 안에서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강요된 도덕적인 의례들에 잘 따르는 여성들은 선하다고 얘기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습에 매이지 않는 행위들은 악한 행동으로 간주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성 지배 질서를 한번 뒤집을 때는 일단 그 매개항을 담당하는 자들은, 악한 사람으로 매도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전제적인 남성지배질서의 전복을 위해서는 악동으로 여겨지는 캐릭터,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새로운 개념의 마녀 캐릭터가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이런 작품들은 물론 당장에는 많이 읽히지도 않고, 가족주의 개념으로 무장한 홈 스위트 홈을 외치는 가정이나 공교육 현장에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작품의 한 예를 든다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악동이나 마녀는 아니지만, 당위적인 도덕관념의 캐릭터에서는 많이 벗어난 『엄청나게 시끄러운 폴레케 이야기』휘스 카위어 지음 같은 작품이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과 한번 같이 놓고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이 작품은 1999년에 나와서, 『마당을 나온 암탉』이 나오던 2000년에 유럽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이 작품들이 나오고 15년 뒤의 우리 아동문학 상황을 살펴볼 때, 작가들은 여전히 2000년대 초반 가족주의 신화 속에 갇힌 모성의 개념 안에서 살고 있는데, 아이들은 저 폴레케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내면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급변해 있다.
15년 동안 아이들은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며 독특하게 변화되었는데, 어른들은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어른과 아이의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아이들로 하여금 어른들 세계로 편입해 들어오라고 강요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른들이 아이들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것인가?
어른들은 아이들 내면 속으로 들어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기존의 당위적인 가족주의로 무장한 도덕관념과, 자본이 전제 군주 노릇을 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매몰되어 어른들은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작점의 하나가 모성의 개념에 대한 본질적인 토론이 아닐까 싶다. 가족주의 개념에 갇힌 모성의 신화는 어른과 아이들 삶의 소통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