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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을 주최한 측에서 안내해 준 백희나의 엄마 시리즈 작품들은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과는 결이 다르다. 『삐약이 엄마』 『장수탕 선녀님』 『이상한 엄마』는 모성을 주제로 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작품 속 캐릭터들은 유머가 있고 신화적이다.
니양이라는 작고 약한 동물을 괴롭히는 고양이가 예쁜 달걀을 먹고, 병아리를 낳는다. 니양이는 이때부터 삐약이 엄마로 살아간다. 장수탕 선녀님도 그렇고, 이상한 엄마는 고립된 아이에게 찾아오는 일종의 전령관들이다. 일상에서 변화의 때가 무르익은 아이들에게는 신의 정령이라 할 수 있는 전령관이 찾아온다.
백희나 작품의 엄마들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모성에만 갇혀 있지 않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상징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원인 결과식의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들은 우발적 마주침을 즐기던 감각의 논리로 무장한 신화 속 존재들의 상징 이미지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든 것이다.
꿈을 꾸어본 사람이라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꿈 장면에 압도되어 하루종일 울어본 사람이라면 꿈 상징의 이미지들이 얼마나 강력한 지를 이해할 것이다.
꿈의 상징들, 일종의 신화의 상징 이미지들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설명하기도 힘들지만, 그러나 이런 이미지들은 우리들 내면에 엄청난 감정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심리 에너지 덩어리들이다. 백희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령관들인 엄마의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이 책을 읽는 엄마나 아이들 마음에 어떤 식으로든 작동을 하여 아이들 내면의 심리에너지에 어떤 낙차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일종의 감흥이나 정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그림책 속의 전령관들은 일종의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아주 큰 심리 에너지를 자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말로는 해석될 수 없는 상징의 세계는, 우리 내면에서 지금도 태어나고 있는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실재하는 존재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희나의 그림책들은 흥미롭고 재미도 있다.
역시 백희나의 엄마 시리즈 또한 유아 시기를 거쳐 가는 아이들에게 엄마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계속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요즘 교육엄마들의 본질에 대해 지적하는 아래 말을 한 번 더 들어보자.
여성의 몸은 사랑과 애착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공포와 불안, 파괴의 욕망을 불러오는 대상이기도 하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러한 이중성은 오이디푸스 시기 어머니의 몸에 대해 아이가 갖는 양가적 감정에서 비롯되지만 주체 형성 과정과 더 관계가 있다.유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성적 대상이 되기도 하는 어머니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내면서 주체로 탄생한다. 어머니에 대한 상상적 일체감은 아이가 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어머니의 원형적 이미지는 다시 아이를 삼키고 통합하려는 대상처럼 무의식 속에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는 사랑과 증오라는 이중의 감정을 어머니의 상에 투여한다.─ 김석, 「여성의 몸과 불가능한 주이상스」, 『포르노 이슈』, 그린비, 173쪽
엄마의 일방적인 헌신은 아이가 주체가 되는 걸 방해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보통 가족주의 안에 갇힌 부모들이 이걸 망각한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갖는 저 이중의 감정, 서로 그리워 떨어지지 못하면서도 서로 증오하면서 얽혀 사는 주체들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보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가족주의에 갇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국 가정의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까도 싶다.
아이에게 엄마는 애착과 분리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중의 대상이다. 그야말로 사랑과 애착의 대상이면서, 영원히 저 엄마에게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공포와 불안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보이는 반항은 어찌 보면 자신이 자기 욕망의 주체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저 양가감정의 어느 한 쪽의 표현일 것이다. 저 이중대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란 존재에 대해 김석이 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유아는 어머니와 완전한 결합 상태로 있다가 점차 자아에 속하지 않는 낯설고 불결한 것을 스스로에게 추방하고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설정하면서 나의 감각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분리의 행위를 아브젝시옹이라 불렀다.그러나 아브젝시옹의 대상인 아브젝트는 분리된 이후로도 유아의 자기 경계를 침범하고 삶을 오염시키려 하는데 주체는 이런 대상에 역거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크리스테바가 말한 아브젝트를 우리는 라캉이 명명한 '남근을 가진 어머니'개념과 연관시켜 주체를 위협하는 죽음의 형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남근을 가진 어머니는 거세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의 형상인 아버지에 메이지 않는 완벽한 존재이다. 거세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핍을 모르며 아버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남근 가진 어머니'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버지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기에 아이를 절대적으로 사랑하려 한다. (위의 책, 174쪽)
요즘 교육열에 불타는 교육엄마들은 남근을 가진 어머니로 존재할 확률이 높다. 요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너무나 힘들다고 고통을 호소한다. 아이들 모습이 엄마들이 자랄 때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이가 변했다기 보다는, 엄마들이 변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아이들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당연히 ‘남근 가진 아버지’의 형상으로 작동하는 엄마가 아이들이 자기 욕망의 주체로 살아가는 삶을 위협하는 죽음의 형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들에게 엄마는 안전기지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백희나의 그림책은 아이들이 엄마와 분리되어 주체로 커가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 필요한 서사일 것이다.
엄마를 욕망하는 시기를 지나,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가는 시기, 욕망하면서도 혐오하는 이중의 대상인 엄마, 가뜩이나 모성의 신화를 믿고 강압적으로 덤벼드는 교육엄마라고 한다면 아이들이 엄마와 즐거운 정신 놀이를 즐기기는 상당히 힘들 것이다.
잔혹동시가 왜 나왔는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판타지 동화에서 왜 부모들이 부재하는 주인공들이 주류를 이루는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부모가 부재하는 이야기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여기에 대한 성찰도 상당히 중요한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문장을 한번 잘 살펴보기 바란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평가하면서 우리는 무시하고 모욕적으로 대할 것을 알면서도 친척에게 어린 해리를 보낸 덤블도어의 무책임성에 놀랄 수 있다. 해리와 친구들을 기숙사에 머물게 하여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대신, 늦은 밤 위험한 호그와트의 주변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놔두는 것도 똑같이 부주의해 보일 수 있다. 미메시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덤블도어나 다른 '긍정적인' 부모들의 행동은 비논리적이지만, 그들은 인물의 발전을 위해서는 물론 플롯 상으로도 (만약 해리가 얌전히 침대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매우 중요하다. 인물의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성장을 이끌기 위해 아동문학 작가는 신체적 혹은 정서적 부재의 형식으로 부모를 영구적인 죽음으로 만들거나해리포터의 부모, 일시적으로 제거해야만 한다. 현실에서 부모나 보호자는 아동의 삶에 아주 중요하지만, 소설 속에서 아동 인물의 발달에서 부모는 거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혹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있다면 이는 아동의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부정해서 독립과 성장을 막는 부정적인 역할이다…. 많은 현대 아동소설에서 부모는 골칫거리로 자녀의 요구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즉 이들은 정서적으로 부재한 것이다.─ 마리아 니콜라예바, 「동문학의 미학적 접근」, 교문사, 2009, 104~105쪽
판타지 동화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고립된 자리에 서 있다. 『해리포터』도 그렇고, 『어스시의 마법사』도 그렇고, 『사자왕 형제의 모험』도 그렇고. 대개 부모가 부재하다.
작품을 쓴다는 것은 매우 진실한 문제여서 작가가 거짓으로 연기할 수는 없다. 부모가 부재한 캐릭터를 캐스팅해서 그 주인공과 유머러스하게 연민에 갇히지 않고 판타지 여행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 자신이 모성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감동을 주는 판타지 동화가 나오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혈연 가족에서 구성되는 가족으로 가족의 개념이 바뀌어가는 세상에서, 부모가 부재하는 판타지 동화의 주인공들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크다.
한 인간이 진정으로 남성지배질서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기 욕망의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부모로부터 떨어지는 상징적 고아의 체험을 겪어내야만 할 것이다. 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부모가 죽거나, 부모를 죽이거나 하는 꿈을 꾸면 대단히 축하를 해 준다고 한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을 했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 잔혹동시를 썼다고 비판받고 있는 아이는 이미 자신의 내면에서 부모를 죽이는 일종의 백일몽과 같은 꿈을 꾼 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엄마를 부정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아이는 앞서도 말했지만 이데올로기화한 모성의 신화가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 엄마와 영혼의 친구가 되어 새롭게 놀 수 있는 마음 바탕을 간절히 바란 것이 아닐까. 부모로부터 상징적 고립을 스스로 선택하는 판타지 동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닐까.
답은 없다. 문학은 답을 찾아가는 계몽의 도구가 아니다. 문학은 오히려 답이 없는 존재의 내면에 들어있는 이중적이고 다층적이고 정의될 수 없고 선악을 뛰어넘는 욕망의 문제에 직면하여 살아가는 다양한 캐릭터를 발견하여 질문을 던지는 정신 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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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주최 측에서 안내해준 병관이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토론 자리에서 질문이 나온다면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해 보겠다.
여성주의와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한 토론에서 논의를 좀더 풍요롭고 확산시키기 위해서 아래 두 작품을 토론에 참여하는 분들은 참고로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엄청나게 시끄러운 폴레케 이야기』와 『내 친구 윈딕시』케이트 디카밀로 지음, 이 두 작품을 상호텍스트성의 자리에서 앞에 예로 든 작품들과 같이 읽어본다면 토론이 좀 더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