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뒤에 나오는 관점들은 아주 개인적인 것임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고 싶다. 또한 본인은 여성청소년 독자이기에 실제로 동화를 보며 느꼈던 다양한 불편함들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말씀드린다.
어릴 적 나의 동화에 대한 의문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그 노래로부터 시작되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 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초등학교 저학년의 나는 그 학교 도서실에 있는 동화책의 내용을 다 외울 정도로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어린이였는데, 지금이야 너무 편중된 시각의 책들만 읽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곤 하지만 그 때는 장르의 구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냥 ‘있으면 읽는’ 독서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흥얼거리듯 부른 저 노래를 들은 순간 정말 사소한 의문이 들었다. 신데렐라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왜 죄다 여성일까? 신데렐라를 구원해준 사람은 왜 남성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중학교 1학년 때 ‘여성주의’를 처음 접하며 해소되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콩쥐팥쥐』 등 숱하게 읽었던 명작 동화들의 여성혐오적인 공통점을 찾은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살펴보자. 신데렐라는 착하고 고분고분하며 수동적인 여성이다. 부당하게 박해받지만, 한 번도 직접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신데렐라를 괴롭히는 인물 또한 여성이다. 계모와 언니들은 신데렐라를 괴롭히고, 파티에 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결국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을 받은 후 몰래 파티에 나가 왕자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여성 인물은 성녀 아니면 악녀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가지가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 즉 어린이들은 여기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아주 짧게 등장하는 ‘친아버지’의 존재 말이다. 동화 속에서 친아버지의 양육에 대한 책임은 어디로 갔을까? 신데렐라가 아동학대를 당하는 동안,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이야기는 그러한 의문을 가질만한 틈을 주지 않는다. 이렇듯, 옛날 명작 동화들은 올바른 가치관 형성보다는 왜곡된 여성상을 심어 주는 데에 더욱 일조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어린이들에게 지나치리만큼 ‘착할 것’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옛날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화 『바리데기』를 읽어 보면 이러한 부분이 아주 잘 드러난다. 바리데기는 여아라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인 왕을 구하기 위해 불사약을 찾아 저승으로 떠났다. 바리데기가 버려진 맥락은 현대의 여아 낙태 문제와도 맞닿아있는 부분이건만, 이야기는 이에 대한 적절한 비판 없이 마무리된다. 바리데기가 부모를 향해 항의한다거나, 자신을 버린 이유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장면 따위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동화 속 바리데기는 ‘착하고 효심 넘치는 아이’로서만 소비되었다. 이러한 류의 동화는 하나가 아니다. 줄거리묘사조차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모두가 알고 있는 동화 『심청전』 또한 그렇다. 이러한 동화들은 ‘늙고 병든 아버지’와 ‘효심 넘치는 어린 딸’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식은 그저 착하고, 수동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옛날부터 존재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화라고 해도, 현대에서까지 그러한 장면들이 비판 없이 소비된다는 것은 큰 문제 아닐까.
당장 아무 동화책이나 펼쳐서 읽어보자. 책 속 어른들이 어린이, 또는 청소년에게 존댓말로 이야기하는 장면은 얼마나 될까?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당연히’ 반말을 사용하며. 어린이들은 어른에게 ‘당연히’ 존댓말을 한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유교에 뿌리를 두었다는 이유로, 어른이 어린이에게 반말을 사용하고 어린이가 어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라고 이야기라고 믿는다. 언어는 그 관계 속 위계들을 명확하게 나타내어 준다. ‘존댓말’의 다른 예시를 보자.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후배가 선배에게. 또는 가정 내에서 아내만 남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렇다면 ‘나이에 따른 위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나이 또한 성별, 인종, 국적, 피부색, 장애,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정체성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사회적 소수자이며, 이러한 위계를 당연시 하는 것은 일종의 차별인 것이다.
나이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 뒤에 가장 먼저 따라 나오는 것은 “예민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이주의를 기저에 둔 차별은 어쩌면 가장 예민해야 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서로 존댓말을 쓰고, 상호 합의하에 말을 놓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예의 아닐까. 사회에 나온 이후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듯 말이다. 동화는 이러한 부분을 더 예민하게 다룰 할 필요가 있다. 언어가 가지는 위계를 경계하고, 비판한다면 그 동화를 읽고 자란 세대는 조금 더 평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나의 성적지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체화가 끝나고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다양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연애지향에 관한 정보가 지금보다 많이 제공되었다면 조금 더 일찍 나에 대해 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예시조차 들 필요 없을 만큼 수많은 동화들을 보자. 어릴 때의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자연스럽게 책을 통해 많은 것을 학습했다. 하지만 그 어떤 동화도 나에게 ‘여성이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다’던가, ‘성별은 사회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해볼 수 있는 한 개인의 정체성이다’ 같은 정보들을 전달해 주지는 못했다. 동화에 젠더퀴어 어린이가 등장하고, 성적지향에 대한 고민을 하는 이야기가 보편적으로 어린이들 사이에서 읽히기 시작한다면 어린이,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고민도 조금 더 빨리 해결되지 않을까.
실제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에서 실시했던 『청소년 트렌스젠더, 젠더퀴어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대해 초등학교 입학 이전~7세부터 고민했다는 응답이 8%, 초등학교 저학년8~10세 6%, 초등학교 고학년11~13세 17%*로 결코 낮지 않은 비율임을 알 수 있다. 동화를 가장 많이 접하는 나잇대부터 고민을 시작하는 어린이 퀴어들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에게 ‘동화’가 주는 이미지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 많은 고민과 목소리들을 통해 만들어진 동화를 접하기 전에, 동화를 읽을 시기가 훌쩍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동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이번 독서축제는 잊고 살았던 동화들을 다시금 접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 십대섹슈얼리티 인권모임, 『청소년 트렌스젠더, 젠더퀴어 설문조사』, 2014, 자료집 9쪽
『손톱 깨물기』와 『집 안 치우기』를 보며 아쉬웠던 점은 두 동화 모두 부모가 가하는 폭력을 너무나 가볍게 다뤘다는 것이다. 『손톱 깨물기』에서 엄마는 누나를 따라 손톱을 깨무는 병관이의 손을 찰싹 때린다. 『집 안 치우기』에서는 “엄마 말을 듣지 않을 거면 나가서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말했다. 동화에서는 두 경우 모두 상당히 가볍고 훈육과정에서의 당연한 일로 묘사되었지만, 부모자식 간에는 나이에 따른 위계가 존재하는 만큼 사소한 신체적 폭력도 큰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나가 살아라’는 이야기는 ‘집’을 ‘부모의 공간, 부모가 모두 통제하는 공간’으로 인식할 위험이 크다. 실제로 나는 부모로부터 ‘내게 거슬리는 행동을 할 거면 나가라’, ‘이곳은 내 집이기 때문에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서 살던가 해라.’라는 등의 언어폭력을 겪었고, 때문에 부모와 사는 이 집을 한 번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 나의 공간이라고 인식할 수 없었다. 경제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하는 어린이가 이런 말들 하나하나에 불안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 해당 수위 정도의 폭력이 가정 내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나, 이것이 잘못된 일이며 명백한 폭력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넘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항상 동화를 보며 들었던 의문이 있다. ‘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을 정리하는 건 모두 엄마일까?’ 앞선 두 작품 『손톱 깨물기』와 『집 안 치우기』의 경우도 그랬다. 병관이와 지원이는 부모와 함께 살지만, 여성인 어머니가 자연스레 아이들의 육아와 가사노동을 담당한다. 『이상한 엄마』를 보며 이러한 의문은 더욱 확고해졌다. 아픈 어린이를 챙기는 것은 당연히 여자의 일인가? 심지어 작품 속에서 호호 엄마를 도와주는 존재도 같은 여성인 ‘이상한 엄마’였다. 남성 또한 마땅히 가져야 할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한 책임은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내용이 사회보편적인 모습을 반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5 일·가정 양립 지표』에 따르면 맞벌이 가정 기준 가사노동을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고 대답한 경우가 무려 80.5%*로, 아직까지도 여성이 가사를 전적으로 떠안는 사회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이 그럴수록 창작물에서 그 부분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에게도 육아 및 가사의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여성이 모든 가사노동을 전담하거나 주도하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제대로 짚고 넘어간다면 어린이들의 가치관 형성은 물론 사회 전반적인 인식의 변화에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 통계청, 『2015 일·가정 양립 지표』, 2015
나는 『마당을 나온 암탉』의 첫 이야기 제목을 좋아했다. ‘알을 낳지 않겠어!’ 『마당을 나온 암탉』을 처음 봤을 때, 그 한 문장은 내게 정말 큰 선언처럼 다가왔다. 암탉이 알을 낳지 않는다니? 주인공 ‘잎싹’은 양계장의 난종용 암탉이다. 잎싹에게 알을 낳는 행위는 마냥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이 아닌, 고통스러운 착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장을 넘기자마자 의문이 일었다. 잎싹은 왜 알을 낳는 행위는 그토록 싫어하면서 병아리의 부화를 보고 싶어 할까? 한동안은 이 부분을 오랫동안 곱씹으며 고민했던 것 같다. 이것 또한 일종의 모성애에 대한 숭배 아닐까?
그렇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난 뒤의 감상은 달랐다. 나는 이 책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을 다뤘다고 생각한다. 양계장의 난종용 암탉들은 알을 낳지 않을 권리도, 병아리를 부화시킬 권리도 없다. 그저 주인을 위해 기계적으로 부화하지 못하는 알을 낳을 뿐이다. 잎싹은 병아리의 부화를 보고 싶어 했지만, 잎싹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사회 취약계층 여성이 가져야만 하는 삶의 불안 또한 잘 드러난다.
헛간에서의 잎싹의 자리는 따듯한 짚덤불도, 문 쪽 가장자리도 아니었다. 청둥오리의 자리보다도 더 바깥쪽. 그곳이 잎싹이 하루를 머물러야 할 곳이다. 잎싹은 그것을 자연스레 학습한다. ‘따듯해 보이는 짚덤불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암탉이 마당이나 헛간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타고난 계급에 대한 도전이자 사회의 지배 질서를 무너트리는 일이었다. 문지기 개는 이렇게 말한다. “암탉이지만 서로 달라. 그걸 모른단 말이야? 내가 문지기로 살아야 하고, 수탉이 아침을 알리는 게 당연한 것처럼 너는 본래 닭장에서 알을 낳게 되어 있었잖아. 마당이 아니라 닭장에서! 그게 바로 규칙이라고!” 암탉은 마당을 나와 발톱이 아프도록 땅을 파헤치며 비로소 이런 생각을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마당을 떠나고 싶어!’ 암탉이 비로소 그 체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 것이다.
가정 내에서의 위계 또한 찾아볼 수 있다. 청둥오리와 잎싹이 헛간에 들어왔을 때, 수탉은 ‘헛간의 우두머리는 나’라고 못 박으며 잎싹에게 새벽을 알리는 즉시 떠날 것을 요구한다. 수탉과 암탉 사이에는 명백한 위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는 가정 내에서 가장, 즉 남성이 가지는 권력과 매우 흡사하다. 헛간에서는 수탉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으며, 잎싹은 가장 마지막으로 헛간에 발을 들인다.
잎싹과 청둥오리의 관계는 정말로 흥미로웠다. 둘은 서로에게 존중과 신뢰를 품고 있다. 나는 아직도 동화 속 청둥오리가 해준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러면 된 거야. 우리는 다르게 생겨서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어. 나는 너를 존경해.” 또 한 가지 의미 있는 지점은 이야기 속 잎싹이 마냥 나약하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청둥오리가 잎싹에게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전형적인 데이트폭력을 연상시킨다. 청둥오리의 행동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간 것도 아니었다. 청둥오리가 잎싹을 일방적으로 지켜주게 되는 구도 또한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앞으로 발간될 동화들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어릴 적 나는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위로받는 아이였다. 그 때의 내가 읽었던 책들이 ‘당신이 여성이어도, 어린이여도, 성소수자여도, 이혼가정의 자녀라도, 뚱뚱해도, 그래도 괜찮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것들을 이유로 당신을 차별한다면, 그건 부당한 일입니다.’라고 말해줬다면, 막연히 나 스스로를 비난하는 대신 사회의 모습을 조금 더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지 않았을까. 언젠가, 모든 소수자 어린이들이 동화를 보며 사소한 불편함 대신 포근한 위로를 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