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곳곳에 포진되어 있던 기자들의 시선이 내 차로 향했다. 그들은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다급해진 나는 엑셀을 밟던 발에 힘을 주었고, 차는 빠르게 후진을 하며 반원을 그렸다. 차를 정지시키지도 않은 채, 기어를 후진에서 드라이버로 바꾸었다. 차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앞으로 튕겨지듯 나갔고, 난 슬쩍 눈을 치켜들어 룸미러를 봤다. 몇몇의 기자들이 자신의 차에 올라타는 장면이 보였다. 단지에서 빠져나온 나는 재빨리 도로로 진입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번 엑셀에 힘을 주자마자 RPM 수치가 급속도로 올라갔고 난 새벽녘 자유로에서나 낼 수 있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열두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에는 차들이 몇 대 보이지 않았다. 룸미러와 백미러를 번갈아 바라보며 뒤에 따라오는 차들을 요리조리 피했다. 내가 차선을 변경하면 그들도 얼마 후 그대로 뒤쫓아왔고, 내가 속도를 올리면 그들도 지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는 등한 굉음과 함께 평소에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속도에 차체마저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액션 영화를 찍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내가 스파이들에게 쫒기는 비밀 요원이 된 듯도 했다.
이백 미터 금방 앞 사거리에서는 직진 신호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수년 간 이 길을 다녀본 나는 저 신호가 곧 좌회전 신호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좌측 깜빡이를 켜다가 문득, 내 뒤를 따르는 저들에게 내 행적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 교란작전을 펼쳐야겠다는 스스로도 기특한 생각을 하고서는 우회전 깜빡이를 켰다. 재빨리 3차선에서 1차선으로 옮긴 난 일직선으로 뻥 뚫린 길을 달리며 미끄러지듯 좌회전을 했다. 금세 신호가 바뀌었고 룸미러를 통해 좌회전 신호를 받지 못한 채 우측에서 오는 차와 맞물려 정지해 있는 차 몇 대가 보였다. 지금 현재 나를 따라오고 있는 차는 세 대 정도 되는 듯했다. 지금 위치에서 대한병원까지는 약 이십 분이 더 소요된다. 이런 식으로 잘만 한다면 저 두 차도 따돌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절대 내 목적지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애써 도착한 병원에서 저들의 취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병원에 포진되어 있는 기자들도 이들에게 합류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병원 안으로 몰래 들어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진다. 그들을 따돌리며 운전을 하자 ‘마지막 만찬’ 이라는 제목의 다이애나 기사가 떠올랐다.
도디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다이애나는 호텔에서 주로 도디와 만나 밀회를 즐겼다고 한다. 여름휴가 당시 파파라치들에게 노출되어 언론에 자신들의 사진이 나간 이후, 다이애나는 바깥에서 도디와 만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운명의 8월 30일. 두 사람은 리츠호텔에서 식사를 했고, 식사가 나오기 전 와인을 마시며 사랑을 속삭이던 도디는 다이애나에게 다이아 반지를 끼워 주었다. 다이애나는 그에 미소로 답했다고 한다.
“내 아파트로 갔다가 런던으로 가는 게 좋겠소.”
“밖에 파파라치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을 텐데요.”
다이애나는 파파라치들이 따라붙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 호텔에 그냥 머물기 바랐지만 도디는 자신이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았다면서 걱정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호텔에서 나온 그들은 생 트로페즈에서 파리까지 파파라치들을 용케 따돌렸다. 도디는 호텔 전속 운전기사들을 불러 ‘리무진을 몰고 루브르 박물관 쪽으로 달려라’, ‘호텔 VIP 전용차를 몰고 그 뒤를 따라가다가 개선문을 달려 파파라치들을 따돌려라’ 등등의 미션을 주었다. 도디의 운전사였던 장의 얼굴은 파파라치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속임을 하기 위해 도디와 다이애나는 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지 않고 대신 도디의 경호원인 폴에게 운전을 시켰다.
이런 치밀한 계획을 끝내고 다이애나와 도디로 변장한 남녀 한 쌍이 계획된 차에 올라타고는 십 분 간격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파파라치들은 가짜는 쫓지 않고 진짜 다이애나와 도디가 탄 차를 끈질기게 추격했다. 그들이 자신의 예상을 전혀 빗나간 채 바로 뒤에 따라붙자 도디는 폴에게 알마교를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폴은 오토바이를 탄 채 쫓아오고 있는 파파라치들을 따돌리기 위해 전속력을 냈다. 지금의 나처럼. 그들이 탄 차는 센느 강 북쪽 강변로를 빠르게 달렸고, 알마교 바로 앞 교차로의 터널로 접어들었다. 자동차는 지하차도 안에서 급하게 회전을 하며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을 냈고, 다이애나는 그 순간 도디의 가슴으로 쓰러졌다. 곧 자동차는 차도 벽을 들이박고 폭발해버렸다. 지하차도 안은 금세 연기와 먼지로 가득 찼다. 그들에게 파파라치들이 다가왔다. 하지만 파파라치들은 다이애나와 도디를 구할 생각은 않고 사진 찍기에만 바빴다고 한다. 뒤이어 따라온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그런 파파라치들에게서 사진기를 빼앗았다. 곧, 경찰이 도착했다. 도디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다이애나는 응급실로 급히 후송되었다. 그녀는 두 시간 만에 “날 홀로 내버려둬요”라는 말을 남기고는 숨을 거두었다. 20세기 마지막 신데렐라였던 다이애나의 삼십육 년 삶은 엘튼 존의 노래 가사처럼 그렇게 살다가 끝나버렸다.
백미러를 흘깃 보니 나를 따라오던 차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듯했다. 끝까지 밟고 있던 엑셀에서 살짝 힘을 떼곤 약간 속력을 줄였다. 이제야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느껴지고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하긴, 이렇게 속력을 내본 적이 없었다. 아니, 평범한 인생이라면 누군가에게 쫓겨 영화의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는 듯한 운전을 해볼 일이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멀지 않은 곳에서 대한병원의 대형 간판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고, 가서 유상현을 만난다면 어떠한 이야기를 어떻게 무엇부터 해야 할지도 고민이 됐다. 아니, 그전에 유상현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어서 빨리 병원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백미러에 방금 전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던 차 한 대가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그 차의 크기는 커져만 갔다. 순간적으로 속력을 높인 나는 다시 한 번 전속력을 냈다. 하지만 상대의 속력이 점차 빨라지며 곧 내 차를 따라잡을 것만 같았다. 이제 병원이 약 일 킬로미터도 남지 않았을 텐데 여기서 따라잡히는 건 억울했다.
마침 바로 앞에서 좌회전 신호가 노란 불로 바뀌었다. 난 숨을 죽이고는 RPM을 최고치로 높이며 핸들을 좌측으로 꺾었다. 차가 미끄러지듯 좌회전을 하는데 맞은편에서 신호를 받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가 나와 점점 가까워졌다. 눈앞에 그 차의 헤드라인이 비춰졌고, 연신 빵빵대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의 속력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저 앞에 달려오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는 아마 도디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이 분명했다. 맞은편 차에 타고 있던 사람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핸들을 최대한 끝까지 좌측으로 꺾었다. 바퀴에서 나는 굉음이 들리는 동시에 내 눈 앞에 가드레일이 점차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살아왔던 일들이 정말이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흑백으로.
다이애나의 죽음으로 식음을 전폐했다는 엘튼 존이 다이애나의 추모식 때 ‘제 오랜 벗인 그녀를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하늘에서는 부디 자유롭게 행복하기를…’이라고 말한 후 부른 노래가 생각났다.
영국의 장미여, 안녕.
당신은 우리 마음에 영원히 피어날 겁니다.
당신은 생명이 갈가리 찢긴 곳에 놓인 우아함 그 자체였습니다.
당신은 우리 조국을 소리쳐 구해냈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속삭여주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천국에 계시고
별들은 당신의 이름을 수놓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람 속의 촛불처럼 사라졌습니다.
비가 몰려와도 해가 저물어도 꺼지지 않는
당신의 발은 항상 여기에 머물 것입니다.
영국의 촛불은 오래전에 꺼졌으나
당신의 전설은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스러움.
당신의 미소가 없는 날들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 횃불을 계속 운반해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황금빛 아이를 위해.
우리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진실은 우리를 눈물 속으로 데려갑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당신이 가져다준 기쁨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영국의 장미여, 안녕.
당신의 영혼을 잃은 이 땅에서 우리는 당신의 연민의 날개들을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리워할 것입니다.
난 그녀처럼 한 나라의 왕비도 아니었고, 자선단체에 기부를 한 일도 없고, 테레사 수녀 같은 훌륭한 분을 만나지도, 사랑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이런 노래를 만들어줄 친구도 없다. 아니, 그 변태 같은 변태지 놈이 내 장례식에 와서,
“제 오랜 연인이자 벗인 이현이를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옷을 디자인했습니다. 관에 함께 넣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며 뻔뻔하게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평소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도 장례식 때 와서는 ‘정말 세상 사람들 눈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와 난 각별한 사이였어요’라고 하듯 강윤지도 그렇게 말한다면?
가드레일을 받는 그 짧은 순간에 내 머릿속은 많은 걸 예상하고 그렸다. 죽음의 순간 앞에 서는 시간의 길이 따위는 사라지나 보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난 의식을 잃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