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영원히 이렇게 모르는 척 사는 게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유상현 씨도 저도 공인이니까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엄두도 못 냈죠. 그리고 그게 그 아이에게도 좋겠다고 생각했고. 근데 애써 피해왔던, 외면했던 그 아이의 소식을 듣게 되고 성장한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후부터 밤에 잠을 들 수가 없었어요. 내 모든 걸 버리고서라도 그들을 원한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면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들 옆으로 가고 싶다고… 더 이상은 그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촉촉이 젖어 있던 그녀의 왼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볼과 입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테이블 위로 똑 떨어졌다. 모두 다 숨을 죽이고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지은서를 이해한다.’ 물론 나도 제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니 지금 내 입장에서조차도 그녀의 그런 모습에 안타까움과 동정을 느꼈다.
“그럼, 최근 난 유상현 씨의 열애설은 알고 계셨나요?”
맨 앞줄 오른쪽에 앉아 있던 여 기자 하나가 정적을 깨고 질문을 던졌고 그 순간, 나와 태이는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한 번 마주봤다 다시 급하게 시선을 티비로 돌렸다. 지은서의 도톰한 입술이 열리는 찰나 나와 태이는 동시에 꿀꺽 침을 삼켰다.
“네. 그 여자분도 만나봤어요. 그분 저에게 지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유상현의 마음은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그때 포기할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녀가 유상현과의 만남을 계획했다는 것, 유상현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땀이 날 정도로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기자회견 내부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녀에게 ‘왜 아이를 숨겼냐’, ‘이제 와서 왜 그러냐’라는 종류의 질문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나와 유상현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그 질문들에 그녀는 교묘하게 나를 나쁜 여자로 몰고 갔다. 이 기자회견만 봐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승리. 백이현 패배. 스르륵,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고, 태이는 ‘뭐, 저런 게 다 있냐’며 성을 내고는 티비 전원을 껐다.
그날 밤, 노트북을 배 위에 올려놓고 온갖 포털 사이트에 도배되다시피 한 나를 향한 악플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조차도 처음 보는 나의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를 잘 안다는 고등학교 친구는 엄마 아빠까지 싸잡아 욕하고 있었고, 나와 친했다는 또 다른 여자는 나를 원래 욕심 많고 허영에 차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상현의 팬이라는 사람은 다음의 아고라에 나에 대한 자살 청원까지 올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사회에서 매장을 시킬 수 있구나. 그리고 이 안에서 이 일을 조장하는 하나의 일원으로 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사실 두어 달이 지나고, 또 다른 사건이 터지면 나를 비난하던 누군가는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비난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 내 이름쯤은 유상현, 지은서와 사이에 낀 여자?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타들이 사건이 터지면 휴식 겸 해외로 오랜 기간 머무르기도 한다. 아마 그것이 지은서가 바라던 바일 것이다. 강윤지는 이미 이 사건으로 커다란 이익을 챙겼을 것이고, 변태지는 강윤지나 지은서에게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었을 것이다. 내가 소리 소문 없이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패배를 인정하는 것. 그것은 분명 지은서만이 바라는 바였다. 절대 그렇게 바보처럼 당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은서에게 대응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제가 바로 백이현입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구구절절한 내 사연을 이야기하는 글을 써 네이트톡이나, 미즈넷, 디시인사이드 등등에 올려봤자 네티즌의 비난은 더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 괜히 찔리는 게 있으니까 변명하는 거라는 식으로 해석돼서 여론은 더 들끓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유상현과 연락도 되지 않은 이 상태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유상현에 대한 비난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각종 기사 밑에 지금껏 그렇게 깔끔한 이미지로 자기 아이와 자기 아이를 낳아준 여자를 외면하고 뻔뻔하게도 살았다느니, 자기를 좋아해주는 팬들을 속였다느니, 이번 사건으로 정이 훅 떨어졌다느니, 지은서만 불쌍하다는 등등의 댓글들이 빗발쳤다. 그리고 그에 만만치 않게 유상현과 지은서의 숨겨진 아들을 궁금해 하고 추측하는 글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씁쓸히 한숨을 내쉬며 창을 하나씩 껐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유상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의 전화는 여전히 삼십 초 만에 끊겨버렸다. 마지막 창을 닫는 순간 화면 우측 상단에 수시로 변하는 실시간 검색어에 ‘유상현 사고’가 반짝거렸다. 검색창에 빠르게 ‘유상현 사고’를 치자마자 최신 순으로 기사가 주르르 떴다. 재빨리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유상현 갑작스레 쓰러져 대한병원으로 이송 중.
스트레스 때문인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진 유상현.
난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배 위에 올려놓았던 노트북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 쪼그리고 앉아 핸드백 안에서 차 키를 찾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차 키가 손에 쥐어졌지만 그때야 깨달았다. 그날 난 태이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는 것을. 그러니까, 내 차는 우리 집 주차장에 있었다. 택시를 잡을 생각으로 급하게 도로로 뛰어나가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내 앞에 끼익 소리를 내며 섰다. 그 때문에 한층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들어 보니 누군가가 헬멧을 벗고 있었고 곧, 환이의 얼굴이 보였다.
“누나 어디가요?”
라고 묻는 환이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성큼 내 앞에 다가와 오른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왜 그래요? 얼굴이 뜨거워.”
“환아. 나 잠시 우리 집 앞으로 데려다줄래?”
“왜요? 지금 집 앞에 기자들 많을 텐데?”
“나 차만 가지러 가게.”
“어디가게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대한 병원. 지금 상현 씨가 쓰러졌대. 빨리!’라는 말을 꺼내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환에게 유상현의 사고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환이와 함께 그곳에 갈 수는 없었다. 운이 좋더라도 기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유상현이 입원해 있는 병실에 가는 것은 아마 불가능 할 것이다. 그리고 남다른 촉을 가지고 있는 기자들은 환이를 보는 순간 한 가지를 떠올릴 것이다. ‘유상현의 숨겨진 아이.’ 이미 환이 유상현의 조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기자도 있을 테고, 그럼 그 기자는 사실 확인을 거치지도 않은 채 ‘알고 보니 유상현의 훈남 조카가 유상현의 숨겨진 아이?’라는 식의 기사를 실시간으로 낼 것이다. 환이를 그런 상황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유상현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내 차로 내가 갈게. 집 앞까지만 데려다줘.”
나의 단호한 표정과 말투에 고개를 끄덕인 환이는 뒷좌석 수납함을 열더니 보조 헬멧을 꺼내 내 머리에 씌워주었다. 환이가 하라는 대로 그의 허리에 양팔을 두르자마자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출발했다. 그 바람에 환의 허리에 두른 내 손의 힘이 더욱 세졌다. 병원 앞에서 기자들과 대면하게 되더라도 난 일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난 일단 유상현을 만날 것이다. 내가 미안해 해야 하는 건 지은서도, 강윤지도, 변태지도, 유상현과 지은서의 팬이라며 날 힐난하는 네티즌도 아닌 유상현과 바로… 환이었다. 집 가까이에서 오토바이를 멈추게 한 난 오토바이에 내려 헬멧을 환이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환이의 곱실거리는 머리칼을 쓰윽 쓰다듬은 후 ‘고마워’라고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환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고 난 씨익 웃으며 ‘전화할게’라고 답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주차장으로 달렸다. 이상하게 환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만약 유상현과의 만남이 오늘로써 끝이 난다면 내가 다시 환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집 앞에는 역시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듬성듬성 내가 아는 기자들도 눈에 띄었다. 불행히 내 차 근처에서 나와 몇 번 안면이 있는 기자가 쭈그리고 앉아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급하게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선 당당히 차 쪽으로 다가가 조용히 차 문을 열었다. 슬쩍 전화 통화를 하는 기자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날 알아보지 못 하는 듯 고개만을 갸우뚱거렸다. 아예 뻔뻔하게 ‘아, 무슨 일 있나 봐요?’라고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다행히 차 문에 올라탈 때까지도 그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나를 바라보았다. 시동을 걸고 찬찬히 후진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찰나! 쭈그리고 앉아 있던 기자의 찌푸리던 인상이 풀리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 백이현이다! 저 노란색 풍뎅이차! 그래, 백이현이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