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소개되는 <타임캡슐 단편>은 톨스토이의 「아시리아 왕 아사르하돈」입니다. 프랑스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은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과 「아시리아 왕 아사르하돈」이 '경전의 반열'에 올릴 만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 편집자
아시리아 왕 아사르하돈은 라이레 왕의 영토를 정복하여 거리라는 거리는 모두 파괴하고, 또 불질러 버렸다. 그러고 나서 주민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자기 영토로 끌고 와, 군인들은 모두 죽이고 라이레 왕은 옥에 가두고 말았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간 아사르하돈 왕은 라이레 왕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눈을 떠보았더니, 길고도 하얀 턱수염을 기른 선량한 눈매의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당신은 라이레를 벌하려고 하는군요?” 하고 노인이 물었다.
“그렇소.” 왕이 대답했다. “다만 나는 어떤 형벌로 그를 벌하면 좋을까, 그 방법만 생각해 내지 못했을 뿐이오.”
“그럴 테죠. 라이레는 바로 당신이니까” 하고 노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소.” 왕은 말했다. “나는 나고 라이레는 라이레요!”
“당신과 라이레는 한 사람이오!” 노인은 말했다. “당신은 라이레가 아니고, 라이레는 당신이 아니라는 것은, 단지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오.”
“어째서 그렇다는 거요?” 왕이 말했다. “나는 이와 같이 부드러운 잠자리에 누워 있고, 내 주위에는 충실한 남녀 노예들이 대령하고 있소. 그리고 나는 내일도 오늘처럼 많은 친구들과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것이지만, 라이레는 지금 새처럼 옥에 앉아 있고, 내일이면 혀를 늘어뜨리고 칼에 찔려서 숨이 넘어갈 때까지 헐떡거릴 것이오. 그리고 그 몸은 개들에게 물어뜯기게 될 것이고.”
“그러나 당신은 그의 생명을 멸망시킬 수는 없을 것이오.” 노인은 말했다.
“그럼, 어떻게 내가 1만 4천 명이 넘는 그의 군사를 죽였단 말이오? 그리고 어떻게 그 시체로써 무덤을 쌓아올릴 수가 있었겠소?” 하고 왕이 말했다. “나는 살아 있지만, 그들은 죽어 버렸소. 그걸 보아도 나는 생명을 멸망시킨 게 아니겠소?”
“그들이 죽어 없어졌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소?”
“그건 내가 그들을 볼 수 없기 때문이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은 괴로워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소. 그들은 고통을 받았지만, 나는 편안했었다, 이 말이오.”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것에 불과하오.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자신을 괴롭힌 것이오. 그들을 괴롭힌 게 아니오.”
“모르겠는데, 무슨 소리인지…?” 하고 왕이 말했다.
“알고 싶소?”
“물론이오.”
“그럼 이리 오시오.”
노인은 왕에게 물이 가득 들어 있는 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왕은 일어나서 물통이 있는 데로 갔다.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시오.”
아사르하돈은 노인이 명하는 대로 따랐다.
“자, 내가 당신에게 이 물을 끼얹기 시작하면” 노인은 자루가 달린 그릇으로 물을 퍼올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머리부터 물에 잠길 것이오.”
노인은 물을 담은 그릇을 왕의 머리 위에서 기울였다. 왕은 물속에 잠겼다.
아사르하돈 왕은 물에 잠기자마자 이미 자기는 아사르하돈이 아니고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를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면서, 그는 호화로운 침대 위에 아름다운 여자와 나란히 누워 있는 자기를 보았다. 그는 그 여자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자기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남편 라이레여, 당신은 어제의 노동에 지쳐서 보통 때보다 오래 쉬셨습니다. 당신이 곤히 잠든 것을 보고 제가 깨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대신들이 대청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옷을 입으시고 그들 앞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아사르하돈 왕은 이런 말을 듣자 자기가 라이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조금도 놀랍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는 일어나서 옷을 입고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청으로 나아갔다.
대신들은 이마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절하면서 자기들의 라이레 왕을 맞이했다. 그 다음에는 모두 일어나 그의 지시대로 그 앞에 앉았다. 그때 호족들의 우두머리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즉 그들은 악덕한 아사르하돈 왕의 여러 가지 모욕을 견딜 수 없어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레는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고 아사르하돈에게 간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고 대신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고 난 뒤 그는 신하 몇 사람을 사신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아사르하돈 왕에게 보내는 친서의 내용을 말로 자세하게 일러 주었다.
이런 일을 마치자 아사르하돈은 자기를 라이레라고 계속 생각하면서, 야생나귀를 사냥하러 산으로 출발했다. 사냥은 대성공이었다. 나귀를 두 마리나 쏴서 잡은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친구들을 모아놓고 여자 노예들의 춤을 구경하면서 주연을 베풀었다.
이튿날 그는 평소대로 청원자·피고·원고들이 대기하고 있는 대청으로 나가서, 그에게 제출된 사건을 결재했다. 일을 마치자 그는 또 사냥을 즐기러 나갔다. 이날도 그는 자기 손으로 늙은 암사자를 잡았다. 두 마리의 새끼사자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사냥을 한 뒤 그는 또 친한 친구들과 함께 음악과 춤을 즐기면서 주연을 베풀고, 그리고 밤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지냈다.
이리해서 그는 이전에는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었던, 아사르하돈 왕에게 보냈던 사신들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사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은 코가 잘리고 귀가 끊어져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아사르하돈 왕이 사신들에게 명해서 라이레 왕에게 전달한 내용은, 만일 전에 받은 공물·금·은·측백나무 등을 곧 헌상하고 왕이 직접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배알하지 않으면 사신들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장차 왕에게도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에 아사르하돈이었던 라이레는 또다시 대신들을 모아놓고 자기들이 취할 태도에 대해서 협의했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아사르하돈이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이쪽에서 먼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자고 진언했다. 왕은 이에 동의하고 스스로 군대를 지휘해서 원정길에 올랐다. 행진은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왕은 매일같이 군대를 순회하면서 휘하 장병의 사기를 고무했다. 여드레 안에 그의 군사는 큰 강기슭에 있는 골짜기에서 아사르하돈의 군대와 대결했다. 라이레의 군대는 용감하게 싸웠고, 전에 아사르하돈이었던 라이레도 적이 개미떼처럼 산에서 쏟아져 내려와 골짜기를 메우고 휘하의 군대를 석권하는 것을 보자 이륜마차를 탄 채 전장의 한가운데로 달려들어가 적을 찌르고 또 베었다. 그러나 라이레의 군대는 수백에 지나지 않는 소수였음에 비하여 아사르하돈의 군사는 수천 군사이었기 때문에 라이레는 자기가 부상을 당하고 포로가 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흐레 동안 다른 포로들과 함께 아사르하돈의 군사에게 끌려 갔고, 열흘째는 니네비야에 도착해서 옥에 갇혔다.
라이레는 굶주림이나 상처에 대한 아픔보다도 부끄러움과 무력함에서 오는 노여움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자기를 모든 악에 대해서 보복할 힘이 없는 사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일은 자기의 고통을 보는 기쁨을 적에게 주지 않도록 하자는 것, 바로 그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한마디도 않고 사나이답게 모든 것을 견뎌내리라고 굳게 결심했다.
20일 간 그는 형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면서 옥 안에 갇혀 있었다. 그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형벌을 받으러 끌려가는 것을 보았고, 어떤 사람은 손발이 잘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기도 하는 처형 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불안도, 가엾다는 생각도, 공포도, 그 밖의 어떤 감정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환관들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학대하면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녀가 여자 노예로서 아사르하돈에게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고통도 나타내지 않고 이를 잘 견뎌 냈다.
그러나 얼마 뒤에 두 사람의 형리가 옥문을 열고 가죽끈으로 그의 두 손을 뒤로 묶어 올린 채 피가 흐르고 있는 형장으로 그를 끌고 갔다. 라이레는 지금 막 그 위에서 죽은 자기의 친구 몸에서 빼낸 예리하고 날카로운 피투성이 말뚝을 보았다. 그 말뚝은 자기를 처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겼다. 라이레는 그렇게도 튼튼하고 아름다웠던 자기의 몸이 무척 여윈 것을 보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때 두 형리는 말라빠진 그의 팔을 붙들어 몸을 올려서 그 예리한 말뚝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이제는 죽는구나, 끝이구나!’
라이레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사나이답게 태연하려 했던 결심을 잊어버리고 소리쳐 울면서 도와 달라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확실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는 눈을 뜨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했다. ‘나는 라이레가 아니잖은가? 나는 아사르하돈이다.’ 이렇게 그는 생각했다.
“당신은 라이레란 말이오. 그리고 또 당신은 아사르하돈이기도 하오.”
그는 이렇게 말하는 어떤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야흐로 처형을 하려는 찰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물통으로부터 머리를 들었다. 노인은 그의 머리 위에 물을 부으며 그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오오, 나는 얼마나 무서운 괴로움을 겪었나! 게다가 그렇게 오랜 동안을…”
아사르하돈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길었다고?” 노인이 말했다. “당신은 지금 막 물통에 머리를 댔을 뿐, 곧 다시 고개를 들어 버리지 않았느냐 말이오? 보시오, 이 그릇에 있는 물은 아직도 남아 있소. 이제야 알겠소, 모든 것을?”
아사르하돈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다만 무서움에 떨면서 노인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자, 이젠 알았을 거요.” 노인은 계속 말하는 것이었다. “라이레는 바로 당신이고, 당신이 죽인 그 군사들도 또 역시 당신이라는 것을. 아니 군사들뿐만 아니라, 당신이 사냥을 해서 죽인, 그리고 술자리에서 맛있게 먹은 그 짐승들 또한 당신 자신이었단 말이오. 당신은 생명이라는 것이 오로지 당신 속에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당신으로부터 그 허위를 벗겨 버렸기 때문에 당신은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면서 사실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오. 생명은 만물 속에 오직 하나요. 당신은 다만 이 유일한 생명의 일부분을 자기 속에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오. 그리고 당신은 다만 이 생명의 일부인 자기 안에서만 생명을 좋게 하기도 하고, 또 나쁘게 하기도 하며, 또한 크게 하기도 하고, 조그맣게도 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오.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좋게 하는 것은, 당신으로서는 다만 자기의 생명을 다른 존재로부터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경계를 파괴해서 다른 존재를 자기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이룰 수가 있는 것이오. 다른 존재 속에 있는 생명을 멸하는 것은 당신의 권한이 아니오. 당신 손에 의해서 죽은 존재의 생명은 당신 눈에서는 소멸했어도 결코 멸망해서 없어진 것이 아니오. 당신은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고 남의 생명을 줄이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생명에는 때도 없고 장소도 없소. 생명은 순간이며 찰나요. 그리고 생명은 수천 년이며 수만 년이오. 그리고 당신의 생명은 전세계 모든 사물의 눈에 보이며, 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생명도 평등한 것이오. 생명이란 멸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하나이기 때문이오. 그 외 만물은 다만 우리들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 노인은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아침 아사르하돈 왕은 라이레를 비롯해서 포로 모두를 풀어 주도록 명령하고 처형을 중지해 버렸다.
그 다음 다음 날 그는 자기의 아들 아슈르바니팔을 불러서 그에게 왕국을 물려주고 자기는 새로 깨달은 것을 되씹어 생각하면서 처음엔 황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여러 곳을 순례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거리마다 마을마다 두루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생명은 하나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일러 주면서.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전재. (톨스토이, 동서문화사, 2007)
★ 존 치버에 이어 <타임캡슐 단편>에 소개되는 작가는 톨스토이입니다. 「아시리아 왕 아사르하돈」 다음으로 실릴 톨스토이의 단편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 땅이 필요한가」입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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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1910)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나 카잔대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촌 계몽활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는 1852년 첫 작품 『유년시절』를 발표한 후 주로 <현대인>이란 잡지를 통해 『소년시절』, 『청년시절』, 『카자크 사람들』 등을 발표했다. 이후 투르게네프, 곤챠로프 등 공인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또한 「바보 이반」, 「두 노인」 등 민중소설도 썼으며 종교론, 예술론, 인생론, 희곡 등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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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근식
중앙대 러시아어학과 교수. 중앙대 동북아연구소 소장. 저서로 『아이뜨마또프 작품의 주제발전연구』, 『러시아정교회와 반체제 및 민족주의』, 『뿌쒸낀의 꿈의 분석』, 『한국에서의 뿌쉬낀 연구』 등이 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의 참회/인생의 길』, 『백치』, 『인생이란 무엇인가』, 아이뜨마또프의 『하얀 배』, 아나똘리 김의 『아버지 숲』, 도스또예프스끼 『백치』, 잘리긴의 『위원회』, 부또프의 『곤충들의 천문학』, 마야꼬프스끼의 『미국 발견』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김주영의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등을 러시아어로 옮겼다.
고산
동서문화사 편집인. 동인문학상 운영위원회 집행위원장.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저서로 『고산 삼국지』, 『고산 국어대사전』, 『한국출판100년을 찾아서』, 『新文館 崔南善?講談社 野間淸治. 愛國作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