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회
“…” 여자는 말이 없었다.
“…” 나는 침묵을 지켰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란 공허한 것들뿐이다. 야망, 권력에 대한 집착, 선망, 호색, 오만, 분노, 복수… 우리에게 우리들 자신이란, 몽환과도 같이 덧없는 자기가 전부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어쩌면 여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이전의 야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여자는 이 공허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러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는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
“신부님, 저는 제 남편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응? 여자는 남편의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같았다.
“계속하십시오…”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큰 무역상을 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였죠. 아버지는 가난하지만 훌륭한 남자에게 저를 시집보냈어요. 막대한 재산도 떼주면서… 남편은 오만한 사람이지만 대단한 수재죠. 한국 최고의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자상하다고 할 순 없지만 유능한 능력만으로 저는 충분히 남편에게 만족했습니다. 어느 여자에게서 전화 오는 일이 있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차츰 남편이 바깥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남편에게 여자가 많다는 것도.”
“…”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언젠가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여자들을 자기의 수하에 두려는 사람 같았어요. 권력욕망의 일종이죠.”
“상심이 되었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부가, 아니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 여자들이 상처를 받은 것이지요.”
“…”
여자는 숨을 한번 크게 쉬었다.
“남편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여자를 그냥 두지 않았어요. 자신도 어찌 할 수가 없는 집착 같기도 했지만… 그건 자신의 권력욕을 확인해보는 절차 같기도 했어요. 자기 소유욕 때문에 여자를 꼼짝달싹 못 하게 했으니까. 어떤 경우엔 자기 지위를 이용해 여자를 괴롭히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여자들 대신 제가 남편을 처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예?” 갑자기 목이 막혀왔다.
“남편에게 성추행이나 성폭행당한 여성들이 하나같이 그냥 체념하고 포기하고 있더라구요. 그들을 북돋워주었지요.”
“그 상처를 보듬어주고 위로해주었군요…”
“상처를 더 덧나고 더 깊어지게 해주었습니다.”
“예? 그건 무슨…?”
“그 여성들을 더 자극하고 괴롭히기로 한 것이지요. 여성은 성적인 모욕을 당하면 모욕당한 이유를 자신에게 돌리도록 교육받아 왔어요. 자기학대에 익숙한 거죠. 체념으로 자기 포기를 하는 거죠.”
“해서요…”
“해서 전 그 여성들이 스스로 체념한 채 포기하지 않도록 저항 의지를 심어 넣어주어야겠다 생각했어요. 남편으로 가장해 그들을 괴롭히는 악성댓글을 달았어요, 매일. 투서를 하고 악성 이메일을 주변에 돌리고… 남편과 그 여자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 여자의 남자친구에게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죠.”
“…”
호흡이 멎는 것 같다. 나는 성경책 옆에 있는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건형을 생각했다.
온몸이 갑자기 굳는 것 같다.
여자는 주상도와 나 사이를 뒤쫓고 있었다. 나의 비밀을 뒤쫓고 있었다.
강만봉을 보낸 자도 여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만봉은 누님! 걱정 마십시오, 하고 맹세를 했을 것이다. 여자는 정말 나의 성기를 잘라내듯 내 손가락을 원했던 걸까.
여자는 내가 미나를 죽게 하고 뒷산에 묻은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여자는 성당 사제관에 술을 마시고 있는 이두나를 찾아온 것이다.
“여성은 스스로 자기 권리를 포기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늘 시달리기 마련이잖아요? 제가 그렇게 한 건 그런 이윱니다. 성적 피해를 당한 여성들 스스로가 나서서 자기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불이익을 고발해야 한다, 뭐 그런 생각…”
“그러나 자매님, 그 여성들이 당한 고통은 자매님 남편에게 당한 고통보다 더 큰 이차 고통이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눈을 부릅뜬 시체처럼 굵은 비로드 커튼으로 가려진 상대편 쪽을 쳐다봤다.
여자는 나에게도 고통을 주기를 원했다. 지옥에서 사는 고통을, 자신과 똑같이 맛보라는 듯… 둔탁한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현기증이 일었다.
여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비밀을 폐기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분명했다. 그것은 여자와 나를 하나로 묶고 있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걸려 있는 비밀이기도 했다.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떳떳치는 못하지만 상대의 운명을 더 어둡게 만드는 비밀 같은 거 말이다. 현실의 진정한 모습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리고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여자의 말에 묘한 기운이 흘렀다. 약간의 조소 섞인 비음.
“어떤 여자는 남편의 유혹에 흔들린 여자도 있었어.”
“예?” 이두나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