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회
갈참나무잎들이 발목까지 푹푹 밟혔다. 낙엽은 누렇게 말라 있었다. 발이 미끄러웠다. 자꾸 헛디디는 듯 발이 미끄러졌다.
“어디까지 가야하는 거야?” 형두가 물었다.
“등산객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어야지…” 내가 말했다.
아파트 뒷산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마음 먹고 올라가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휴일 날이면 늘 방바닥을 껴안고 뒹굴곤 했으니까. 형두가 한번은 뒷산에 가서 도시락이라도 까먹자고 했다. 하지만 한나 언니와 나는 티브이를 보면서, 지나가는 개가 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뒷산을 이런 이유로 오르게 될 줄은 몰랐다. 가파르진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땀이 나기 시작했다. 등산객들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뭇잎이 발목까지 덮였다. 부러진 삭정이가 까맣게 탄 얼굴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얼키설키된 잔가지들을 헤치며 오르막을 올랐다.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흙 위로 올라온 나무뿌리를 디디며 올라갔다.
형두와 한나 언니가 말했다. 더 이상은 못 가겠어.
“대충 이 정도에서 묻자.” 형두와 한나 언니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안 돼! 등산객 중엔 애완견을 데리고 오는 이들도 있어. 개들은 후각이 장난 아니거든. 그럼 금방이야!” 그러곤 나는 손바닥을 수평으로 펴선 내 목을 쓰윽 긁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미나를 묻을 만한 적당한 곳을 고르고 있었다.
삭정이가 바람에 뚜뚝 하고 부러졌다. 검게 물기에 젖어 있었다. 곧 서리가 내릴 듯했다. 미나가 납작하게 화단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공백이 찾아왔다. 그것은 ‘나’ 자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지적 회의 같은 거였다. 죽음 앞에 느끼는 사유라니. 기껏 나는 천박한 이기주의자 내지 고상한 자기중심주의자에 불과했단 생각도 들었다. 도덕과 삶에 대한 자괴감이 찾아왔다. 한 생명체의 죽음 앞에서.
“미나가 죽은 건 내 잘못이 아니야. 지가 버둥대다가 그런 거니까.” 애써 냉정하게 내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미나를 납치한 건 잘못이잖아.” 형두가 입을 비죽거렸다.
“그거야 개 주인을 골탕 먹이다 도로 갖다 주려했지.”
미나가 없어진 후 연구소에서 주상도가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민진에게서였다. 결재서류에 사인을 할 때도 손을 떨며 진땀을 흘렸다는데 결재서류를 다시 받은 연구원들은 아연실색했다. 결재 서류에는 ‘미나’라고 사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은 당장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나는 좀더 잔인하게 변형된 자아를 선택해보기로 했다. 온화한 얼굴을 지우고 싸늘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글고 신부님도 말씀하셨어. 우리나라에 산이 많은 건 암매장을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이래. 특혜의 장소란 뜻이지…” 그러자 지금까지 나를 옹호하던 한나 언니마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뭐? 어느 신부가?” 형두와 한나 언니가 동시에 물었다.
내가 말을 자르며 말했다.
“빨리 묻자…”
형두, 한나 언니, 나는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양지 바른 곳이었다.
미나가 흙의 품으로 돌아가자 형두가 흙을 다독이면서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내가 흙을 발로 밟으며 대꾸했다.
“너 소장과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뭐? 무슨 말이야?” 어이없는 표정으로 형두를 봤다.
그러자 형두가 말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그 소장이 멋있고 대단한 천재라고 집에 와서 막 떠들고 좋아해 놓고는…”
“어휴, 정말, 너무한 거 아냐?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야? 나 소장 단 한번도 이성적으로 좋아한 적 없어. 직장 상사에 대한 존경이었을 뿐이야. 설사 그랬다 하더라고 부하직원을 위협하고 성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잔인한 짓이야.” 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잠자는 곰을 건드려도 유분수지. 겨울잠 잘 자는 곰한테 사냥꾼이 갑자기 나타나 웅담을 가져가는 것 같은,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다.
“너 정말 소장 좋아한 건 아니지?” 한나 언니가 킬킬대며 내게 물었다.
“캬악~” 내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내 가슴에 빨대를 꽂고 누군가 내 웅담을 쭉쭉 빠는 것 같았다.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속임수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채 알몸으로 찬물에 뛰어들 만큼 어리석진 않다.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갑자기 우리 뒤쪽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급하게 산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