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내가 서 있는 의자에 잠바 차림의 아저씨가 앉아 있다. 나와 한나 언니는 아저씨의 의자를 포위한 채 손잡이를 잡았다. 한나 언니가 버스에 오르자마자 저기야 하고 가리킨 자리였다. 언니는 버스나 전철에 오를 때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자리가 없을 경우엔 여우처럼 눈치가 빨랐다. 다람쥐처럼 재빨랐다. 언니의 말에 의하면 졸고 있거나 멍하니 창문을 보고 있는 사람들 앞은 일찌감치 포기하란 거였다. 앞으로 한참 많이 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 가방을 만지작거리거나 창밖을 두리번거리거나 하는 사람들, 그 사람이 곧 바로 내릴 사람이었다. 언니는 버스에 타자마자 두리번거리더니 아저씨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나보고 자기 바로 옆에 서라고 눈짓까지 했다.
조금 있으니까 휴대폰이 울렸다. 언니의 휴대폰이었다. 언니는 갖고 있던 악어 가방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휴대폰을 찾더니 버스 안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까르르 웃고 호들갑을 떨고 손뼉을 치고 혼자서 할 거 다했다. 언니는 이십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 상봉같이 흥분해 있었다. 지치지도 않았다. 내가 손짓 발짓으로 눈치를 줘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한나 언니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언니는 내 손을 뿌리치며,
“얘~가~. 지금 중요한 전화란 말이야…” 했다.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나 언니가 뭘 하는 사람이며 어디에 살며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 뭘 하러 가는지 다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동생이 어젯밤에 샌드백을 치다 팔 인대가 나갔으며 지금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며 동생이 실연을 당해 너무 의기소침해 있기에 정신적 위로라도 될 겸 같이 있는 것이며 만약 동생을 혼자 둔다면 동생은 이번에 인대가 아니라 동맥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상까지 곁들였다.
버스에 탄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갑자기 버스 안이 가족처럼 불편해지려 했다. 잠바 차림 아저씨 바로 뒤에 은백의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할머니는 ‘어허 젊은 처자, 뭐 그란 일로 인생 종 치려 그려… 기운 내. 그랴…’ 하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나는 눈길을 둘 데가 없어 버스 천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통화하던 언니는 “잠깐만, 잠깐만.” 하더니 가방을 뒤져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 우리 바로 앞에 앉은 아저씨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나 언니는 메모지와 펜을 아저씨에게 건네면 눈짓으로 적으란 시늉을 했다. 아저씨는 얼떨결에 언니가 불러주는 대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불러봐. 잠실에 살고, 전화번호가 433-%$#@? 그래.”
내가 다시 불러볼게, 라고 말하면서 언니는 아저씨가 쓴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다시 한번 불러줬다. 잠바 차림 아저씨는 언니가 확인할 수 있도록 쓴 메모지를 언니 눈 가까이에 들이댔다. 통화를 끝낸 후 언니는 아저씨에게 메모지와 펜을 돌려받았다.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언니는 아저씨를 보며 생긋하고 웃어주었다. 작전에 돌입한 대원끼리 말없이 서로 주고받는 암호처럼 보였다. 아저씨는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여교사에게 칭찬을 들은 순진한 남자 고등학생처럼. 아저씨는 멋쩍었던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언니 땜에 정말 창피해서 죽겠어. 버스에서 큰 소리로 그게 뭐야. 아줌마 티 나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언니를 째려봤다.
“바다로 추락하기 직전의 비행기 같았다고.” 나는 씩씩거렸다.
“그런데 우리, 바다에 추락한 게 아니야.” 언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
“임시 비행장에 잘 착륙한 것 같아…”
“무슨 말이야…”
한나 언니의 말은 이러했다. 정보망의 귀재인 친구에게 임나영에 대한 인적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주상도의 파일에 있던 다음 리스트, 임나영을 추적하고 있었다.
임나영에 대한 정보는 이러했다. 그녀는 마산에 있는 모 대학 대학원을 나왔고 지금은 서울 근교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이십대 후반의 싱글녀라는 사실. 키가 크고 미모에다 부모님 없이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정도…였다. 파일 안에 저장된 정보, 검은 눈빛에 긴 생머리, 오드리 햅번을 닮은 얼굴형에 키스할 때 달콤한 초코파이 냄새가 나는 여자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정보보단 훨씬 유익한 정보였다.
“그런데 말이야. 그 임나영을 주상도가 건드렸나봐. 임나영이 대학 다닐 때… 당시에 주상도가 마산에 있는 대학에 시간강사로 있었대. 주상도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주상도는 곳곳에 자신의 정액을 뿌리고 다니는 발정난 주꾸미가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임나영 오빠란 사람이 주상도가 있는 대학 강사실로 찾아가선 멱살을 잡았대. 내 동생은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다. 어떻게 할 거냐. 그래 주상도가 쩔쩔 매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나봐.”
“그래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나영의 오빠가 그럼 선택을 하라했대.”
“무슨 선택? 임나영과 결혼해라. 아님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하겠다는 거?”
“아니, 임나영 오빠란 사람,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