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그동안 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끝없이 전기를 만들고 왔다. 내 의식은 쉬지 않는 발전기(發電機)였다. 하지만 내 몸속에서 건전지 약효가 다해가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려왔다. 끊임없이 밀쳐내도 다시 굴러 내려오는 육중한 드럼통처럼. 애초부터 이 싸움은 불가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게임의 상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교활하고 영리했다.
복통이 찾아왔다. 나는 배를 감싸 안고 쓰러졌다.
물론 애인이 떠나자마자 뒤늦게 알게 된 잉태의 흔적은 아니었다. 신체 장기가 변덕을 부리며 괴물로 변해버렸다.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미끄러졌다. 거실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질식할 듯해 마음대로 울 수조차 없었다. 이건 분명 나쁜 꿈이다. 삶이 이렇게 나한테 뒤통수칠 줄은 몰랐으니까. 한나 언니와 형두는 내가 한참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건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도 이메일도… 열어보지 않았다.
그의 집 앞에서 며칠씩 기다리기도 했다. 그는 침묵의 세계에 철저하게 자신을 가두어버렸다. 나는 수천 개의 유리에 찔린 짐승처럼 아팠다. 단 한마디의 해명도 하지 못한 채.
떠나는 누군가를 붙잡기 위해 오래 매달려본 적이 있다. 과거 건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러다보면 내가 붙잡으려는 것이 대상인지 나 자신의 오기인지 혼돈이 일었다. 내가 잡을 수 없는 것이 늘어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분노하니까. 가슴 따뜻하게 해주던 사랑이 하루아침에 내 삶을 다 부패시키는 애증으로 변하다니.
그가 이미 사랑을 거둬간 뒤였다. 그를 향해 네 살짜리 어린애처럼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나는 자꾸만 균형을 잃고 덜컹거리는 장난감 기차처럼 방안을 뒹굴었다. 눈물이 왼쪽 귀로 들어가 오른쪽 귀로 나오는 것 같았다. 왼쪽 귀로 들어간 기차가 오른쪽 귀로 나오는 것 같았다.
초겨울이었다. 밤이었다.
베란다 쪽 창밖에는 대기의 피로인 듯 안개가 나타났다. 바람이 불어 창밖 떡갈나무 숲이 몸을 심하게 뒤틀었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빗물이 유리창에 지문처럼 지도를 그렸다. 이슬비의 엷은 막 사이로 뿌옇고 희미한 안개가 흘렀다. 빗물은 불빛과 유리창 앞에서 번들거렸다. 창문을 열었다. 밖의 공기는 몹시 차가웠다. 팔을 내밀었다. 빗물을 잡아보았다. 어둠이었다.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는 밀집된 어둠.
세상은 애초부터 해답을 기대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줄 뿐이다. 모든 시도들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삶의 망태기 속에 잘못 걸려던 희생물처럼. 삶의 불순함에 분노가 일었다. 기껏 꾸며진 삶에 불과했다. 건형은 꾸며진 사진만을 보고 진실을 알려하지 않았다. 도대체 진실이란 게 무엇인가. 허위 속에 가려진 진실이란. 대체 진실이란 게 있기라도 한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양파껍질, 여러 겹의 살처럼. 헤아릴 수 없는 혼돈의 깊이. 그것이 진실인지도 모른다.
머리가 먹먹해 왔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다. 눈꺼풀을 깜박이지 못해 눈도 뻑뻑했다. 말과 생각이 끝없이 꼬리를 물었다. 에테르처럼 그리움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맞물리지 않은 채 무너졌다. 말이 나오지 않고 문장은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 했다. 영 말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 얼룩덜룩한 슬픔의 흉터가 생겼다. 입가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나는 베란다 천장에 매달린 샌드백을 쳐다봤다. 주먹을 꽉 쥐었다. 샌드백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샌드백이 묵직한 몸을 뒤뚱거렸다. 나는 문득 슬픈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과 함께. 눈물이 났다. 온몸의 슬픈 하얀 소금기가 다 빠져나갈 듯했다. 녹초가 될 때까지 샌드백을 치고 나서야 비로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났다. 오른팔을 들 수가 없다. 팔꿈치 인대가 욱신거렸다. 인대가 늘어난 모양이다. 머리가 묵직하게 바위를 얹어놓은 듯했다. 목이 잔뜩 부어 있었다. 몸을 꿈쩍 조차 할 수가 없다. 맥이 딱 풀렸다.
“너 어젯밤에 라면 먹고 잤지?” 한나 언니가 말했다. 버스는 혼잡하진 않았다. 하지만 앉을 자리가 있을 만큼 텅 비어 있지도 않았다. 벌써 목도리를 한 사람도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으응… 어떻게 알았어?”
“얼굴 퉁퉁 부었어. 뾰루지 장난 아니라고. 분화구 터진 거 같아.”
나는 왼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쓰윽 만져보았다. 오른쪽 팔꿈치가 다시 욱신거렸다. 입가와 이마 뾰루지가 열 개는 족히 넘는 것 같다. 이것이 얼룩덜룩한 슬픔의 흉터인가. 나는 생각했다.
실연에 빠진 자가 그렇듯 나는 무모한 짓을 한 것이다. 찬 비바람이 들어오는 베란다에서 샌드백을 두들기고 부엌으로 가서 신라면을 두 개나 끓여 먹었다. 실패한 열정이 저지른 실수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어색했다. 얼굴이 북극곰처럼 부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