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火葬
난파
나무에 싹이 트면 누이는 내 키를 쟀고 단풍이 들거나 잎새가 지면 창가에 눕혀 잠재웠다. 참쑥을 따다 차를 끓이고 배를 쓰다듬는 누이의 흙 묻은 잠 속에서 나는 뿌리를 더듬으며 입 안 가득 씨를 삼켰다.
누이의 거울에 아물지 않은 어둠이 내린다. 세숫대야에 약수를 부어 흰쌀을 씻고 쌀무덤 위로 쌀벌레가 눈썹을 내밀면 쌀알로 덮는다. 뜨물 위에 고인 얼굴에 눈곱이 낄 때까지 그리움을 뜸 들인다.
햇살을 걷어가는 구름이 그늘을 드리우면 또다시 누이가 안아줄 것만 같다. 누이는 수탉을 잡아 피를 거르고 키 작은 내 그림자를 곧추세우고는 그 해 시월, 문지방을 넘었다.
찬물에 발을 담그고 흙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뼈를 주물렀다. 거울 속의 빈방에 불을 지피며 죽을 오래 끓이는 법을 익힐 때, 심장 가까이 안개가 모여들었다.
전등알이 지하 복도 끝까지 기지개를 켠다. 거울을 닦고 지상에 오르면 누이가 불을 쬐고 앉아 나무의 결을 매만진다. 밤하늘은 달 한 조각 속주머니에 챙기며 단추를 떨어뜨리고 아카시아가 흰쌀밥처럼 부풀어 오르며 꽃을 피어냈다.
리ː플러
난파
당신의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의 일이다.
자줏빛 해변을 거니는 여인에게 편지를 썼다 지웠다 망설이고 있을 때, 당신은 글 솜씨 서툰 내게 문을 달아주고 있었다. 당신은 당혹스러운 유혹이었다. 당신의 쪽지를 따라 걷다보면 세상에 없는 이발소에 다다르게 된다. 환풍기가 식후의 일상처럼 회전하고 낮잠이 덜 깬 이발사는 눈곱을 떼며 하품하고 돌아서 셔터를 내린다. 가위질이 시작되면 받침 없는 활자들이 미역처럼 몸을 풀어헤치고, 인어의 은빛비늘은 뭍을 향해 소란스레 반짝인다. 자르면 자를수록 더욱 검어지는 소문의 머리카락들. 여인은 적도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다. 여인의 나체는 달빛이었으나 외인들의 손가락이 긴 혀를 내밀자, 자살은 타살이 되었다. 여인의 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구름과 섞여 노을 지며 밀림을 향한 창을 불태웠다. 스물일곱 해의 가뭄을 견딘 마지막 저녁이 해변을 걷고 있다. 폐허를 보듯 나를 바라보고 떠나는 시선 위에 머물다 스러지는 파도처럼 당신은 비로 바닥을 훑으며 타인의 자막들을 쓸어 담았다.
당신의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의 일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 세계에서 나는 수음 중이었고 침전된 욕망의 모래는 스크랩되고 있었다.
마리아 화화火花
난파
꽃밭에 직유처럼 꽂혀 잘 빠진 뼈 속에서부터 가시를 키웠다.
알몸의 가시가 되어 한 여자의 목을 그리워했다.
창백한 거름이 되어 나를 찾아온 여자, 내 몸속에서 자연으로 환생한 여자.
도도한 사랑의 그녀가 바람에 흔들리며 등에 닿을 때,
영혼은 피를 가질 것이다.
마리아의 속눈썹이 단풍드는 것이다.
내 빛깔, 내 요람, 마리아는 숨결이 고른 여자였다.
가시로 손끝을 따 죽은피를 빨아주던 마리아는 한 뼘 침실 속의 은초였다.
나는 마리아의 살에 상징을 덧칠하는 경련이었다.
사랑한다 신음하고 돌아서
씨를 거두던 여자,
마리아.
외로움이 옷을 벗으면 마리아의 낙화를 환멸로 받아 적었다.
마리아는 외로워 할 때 더욱 아름다웠다. 비유 속에서 메아리치며 식어가는 불꽃이었다.
병풍을 향해 누운 마리아의 곡선을 따라 밑줄 그었다.
나신을 수놓은 시트를 털면 검은 살비듬이 가질 수 없는 은유처럼 반짝였다.
마리아, 그녀는 죽음으로써 詩가 되고자 했다.
낙엽에서 발을 뗄 때마다
이별한 마리아가 내 걸음에 운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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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난파
인사동에서 생활하고 상계동에서 취한다. 그런지 시애틀 사운드를 동경하며 십년 이상을 그들에게 시적으로 빚지고 있다. 싱글시집 ‘내 외로움에는 그리움이 없다’를 기획하고 있으며 경북 영양군의 별빛을 그리워하고 있다. 영원히 그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