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同居)
조미경
뉴질랜드의 북동쪽, 폴리네시아와 피지 사이의 군도들이 움직인다. 거대한 지각변동이 내 식탁 위에서 예고되는가 싶어 자세히 보니 애집개미 한 마리가 움직이고 있다. 녀석의 가느다란 다리가 날짜변경선을 지나 태평양을 횡단하고 있다. 아내가 식탁을 행주로 닦자 약간의 물기가 남는다. 다행히 행주에 쓸리지 않은 애집개미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백 년 전 제조상이 그랬듯 다시 바다를 건너고 있다. 아내가 감자볶음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 순간 검지로 일개미를 꽉 누른다. 아내가 식탁 위까지 침범한 개미를 보면 한 마디 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집에 방역업체 직원이 있으면 뭐하냐는 말로 시작될 아내의 잔소리는 이스트가 들어간 반죽처럼 한없이 부풀어질 것이다. 2㎜ 크기의 애집개미가 검지 밑에서 압사당하는 동안 식탁 위에는 조촐한 밥상이 차려진다. 검지를 조심스레 들어본다. 아직 쿡제도에 입도하지 못한 일개미. 아령 모양의 더듬이 하나가 잘려져 있다. 쿡. 쿡이라. 원주민에 의해 살해된 영국인 선장 캠프턴 쿡이 애집개미를 사자의 벗으로 끌어당기는 순간 나는 숟가락을 든다.
집에 개미가 많다는 걸 안 것은 이사 온지 삼일이 지나서였다. 아내는 예기치 못한 개미와의 동거에 당황했지만 그게 바퀴벌레가 아니라는 것엔 안도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주로 싱크대 쪽에서 출현하는 개미는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의 잔소리를 참아내기 위해 텔레비전 볼륨을 높여야 했다.
“여보, 개미가 바퀴벌레 천적이라며? 개미가 바퀴벌레 알까지 다 먹나? 그래서 우리 집엔 바퀴벌레가 없나봐.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역한다고 사글세 좀 깎아달라고 했을 텐데.”
아내는 집에 개미가 있어서 바퀴벌레가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개미와 바퀴벌레는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 먹이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로 보는 것이 맞다. 먹이가 풍부하다면 그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함께 공간을 나눠 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굳이 힘든 공서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먼저 터를 잡은 게 개미냐 바퀴벌레냐에 따라 집주인을 놀랠 상대가 달라지는 것이다. 아내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하려다 그만 두기로 한다. 만약 바퀴벌레와 개미가 동시에 출현할 수 있다는 걸 아내가 안다면 날 가만 두지 않을 게 확실하니까.
아내가 딸아이의 밥 흘리는 모습이 못마땅한지 숟가락을 빼앗아 든다. 그리고 억지로 밥을 떠 한 숟갈 집어넣는 내게 날카롭게 덧붙인다.
“여보, 어머니가 집에 들르라고 전화하셨어. 나와 수진이는 안가면 안 될까? 아파트가 낡아서 그런지 바퀴벌레가 많더라. 어머니는 꼭 밥 먹고 가라시는데 수진이한테 바퀴벌레가 지나갔을지도 모를 밥을 먹일 순 없잖아. 어머니는 당신을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어머니 대접은 받고 싶으신 모양이지? 자꾸 오라가라시고. 어쨌든 당신 선에서 알아서 해줘.”
간신히 식도로 넘긴 밥이 고스란히 가슴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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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조미경
나를 쏘옥 빼닮은 딸아이와 동화책을 읽으며 둘째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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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모처럼 쉬는 날,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을 자리란 꿈마저 아내의 청소기와 걸레는 허락하지 않는다. 아내는 새로 나온 세제란 세제를 죄다 꿰뚫을 정도로 청소에 도가 튼 사람이다. 매일 닦고 쓰는 것도 모자라 며칠 전엔 로봇 청소기까지 사들였다. 어쩌면 아내와 내가 결혼한 것이 아니라 아내의 결벽증과 살충제를 뿌리는 내 직업이 결혼한 것인지 모른다. 아내는 집을 함께 나눠 쓸 대상으로 나와 수진만 허락한 것처럼 보였다. 생일 선물로 햄스터를 사달라는 딸아이의 부탁도 그 자리에서 매몰차게 거절한 아내다. 아내는 그 어떤 것도 집안에 두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티끌하나까지도.
지인의 소개로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호텔 커피숍 테이블 앞에 앉은 그녀는 참으로 정갈해 보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하나 없이 곱게 올려 묶은 머리가 그녀의 성격을 말해주었다. 손톱을 바짝 깎은 하얀 손마디는 지금도 날 설레게 한다. 그녀는 내가 해충박멸업체 직원이라는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는지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녀는 회사에서 사용하는 살충제가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미물이라도 생명이 있는 곤충을 가지고 밥벌이하는 심정이 어떠냐고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는 질문도 서슴없이 했다. 그녀는 새로 이사한 자취방에 바퀴벌레가 많아 놀랐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시카고에서는 모든 아파트 임대계약서에 바퀴벌레 방제에 대한 약관이 기록될 정도라나 뭐라나. 그녀는 자취방 바퀴벌레 소탕 작전이 무슨 인천상륙작전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했다. 약국에서 사온 살충제를 살포하고 뒷날 수북하게 쌓인 바퀴벌레 사체를 쓰레받기에 쓸어 담을 때 묘한 흥분을 느꼈다고 작은 목소리로 고백할 때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일곱 살 때였나. 우리는 골목 맨 안쪽 슬레이트집에 살았다. 큰 길에서 우리 집까지 가려면 생긴 게 고약한 팽나무를 지나야했고 간혹 돌담과 돌담 사이에 회색빛 몸뚱이만 내놓고 느리게 기어가는 구렁이를 넘어야 했다. 그런 골목 맨 끝에 나를 세워 두고 어머니는 월남치마를 끌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용하단 점쟁이만 아니었어도, 칠칠다방 미스 서만 아니었어도 어머니는 날 버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캄캄한 하늘이 너무 맑게 보여 당황스러운 밤, 내 손을 꽉 잡은 어머니의 손이 찢어진 만국기처럼 아무렇게 흔들린다. 그 바람에 심장까지 마구 흔들리는 기분이다. 손을 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 없다. 어머니는 점쟁이가 일러준 집 앞에 멈추더니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고 어머니 눈 끝엔 어떤 다짐의 빛들이 총총하다.
“졸지 말고 여기서 꼭 지키고 있어.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알았지?”
나는 무서워서 어머니 치마 끄트머리를 잡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두 발은 어머니를 쫓고 있다.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니의 우악스런 손이 그 집 문을 연다. 아버지와 미스 서의 발가벗은 모습이 아주 느리게 보이는가 싶더니 이상한 통로를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다. 난 심한 멀미를 느낀다. 멀리서 어지러운 밤이 사기그릇처럼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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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진료실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들어선다. 어머니의 주치의는 젊은 여의사다. 나는 주치의에 대해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젊다는 것과 여자라는 것 게다가 여자의 입술 주변에 난 부스럼이 믿음을 깨고 있다. 여자는 모니터를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돌린다.
“이게 환자분의 뇌를 MRI로 찍은 겁니다. 자세히 보시면 좌뇌와 우뇌 크기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전두엽 부분이 쪼그라들어있어요. 혹시 과거에 환자분이 심하게 머리를 다친 적이 있었나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의사가 묻는다. 어머니의 무수한 외상 중에서 지금 이 지경으로 몰고 간 원인을 찾아야 하다니. 머릿속 서랍을 뒤지며 답을 찾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어머니의 과거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없는 살림에 큰댁에 오백만원을 뺏기다시피 빌려주고 돌아오다 아버지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질 때였을까, 아버지의 숨겨둔 여자를 어머니가 찾아냈을 때였을까. 순간 어머니 얼굴에 수국처럼 푸르게 푸르게 꽃잎을 펼치던 멍 자국이 결을 세우며 바다가 되어 출렁인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자들을 치떨며 저주해야하는 건가. 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
“그럼, 어머니가 이렇게 변한 게 머리에 가해진 외상 때문이란 말씀인가요?”
“검사 결과로 보면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이 전두엽 부분이 운동과 언어, 판단과 같은 고도의 정신 작용을 담당하는 곳이에요. 지금 환자분이 말하는 게 어눌하고 인과관계에 맞지 않다거나 주변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생각하는 게 다 이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찰관의 말에 의하면 간밤에 아파트 층마다 남자들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한다며 소동을 일으켰다죠?”
“어머니는 이십년 넘게 우울증 약을 복용하셨어요.”
“외상성 치매가 확실합니다. 물론 우울증으로 오진할 수 있어요. 치매 증상 중 대표적인 게 우울증이니까. 이제 확실한 원인을 알았으니 치료방법을 바꿔야겠지요. 문제는 환자분이 치매에 걸리기엔 아직 젊으시다는 것과 완치가 안 되는 병이란 거지요. 단지 병의 속도를 좀 늦추는 것 외에는.”
진료실 문을 열자 어머니와 어머니의 동거남이 얼른 일어난다. 검사결과가 궁금한지 내 입만 주시하고 있다. 그저 우울증 약의 부작용이라고 얼버무린다. 어머니는 가슴이 탕탕 뛰는지 손을 가슴께로 가져다 댄다.
“회사는 어떡하고 병원에 온 거야? 수진이는 언제 와?”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이다. 기다림에 지친 손으로 내 볼을 어루만진다. 이런 어머니한테서 간밤에 있었던 소동의 흔적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치매라니. 모니터의 뇌와 머리가 잘리고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바퀴벌레가 오버랩 된다. 누군가의 신창에 찢어졌을 비대칭의 날개. 저 퇴화된 날개를 들추면 키틴질의 고광택 골격이 드러나겠지. 게다가 그 아래에는 까만 다리와 건들거리는 더듬이며 일곱 개의 복절이 보일 것이다. 바퀴벌레는 두 개의 뇌를 가진 괴물이다. 두 개의 자율적인 뇌 덕분에 단두되더라도 자신이 죽은 줄 모른다. 배고픔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수 주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바퀴벌레다. 외부의 충격으로 분리된 두 개의 신경회로가 어머니를 고광택 키틴질의 껍질로 에워싸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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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어머니가 긴 골목을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스무 살이나 어린 미스 서와 살림을 차렸다. 미스 서는 동네 사람들에게 유부남을 꼬여 가정이나 빼앗는 파렴치한으로 보이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마음씨 착한 계모처럼 긴 생머리를 과감히 자르고 아줌마 파마를 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두고 간 월남치마를 입었다. 마치 결혼비행을 마친 여왕개미가 새살림을 차리기에 앞서 제 날개를 부러뜨리듯.
미스 서가 어머니를 밀어내고 안방을 차지하고부터 아버지는 나를 자주 골방으로 몰았다. 아버지와 미스 서가 발가벗은 채 벼랑 끝으로 어머니를 밀치는 꿈을 꾼 날은 꼭 심한 경기를 했다. 그 때를 빼고는 안방에서 자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골방은 어둡고 습했다. 게다가 아무 때나 바퀴벌레들이 나타났다. 서걱거리는 소리 끝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바퀴벌레에 놀라는 건 며칠에 불과했다. 바퀴벌레 두 마리가 노란 장판을 밟고 분연히 일어섰다.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가 싶더니 죽마 탄 자세로 격렬한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진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용맹스러웠다. 나는 어서 커서 강해지리라 다짐했다. 비겁하게 어둠에 놀라 벌벌 떠는 졸장부는 되지 않겠다고. 바퀴벌레처럼 영민하고 용감해져서 어머니와의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미스 서 머리채를 잡고 이 길고 긴 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어머니 앞에 무릎 꿇게 만들겠다는 약속. 부화하고 남은 바퀴벌레 알주머니가 가볍게 날리면 골목 끝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꼭 데리러 온다는 어머니의 눈물 섞인 목소리.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기가 무섭게 어머니의 머리가 납작한 타원으로 바뀐다. 얼굴이 아래로 향하는가 싶더니 방패처럼 생긴 두개판으로 밀폐된다. 안정된 각도로 두개의 더듬이가 솟자 어머니의 작은 체구를 이루던 척추가 녹는다. 어머니의 등은 작은 돌기들이 무수하게 박힌 중세의 갑옷으로 갈아입는다. 절도 있게 보이는 이음새는 마치 셔터처럼 감아올릴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다. 뻐센 털들이 돋아난 여섯 개의 다리가 나오자 날개가 채 돋기도 전에 어머니의 변신은 끝난다. 어머니는 비에 젖은 랜드로바 단화에 바니시를 칠했음직한 몸 색깔을 한 바퀴벌레로 변해있다. 어머니는 두 개의 큰 갈고리 발톱이 달린 발로 남자의 소맷부리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의 겨드랑이 근처에서 쉬, 쉬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가 기문을 통해 남자에게 속삭이는 모양이다. 입원절차를 밟는 동안 나는 어머니에 대한 측은함보다 남자에 대한 불편함으로 거북하다. 남자는 어머니의 변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는 남자의 태도가 미심쩍다. 어머니 역시 그런 남자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130마디로 이루어진 더듬이를 움직여 남자의 쇄골부분까지 올라와 있다. 2천 개의 팔각형 렌즈들로 이루어진 어머니의 눈에 나는 비치지 않는 모양이다. 어머니는 남자의 어깨 위에 앉아 있다.
다행히 독실이 하나 있다는 병원직원의 안내를 받아 어머니 짐을 푼다. 어머니는 병실 구석에 놓인 침대 밑으로 쏜살같이 사라진다. 남자는 그런 어머니의 행동을 본체만체 자꾸 거스러미 투성이의 손으로 입가를 만진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남자의 시선을 부러 피한다. 어머니는 어느새 엷은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천장으로 올라가 있다. 어머니가 벽에 그리고 있는 수직과 수평의 교차점만으로도 벌써부터 현기증이 인다. 어머니를 겨우 침대 시트 위에 눕히자 간호사가 들어온다. 간호사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어머니의 오른쪽 첫 번째 다리에 링거를 꽂는다. 신경안정제를 맞은 어머니는 무겁고 긴 더듬이를 내려놓더니 금세 잠이 든다. 가끔 무릎관절 아래에 있는 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다리를 파르르 떤다.
“말도 마. 어젯밤 어머니가 어떤 짓을 벌였는지 자네가 직접 봤어야했는데. 경찰 부르고 119 부르고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다니까. 자네 어머니가 며칠 전부터 엄한 소리만 하더니 아니 세상에 날더러 도둑놈이라고 하질 않나, 맞은 편 집에서 자길 탐하려고 사내가 자꾸 자길 쳐다보고 있다고 하질 않나.”
남자는 나이에 비해 늙고 뚱뚱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어느 남자가 품고 싶은 마음이 들겠냐며 남자로서의 동의를 구하는 눈치다.
“이거야 참. 자네도 알다시피 다 그 우울증 약 때문이야. 약 때문에 살만 찌고 약 때문에 잠만 자고. 자네 어머니처럼 게으르고 지저분한 여자는 없을 거야. 왜 정신력으로 이겨내지 못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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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약만 먹으면 무력해지고 잠만 자는 어머니에게 약을 주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자주 어머니를 찾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을 한다.
“요즘 기름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데 내가 어머니 병 고칠라고 안 가본 데가 없네. 산이고 바다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할 때마다 아껴 둔 돛대도 양보하고. 그렇다고 자네 어머니가 돈 한 번 내놓는 줄 아나. 솔직히 자네 어머니 마음씨가 고와 내가 같이 살고는 있지만…”
남자의 말이 쓸데없이 길어진다. 나는 지갑에서 십 만원을 꺼내 남자의 주머니에 넣어준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어머니 꼬리털을 손끝으로 툭툭 치고는 병실을 급히 나간다. 남자의 행동에 멱살을 잡고 싶지만 참는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눈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어머니의 변신은 심장의 위치마저 바꾼 모양이다. 복부 마디에서 심장 소리가 조용히 들린다. 숨을 쉴 때마다 아주 고요하게 움직이는 둥근 배 위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있어 본 적이 얼마만인가. 순간 남자의 퇴장을 감지한 것인지 더듬이가 빠르게 움직이더니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곤 숨 고를 틈도 없이 남자를 찾는다. 어머니의 눈엔 정말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벽을 타고 들려오는 미스 서와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에 잠에서 깼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꽁무니를 붙인 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 한 쌍이었다. 살충제를 들자 귀가 자꾸 커지더니 벽에 가 붙었다. 자꾸 커져가는 게 두 귀와 심장 뛰는 소리 말고 또 하나가 있다는 걸 안 순간 당황스러웠다. 내 생애 첫 사정을 촌스런 벽지 위에 해버리다니. 나는 벽에 묻은 정충을 향해 스프레이 살충제를 뿌리며 두 번째 사정을 했다. 살충제는 하얀 거품을 물며 벽에서 누런 장판으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미스 서 말고도 여자가 많았다. 미스 서는 어머니처럼 골목 밖 용한 점쟁이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흙바닥이었던 골목이 시멘트 골목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골목은 길었다. 미스 서는 그런 골목을 구차한 월남치마를 끌고 빠져나가지 않았다. 대신 으슥한 밤 팽나무 뒤편에서 돌담을 넘는 일이 잦아졌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팽나무 뒷집 용철이 형이 우리 마당에서 후다닥 나오는 걸 봤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미스 서가 부엌에서 나오며 나를 맞았다. 비음 섞인 목소리로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를 부르며 마루로 향하다 애집개미의 행렬을 보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 불개미들은 사라질 줄을 몰라.”
미스 서는 마루를 기어가는 애집개미를 매니큐어 바른 검지로 꾹꾹 눌러댔다. 그날 밤 출출한 마음에 부엌 찬장을 열자 바퀴벌레의 빠른 움직임대신 애집개미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왠지 모를 화가 치밀었다. 찬장 깊숙이 자리한 꿀단지 주변이 온통 개미에게 잠식당했고 이미 수십 마리는 그 속에 빠져 노랗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꿀단지 뒤로 미스 서의 정액 묻은 팬티가 보였다. 미스 서가 결혼비행이 필요 없는 애집개미였음을 왜 미처 몰랐을까. 군락내의 형제들과 거리낌 없이 교미하는 여왕개미. 어머니가 아버지를 미스 서와 나눠가질 수 없어서 집을 버렸다면 미스 서는 물리적 집의 개념을 확장하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남자와 함께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런 동거에 합의할 수 없었다. 골목을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오다 팽나무 근처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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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두워지도록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여섯 개의 다리로 남자에게 휴대폰을 건다. 무심히 반복되는 연결음에 화가 난 어머니가 갑자기 링거주사를 뽑는다. 시트를 적신 건 붉은 피가 아니라 노란 체액이다. 어머니는 가방에서 버지니아 슬림을 꺼내 단단한 키틴질의 이빨로 문다. 놀란 간호사가 억센 가시털 사이로 혈관을 찾으며 어머니의 흡연을 눈감아 준다. 어머니는 젖먹이가 어미를 찾듯 그렇게 남자를 찾고 있다. 단축키를 누르고 또 누르고. 여전히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 휴대폰을 던지며 거친 다리로 간호사의 팔을 할퀴며 욕을 해댄다. 욕은 어머니한테서 쫓겨나다시피 나올 때 들은 것과 같다.
“갈보 년 똥구멍이나 핥을 놈. 에잇, 똥갈보. 어서 내 집에서 나가. 어디 뒹굴 년이 없어서 갈보 년과 놀아나.”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 제일 먼저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를 만나면 보드라운 어머니 품에서 그간 참았던 눈물을 다 쏟으리라 했다. 하지만 해후의 기쁨은 길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없었다. 예전보다 많이 늘어난 어머니의 몸피와 회색빛 눈썹 문신, 역한 담배 냄새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생물학적 모자 관계라는 사실로 서로 가까워지기를 기대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대여섯의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 남자가 돼지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입을 손으로 훔치며 내게 술잔을 건넸다. 어머니의 팔자타령이 끝도 없이 이어지자 남자들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는 아쉬운 눈치를 보냈다.
“김씨, 그 전에 내가 알아봐달라고 했던 땅 말이야, 거기가 도시개발로 묶일 거라는데 정말이야? 우리 엄마가 혼자 된 딸 가엾다고 떼어 준 그 땅 말이야.”
어머니의 말에 남자들은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뭉갰다. 남자들은 아파트와 땅을 팔아 전원주택을 사자고 꼬드겼다. 한 번 사는 인생 구질구질하게 살 이유가 어디 있냐며. 밤이 깊어지자 사내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씨가 자꾸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건넌방에 내 이부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김씨는 날이 밝아서야 현관에서 신발을 고쳐 신었다.
어머니 집에는 매일 같이 남자들이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어머니의 술상에 수육 대신 장어구이가 올라왔다. 그간 상 귀퉁이를 지키던 소주가 밀려나고 어울리지 않게 포도주가 머그컵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네 번째 남자가 현관문을 딴 날이었다. 어머니 울음소리와 콧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남자가 키 하나를 받아들고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어머니 앞에 섰다. 붉은 자운영이 어머니의 굵은 목과 가슴에 걸쳐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 보기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제발 술 좀 그만 드시고 정신 좀 차리세요. 남자들이 어머니를 사랑해서 매일 들락날락 하는 줄 알아요? 다 어머니 재산이 탐나서 껄떡거리는 걸 왜 어머니만 모르세요?”
매일같이 어머니 곁으로 남자들이 꼬여드는 이유가 어머니의 매력보다 돈 때문이라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밤을 지켜주는 남자 중에 유부남도 있었다. 시퍼렇게 어린 여자에게 남편이랑 자식까지 뺏긴 어머니가 남의 가정을 탐내다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욕들이었다.
“이 똥갈보 년. 갈보 년과 살 섞고 와서 어디서 개수작이야? 하수구 썩는 내나는 아가리 치워. 갈보 년 핥던 혓바닥을 확 뽑아버려야지. 내 나이 열아홉에 네 아버지한테 시집가 평생 두들겨 맞다가 쫓겨난 것도 억울한데 어떻게 감히 네가. 네 아버지랑 이혼하고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내 있어도 재혼 안했다. 다 너 때문에. 어린 새끼 떼어내고 도망 나온 죄책감에 밤마다 아기 울음소리만 들려도 안절부절 못하던 나였다. 난 널 낳은 이후로 한 번도 아이를 갖지 않았어. 뭐, 미스 서 그년 머리채를 채다가 내 앞에 갖다 놓겠다고?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어서 내 집에서 당장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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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집을 나오면서 두 번 다시 어머니를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애초에 내겐 어머니 같은 건 없다고 자위했다. 순진하게 어머니의 젖무덤을 그리워한 자신이 너무 밉고 불쌍했다. 어차피 어머니의 공간에 예고도 없이 들어간 것은 나였다. 당연히 어머니라면 아들과 함께 살기를 바랄 것이라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세상엔 당연이란 있을 수 없다. 자꾸 흐르는 눈물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삐죽 솟은 보도블록에 발이 걸렸다. 블록의 정렬을 깬 것은 다름 아닌 개미집이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개미집을 찼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개미들이 숨어있었는지 시커멓게 몰려들었다. 우왕좌왕하던 개미떼가 바지위로 기어올랐다.
어머니가 사라진 유년의 골목에서 나를 키운 것은 개미집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대들었다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쓰러진 날이었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귀 주변까지 얼얼했다. 입에서 피가 흘러 화단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때 앞니가 빠진 걸 알았다. 피 때문에 붉어진 앞니 주변을 개미 한 마리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화풀이할 양으로 개미를 잡아다가 여섯 개의 다리를 모두 떼어냈다. 그런데 자꾸 내 앞니로 개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난 병을 가져다가 그 개미들을 잡아넣었다. 개미가 든 병을 마구 흔들기도 하고 물을 넣기도 하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조금씩 죽였다. 개미집을 발견한 날부터 나는 급속도로 자랐다. 소녀의 가슴처럼 봉긋한 흙무덤, 그 정상에 조그맣게 난 구멍은 정말 신기했다. 구멍 안이 너무 궁금했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구멍에 물을 붓거나 나뭇가지로 헤집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개미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다가 침으로 원을 그려 꼼짝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날개 달린 녀석들을 잡아다가 날개를 모조리 떼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개미에게 물렸다. 나는 화가 나서 개미집을 발로 부쉈다. 어지럽게 쏟아져 나오는 개미떼. 나는 개미들을 밟으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죽어라, 죽어라 외칠수록 자꾸 강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남자를 기다리기가 너무 힘겨웠던지 어머니가 침대에서 몸을 날리는 바람에 링거주사가 또 빠졌다. 다행히 단단한 키틴질 외투 덕분에 다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남자가 있는 집으로 가겠다며 문 앞을 어지럽게 맴돈다. 간호사가 담당의에게 처방 받은 신경안정제를 주사했지만 소용없다.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깎아 어머니 앞에 둔다. 어머니는 손가락 모양의 위턱 촉수와 입술 촉수를 물 많은 과육에 찔러 맛을 확인한다. 복숭아는 식도를 지나 위 속 치아에서 잘게 잘려질 것이다. 흡수되지 않은 것들은 다시 내장으로 흘러들어가 작은 환약 모양으로 몸을 빠져나올 것이다.
“나도 안다. 그 사람이 돈 때문에 나랑 산다는 거. 어쩌면 지금쯤 온 방을 뒤집어 놓았을지도 모르지. 내 복력에 무슨.”
어머니가 뱉은 말이 하도 의외여서 자연스레 눈이 커진다. 어머니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문을 등지고 앉아 있다. 가방에서 무언가 찾는가 싶더니 열쇠꾸러미를 꺼낸다. 그것을 내미는 어머니 손등이 거칠다.
“그래도 그 사람 미워하지 마라. 여자 혼자 사는 게 얼마나 고단한지 넌 모를 거다. 그나마 병든 날 버리지 않고 이렇게 살아주니 고맙단다. 적어도 내가 죽으면 치워줄 사람 하난 있어야 하지 않겠니.”
약 기운이 이제야 퍼지는지 어머니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다. 어머니는 길게 숨을 내쉬고 매니큐어가 벗겨진 손을 내 손등 위로 포갠다.
“네가 미스 서를 어머니로 불렀듯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러줄 순 없겠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밀치며 벌떡 일어난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당해놓고 그런 놈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니 어머니의 말에 화가 치민다. 미스 서를 어머니로 부른 세월이 내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알면서 어미가 되서 그런 걸 조건이라고 걸다니. 남자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어머니를 더 이상 참아내기 힘들어 어금니를 문다.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려고 미간에 힘을 주는 순간 바퀴벌레로 변한 어머니가 침대 아래로 재빠르게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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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게 병원비로 짐 되기 싫다고 통장을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발 등 위로 작고 날카로운 것이 지나간다. 사람 없는 집이라고 바퀴벌레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어머니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집 전체를 자신의 동굴로 만들어버린 바퀴. 가방에서 바퀴벌레 살충제가 들어있는 주사기를 꺼낸다. 거실을 지나 안방 미닫이를 연다. 짙은 밤색의 장롱 앞을 독일바퀴벌레 암컷이 지키고 있다. 알주머니를 품은 탓에 몸이 무거운지 움직임이 둔하다. 암컷은 알주머니를 내려놓을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다. 조금 있으면 유충들이 알주머니 솔기를 찢고 결박되어 있던 더듬이와 긴 다리를 흔들며 한 세대를 이어가겠지. 바퀴벌레 암컷은 한 번의 교미로 평생 알을 낳을 수 있다. 수컷의 정액을 평생 몸에 지니고 있다가 자발적으로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도 있다면 어떨까.
장롱 문을 열고 손을 깊숙이 넣는다. 어머니 말처럼 가방 손잡이가 잡힌다. 가방을 들어내고 장롱 깊숙이 넣어둔 보자기를 찾는다. 옷가지 사이로 엷은 분홍색 보자기가 나온다. 맞은 편 모퉁이를 잡아 묶은 게 야무지다. 보자기 안에서 여러 가지 물건이 쏟아져 나온다. 어머니는 금니 두 개를 하얀 종이에 곱게 싸서 보관 중이다. 여러 가지 서류 뭉치가 헝클어진 옷가지 몇 개와 한 번도 입지 않은 속옷들과 엉켜 있다. 그 속에서 툭하고 작은 열쇠 하나가 떨어진다. 다용도실 열쇠다. 세금 영수증이며 호적등본 어머니 소유로 된 아파트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땅의 등기부등본 등이 살을 섞듯 돌돌 말아져 있다. 무심코 어머니의 호적등본을 펼친다. 외조부부터 시작된 호적은 열장 가까이나 된다. 어머니 이름 밑으로 적어진 글씨를 따라 읽어 간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어머니가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어머니의 재혼과 이혼. 분명 어머니는 나를 잊지 못해 여태 혼자였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어머니 곁에 남자들이 꼬여도 한 번도 결단코 단 한 번도 식을 다시 올린 적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온몸이 찢어지는 통증에 숨쉬기가 힘들다. 어머니의 남자들이 바뀔 때도 이러지 않았다. 홀로 된 어머니가 가여울 뿐 모든 상황이 이해된다고 자부했다. 어머니가 좋은 사람을 만나 개가를 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들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불덩어리 같은 것이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숫자를 세어 본다. 하나, 둘, 셋… 좀처럼 마음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부정을 훔쳐본 것 같은 생각에 머리를 흔든다.
다용도실 자물쇠에 열쇠를 넣는데 자꾸 손이 헛돈다. 어머니는 다용도실에 고장 난 전기밥솥을 넣어두었다고 했다. 뚜껑을 열면 집과 땅문서,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 통장이 오롯이 있을 거라고. 다용도실 안은 세간으로 어지럽다. 물건들 사이로 바람보다 빠른 움직임이 보인다. 놀란 바퀴들이 장조림처럼 짭조름한 그림자를 끌고 숨을 곳을 찾는다. 엎어둔 고무 대야를 꺼내자 바퀴벌레 사체들이 가볍게 뒹군다. 전기밥솥 하나가 보인다. 유행지난 빨간색 쿠쿠다. 모자가 긴 골목을 빠져 나와 처음으로 마주 앉은 날, 어머니는 아들에게 밥을 지어준다고 쿠쿠를 사왔다. 따뜻한 밥 한 술이 식도를 넘어가자 모자간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머니는 쿠쿠를 닦고 또 닦으면서 남자들의 방문을 기다렸다. 색 바랜 빨간 색 쿠쿠를 보니 머큐로크롬을 바른 어머니 유륜이 떠오른다. 생의 잇몸이 여물면서 더 이상 열리지 않던 어머니 유방. 찰칵. 쿠쿠의 뚜껑이 반사적으로 열린다. 말라붙은 밥알 몇 개가 보인다. 묵직한 서류들과 통장 뭉치가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텅 비어있다. 둔기를 맞은 것처럼 뒷목이 뻣뻣해진다. 내솥을 들어내려고 하자 쉽게 빠지지 않는다. 뭔가 들러붙은 느낌이다. 압력밥솥을 다용도실에서 꺼낸다. 두 발로 밥솥을 누르며 힘껏 내솥을 잡아당긴다. 밥 뭉치가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맥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바퀴벌레 화석이다. 2㎝ 크기의 작은 바퀴벌레 꽁무니에 유충들이 매달려 있다. 어미 바퀴벌레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갑옷바퀴다. 썩은 나무를 먹는 녀석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깊은 산 속에 있어야할 녀석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죽음을 저장하고 있는 거지. 쿠쿠 그 어디에도 나무 하나, 풀 한포기 찾아보기 힘든데 말이다. 갑옷바퀴는 부부가 평생을 같이 살면서 단 한 번 낳은 자식을 극진히 돌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부부는 새끼들이 자랄 때까지 돌보다가 함께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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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바퀴벌레가 유충들을 불러 모은다. 제 새끼가 너무 곱고 아까워 어찌할 바 모르는지 떨리는 더듬이로 쓰다듬는다. 자연스레 우윳빛 새끼들이 어미 배 쪽으로 몰려든다. 어미는 젖을 빠는 새끼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다가 입이 약한 새끼들이 먹기 좋게 고슬고슬 잘 지어진 밥을 으깬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수컷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해로하는 것으로 유명한 갑옷바퀴인데 수컷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게 수컷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미치자 갑옷바퀴 화석이 주는 푸근한 영상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몇 년 전 발표된 기사가 뇌리를 스친다. 바퀴벌레의 완전 박멸을 예감한다며 떠들썩하게 실렸던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기사. 미국 코넬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의 연구진이 암컷 바퀴벌레의 성 페로몬을 이용해 수컷 죽이는 법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공으로 합성한 암컷 페로몬으로 수컷들을 유인해 식음을 전폐하고 교미에만 몰두하도록 만들어 굶어 죽이는 방법이었다. 화석을 조심스레 점퍼 안주머니에 넣는다. 바퀴벌레가 낸 길을 찾아 발을 옮길 때마다 주사기 안 살충제가 조금씩 줄어든다. 끈끈하게 달라붙은 장판을 들어내고 살충제를 주사한다. 훅하고 올라오는 시멘트 바닥 냄새가 유년의 낡은 나무 찬장에서 나는 냄새와 닮았다. 약을 먹은 바퀴벌레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약을 게워낼 것이다. 그러면 가족들이 그 먹이를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나눠 먹을 테고 서로의 더듬이를 포개고 함께 죽음을 맞는 의식을 치를 것이다. 그렇다고 바퀴벌레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채 1년도 못가 바퀴벌레는 긴 더듬이를 건들거리며 장판 위를 활보할 것이다. 나는 개미집을 부수듯 바퀴벌레 집을 부수리라 주먹을 세게 쥔다. 그들의 안식처를 찾아내서 자근자근 밟아 줄 것이다. 알주머니 하나 남김없이 불로 태워 그 족을 멸할 것이다. 다용도실에서 망치를 발견한 눈에 힘이 들어간다. 힘껏 쿠쿠를 내리친다. 빨간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싱크대 문짝을 걷어차고 바퀴가 숨어 있을 만한 습하고 어두운 곳을 찾아 사정없이 망치질을 한다. 어머니의 세간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서 짓밟는다. 파편 하나가 발등을 스친다. 아무렇게 휘두른 팔에 다용도실 문이 떨어져 나가고 장롱에도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놀란 바퀴벌레들이 사방에서 기어 나온다. 가방에서 분사기를 꺼낸다. 바퀴벌레들을 향해 살충제를 분사한다. 약이 바닥을 들어낼 즈음 어디선가 흘러나온 페로몬이 뿌연 안개처럼 다리 주변을 에워싼다.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몽롱한 기분에 자꾸 눈이 감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