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김재아
그가 진료실에 들어섰다. 그의 귀는 거대하게 부풀어 있었다. 의사는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어디서 그런 동상을 입었느냐고 물었다.
“스키장이요.”
“며칠이나 되었지요?”
“닷새쯤이요.”
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진작 병원에 오지 않으셨어요?”
그는 마치 질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수초동안 진료실 책상위에 놓인 거울을 통해 자신의 귀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귀는 SF영화 속 외계인의 귀처럼 우습게 커져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아프지 않았으니까요.”
스키는 금요일 밤 퇴근 무렵까지는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평소 자정 즈음에 퇴근하는 그는 그날따라 무척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집에 돌아와 저녁으로 냉동 군만두를 구워먹고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재미없는 프로그램만 방영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둔 채로 오늘자 신문을 읽었다. 그가 산 주식이 전일대비 오른 것을 확인하고 관련기사를 꼼꼼히 읽으며 미소를 지었다. 00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5명 사망, 성적비관 수험생 아파트서 투신자살, **시 신축 주상복합건물 붕괴… 다른 기사는 그리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텔레비전에서 그가 좋아하는 개그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이 들리자 신문을 놓고 화면에 집중했다. 요즘 인기 있는 개그맨이 화면에 나왔다. 그는 반복테이프처럼 그의 유행어를 따라하며 빙긋이 웃었다.
개그프로그램이 끝나고 채널을 돌리자 밤11시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는 하품을 하며 지진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때 그는 드라이브도 할 겸 근교 스키장을 다녀오면 주말을 덜 심심하게 보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스키장에 도착해서야 그는 자신이 스키와 스키복만 챙겨온 것을 알았다. 모자, 귀마개, 안면마스크 등 머리와 얼굴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는 어느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새벽이라 스키장내에서는 대여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귀마개와 모자 없이 스키를 탄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함박눈이 오는데다 바람도 매섭게 몰아쳤다. 그가 주로 이용하는 상급 슬로프로 향하는 리프트는 사람이 없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악천후 때문에 몇몇 스키나 보드를 타는 이들은 대부분 초중급자 슬로프를 이용하고 있었다. 상급 슬로프용 리프트 관리자는 운영 종료 준비를 하다 그를 보았다. 관리자는 리프트를 정상 작동 시키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귀가 너무 빨개요.”
그는 관리자를 향해 양 귀의 귓불을 쭉 늘이는 동시에 혀를 내밀며 원숭이 흉내를 냈다. 관리자는 웃지 않고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그는 멋쩍게 손을 내렸다. 귀가 차가워져서 귓불이 잘 늘어지지 않아 상대방이 웃지 않았던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문득 관리자의 왼손에 들린 김이 나는 차를 얻어 마시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귀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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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재아
낮에는 공익재단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밤과 새벽에는 무의식 독립잡지 ‘뚜껑’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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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는 리프트에 올랐다. 상급 슬로프용 리프트는 텅 비었다. 그의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었다. 리프트가 조금씩 오를 때마다 양 옆에 세워진 키 큰 가로등이 그를 호위할 뿐이었다. 그는 마치 얼음왕국의 제왕 즉위식을 홀로 거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의 몸은 산 채로 냉각 처리되는 것처럼 점차 차갑게 굳어갔다. 슬로프에 도착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닥에 쌓여있던 인공눈과 내리는 눈이 함께 흩날려 시야에는 눈구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굽혀 하강을 시작했다. 눈보라 사이를 달리며 성난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바람은 그를 곧 쓰러뜨릴 것 같은 강도였다. 몸의 한 귀퉁이가 찢어지는 듯 했다.
서너 차례 리프트를 탄 후 귀를 만져보았다. 몸을 만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단단하게 언 돌덩어리를 만지는 것 같았다. 별다른 통증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해가 떠오를 때까지 스키를 탔다.
스키장에 다녀와선 죽음과 같은 긴 잠을 잤다. 원래 그는 깊은 잠에 잘 못 드는 편이었다. 매일 너무나 많은 꿈을 꿨고 꿈 사이사이에 깨어나곤 했다. 지난해까지는 동거했던 K가 깊은 잠을 못 이루는 그를 늘 재워주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아이처럼 몸을 웅크려 그녀의 가슴 사이로 자신의 머리를 넣었다. 그녀보다 15cm 정도 키가 큰 그가 자그마한 그녀의 몸으로 파고드는 식이었다. 편한 자세는 아니었지만 그는 언제나 꿈에서 깨어나면 그런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녀의 품안에서는 따스한 빛이 돌고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다시 잠드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K는 올 봄에 그를 떠났다. 그 뒤로 그는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 스키장에 다녀온 날은 피곤했던 탓인지 두 번 깨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15시간이 넘는 긴 잠을 잘 수 있었다.
첫 번째로 깨어났을 때는 해거름 무렵이었다. 그는 어둑발이 내린 방을 나와 화장실 변기 앞에 섰다. 변기 옆의 상반신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좀 이상하게 생겼다 싶었다. 하지만 잠이 덜 깬 상태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시 잠이 들었다.
두 번째로 깨어났을 때는 깊은 밤이었다. 방안의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푸른 색 괴물 같았다. 더 자고 일어나면 나을 거라 생각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꿈도 없는 그 잠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일요일 새벽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보니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뺨과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입술은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중간이 터져 피가 흘렀다. 무엇보다 귀의 부피가 평소보다 두 배는 커져 있었다. 그는 커진 귀가 신기해서 거울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마블링작품처럼 보였다. 귀가 커지면서 여러 부분의 살이 터졌는데 터진 살의 색이 부분마다 오묘하게 변해 붉은색과 푸른색, 검붉은색, 보라색이 부드럽게 뒤섞여 있었다. 귓구멍 근처에서 터진 살은 붉은 핏줄과 파란색 동맥이 엷게 비쳐 보라색이 되었다. 그곳에서는 눈물 같은 진물이 흘러 귀의 굴곡을 빠져나와 흘렀다. 어디선가 겨우내 얼었던 계곡물이 조금씩 녹는 것처럼 진물은 귀의 안쪽 살과 둔덕을 넘어 조용한 발걸음으로 귓불을 적시며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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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바퀴는 채도가 다른 붉은색이 뒤섞여 있었다. 귀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특히 귓바퀴가 너무 커져서였다. 비현실적이다 싶을 만큼 귓바퀴는 하늘로 솟아있었다. 그는 거울을 보다 이번에는 귀 아래쪽 귓불에 손을 가져갔다. 귓불은 귓바퀴와 반대로 아래로 살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추위의 고통을 잊지 못한 것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만지다 보니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부풀어 오른 귓바퀴와 귓불의 살이 조금씩 터지면서 따끔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따끔한 느낌은 곧 잦아들었고, 이후에는 귀가 부풀어 오르면서 말랑말랑해진 살결의 촉감만이 남았다. K의 부드러운 살결이 떠올랐다. 그는 잠이 덜 깬 듯 멍한 표정으로 아침이 올 때까지 귀를 만졌다.
월요일, 출근을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그의 귀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안 아팠어요?”
“병원은 다녀왔어요?”
얼굴의 동상 흔적은 거의 나은 상태였지만 귀는 전날보다 더 심하게 부풀어 올라있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씩 웃기만 했다. 그의 귀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여직원 앞에서 그는 자신의 귀 안쪽에 손바닥을 가져가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를 경청하는 표정을 지으며 지금 우주와 교신 중이야, 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꽤 그럴 듯한 것 같아 크게 웃었지만 여직원은 심각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병원 안가세요?”
그는 굳은 표정의 여직원 앞에서 더 이상 바보처럼 웃을 수 없었다.
“곧 나을 건데 갈 필요 있을까?”
머쓱해진 그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여직원은 그의 곁에 바짝 다가와 그의 귀를 한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박대리님은 참 둔하신 것 같아요.”
화요일 아침 출근 전 그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더 커졌군.”
거짓말을 할 때마다 커지는 피노키오의 코처럼 그의 귀는 날이 갈수록 부풀어져 갔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좀 따끔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병원에 갈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주식시장 동향을 분석하거나, 개그프로그램을 보거나, 낮잠을 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매일 조금씩 커지는 그의 귀를 보며 동료들은 인상을 썼다. 함께 점심을 먹던 동료들은 대화 중에 갑자기 그의 얼굴을 보며 정신없이 웃었고, 화장실에서 만난 상사는 소변기 거울을 통해 그의 얼굴이 비추자 그를 향해 욕을 했다. 동료들의 반응이 점차 짜증과 걱정으로 바뀌자 그는 마지못해 병원에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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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그의 귀를 들여다보며 혀를 찼다. 귀를 소독한 뒤 하얀 거즈를 대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귀를 손으로 자주 만지셨지요? 증상을 악화시킨 것 같네요.”
그는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잠깐 동안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는 놀란 사람처럼 의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멍하니 있다 갑자기 눈을 치켜떴다.
“만진 적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했던 행동이 어렴풋하기만 했다. 그가 정색을 하며 대답하자 의사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귀가 너무 커져서 우주와 교신을 한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의사의 농담에도 그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이 없었다. 의사는 얼굴이 빨개졌다.
“잘 안 들리시는 건 아니죠?”
의사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는 갑자기 귀에 손을 가져가더니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의 표정이 늙은 원숭이처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잘 안 들리세요?”
의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뭐라고요? 조금 전 우주와 교신을 하느라 못 들었는데요.”
그는 갑자기 입을 쫙 벌리고 눈을 크게 뜨며 우스꽝스런 표정을 보였다. 의사는 헛기침을 하며 마지못한 듯 재밌으신 분이네요, 하고 말했다. 그러곤 흰색 테이프를 말없이 잘랐다. 의사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하여간 병원에는 꾸준히 오셔야 합니다.”
“안 들리네요.”
“장난치지 마시고. 상처 나을 때까지는 오셔야죠.”
의사의 말에 그는 씩 웃기만 했다. 처방전을 받고 진료실을 나왔다.
병원 밖 복도에 전신 거울이 보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전신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거울은 하단에 축개업이라고 씌어진 테두리가 나무로 된 구식 형태였다. 거울 속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치료를 끝낸 모습이 낯설었다. 커진 귀에다 테이프와 거즈를 마구 감아서 귀는 남자주먹만한 흰색 귀마개를 한 것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는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거울을 처음 접하는 원숭이가 떠올라 기억나는 대로 원숭이 소리를 흉내냈다. 끼룩끼룩. 두 팔을 수평으로 힘없이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다 그때 본 것은 원숭이가 아니라 침팬지나 고릴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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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을 하고 자정 즈음 귀가했다. 그는 허기를 느꼈다. 부엌 찬장 선반을 뒤져 햇반을 꺼냈다.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넣고 텔레비전 앞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의 선호채널을 누르자 화면에 오락프로그램이 나왔다. 출연자들이 두 팀으로 나누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에 진 출연자들이 빨래집게를 코에 끼우는 벌칙을 받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전자레인지에서 2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햇반을 꺼낸 그는 선반을 다시 뒤졌다. 참치캔, 골뱅이캔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다시 선반을 뒤졌다. 제일 안쪽에서 스팸이 나왔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가스레인지를 켜고, 프라이팬을 얹었다. 스팸 뚜껑을 열어젖힌 그는 잠시 멈칫 했다.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윗부분에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짙은 고동색으로 변한 햄 표면 위에 흰색, 노란색, 붉은색 곰팡이가 마치 색색의 눈처럼 내려 앉아 있고, 곰팡이 주위에는 햄의 기름띠가 마블링처럼 둘러져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그것을 살펴보다 곰팡이가 슨 윗부분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천천히 햄 표면을 쓰다듬었다. 곰팡이가 슨 햄은 그의 귀처럼 부드러웠다.
벌칙이 끝나고 조용해진 오락프로그램은 더 이상 재미가 없었다. 스팸을 버린 그는 하는 수 없이 라면을 먹었다. 한 손으로는 젓가락질을 하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채널을 빠르게 돌려 보았다. 그러다 대형사고 장면에서 손동작을 멈췄다. 오늘 무슨 일이 생겼나 생각을 하는 순간, 화면 중앙 아래에 「1992년 12월 19일 여객기 야산추락사고 72명 사망」 자막이 보였다. 오늘이 12월 19일이니 아마 과거의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그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이야기를 언론이나 지인에게 들을 때에도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또 자신이나 남의 과거사를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들을 보면 의아스러웠다. 곧이어 화면 좌측 상단에「오늘의 역사」라는 프로그램 제목이 보였다. 그에게는 별로 흥미를 끄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다른 채널로 돌리기 위해 리모컨을 잡았다. 그때 화면에 고속도로 연쇄 추돌사고 장면이 나왔다. 「1996년 12월 19일 짙은 안개로 인한 고속도로 23중 추돌 사고, 12명 사망, 45명 중상」
그는 자막설명과 날짜를 유심히 보았다. 화면의 날짜를 중얼거렸다. 1996년 12월 19일. 화면에는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말린 오징어처럼 납작해진 채로 땅에 붙어있는 시체가 자그마하게 보였다. 그는 1996년 12월 19일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서랍 속에 오랫동안 방치된 작은 물건처럼, 무언가 그의 기억 속 작은 공간에서 갇힌 채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그때 사고가 있었지. 그는 곧 암기과목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항을 기억한 것처럼 높낮이 없는 톤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친구는 수능시험이 끝난 뒤 전국일주를 하기로 약속했었다. 시험이 끝나고 둘은 신혼여행을 준비하는 예비부부처럼 설렜다. 전국일주 첫 날은 날씨도 무척 좋았다. 친구는 어디에선가 중형차를 빌려왔다. 운전경험이 거의 없는데 중형차를 몰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는 그의 말에 친구는 까짓것, 죽기밖에 더 하겠어?, 하고 말했다. 친구는 그러면서 양 귀의 귓불을 쭉 늘이는 동시에 혀를 내밀었다. 그는 친구를 향해 피식 웃었다. 친구는 갑자기 점퍼를 벗으며 손가락으로 남색과 흰색이 섞인 줄무늬 티셔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오늘을 위해 장만했지. 친구는 붉은색 말자수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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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출발할 때는 안개가 끼었다. 기분이 묘했지만 안개가 걱정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여배우들의 몸매 순위를 말하며 히죽대던 친구도 갑자기 숨을 죽였다. 차안에는 잠이 안개처럼 스며드는 것 같았다. 친구가 조용해지자 그는 꾸벅꾸벅 졸았다. 어느 순간 바퀴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친구가 붉은 꽃물을 내뿜고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는 친구와 관련된 기억을 모두 잊었다.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난 뒤 그는 소파에서 신문을 읽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마감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조금 피곤한 탓인지 자리에 눕자마자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자 죽은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가 늪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친구 얼굴은 상처를 입지 않은, 평소 그와 어울릴 때의 모습이었다. 친구는 가라앉는 그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친구가 그를 향해 무어라 말하는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놀라 눈을 떴다. 꿈인지 환시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거실의 벽시계 소리만 크게 들렸다.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 잠은 오지 않았다. 잠자는 자세를 바꿔 태아처럼 웅크려 잠을 청했다. 의식은 몽롱해지는데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수십 가지 이미지가 빠르게 돌아가는 영사기처럼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 이미지 속으로 시계 초침소리가 들렸다. 시계 소리는 빠르게 움직이는 심장박동소리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들이치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그를 점점 긴장시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불을 켜자 시계 초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피곤해, 그는 혼잣말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시계 초침 소리는 그의 귓가에서 점점 커졌다. 이번에는 시계가 그의 머릿속에 사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일어나 불을 켰다. 시계는 좀 전처럼 불을 켜자 원래대로 조용해졌다. 그는 방문을 나가 선반에서 망치를 꺼냈다. 벽시계를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전면 유리를 망치로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래도 무언가 부족했다. 다시 망치로 구석구석 부수었다. 초침이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마치 불을 켜면 죽은 척하는 바퀴벌레처럼 불을 켜니 소리를 내지 않던 녀석이었다. 창문을 열고 시계를 내던졌다. 시계는 3층 그의 아파트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시계를 던진 뒤 그는 비로소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새벽 4시가 넘어있었다. 평소 습관처럼 벽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려했는데 웬일인지 시계는 없었다. 불을 켜고 시계를 찾았다. 시계는 찾지 못했다. 대신에 거실에서 망치와 유리조각을 발견했다. 그는 잠깐 멍해졌다. 자신이 망치로 시계를 때리는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누운 채로 천장을 보며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와 창밖으로 지나는 차소리를 들었다. 웬일인지 새벽 기운이 조금 무섭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옆에 있어 그를 재워주었으면 싶었다. 그는 K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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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에게 무슨 꿈을 꾸는지 자주 물었다. 왜 잠을 잘 못 이루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그녀가 물을 때마다 별것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자꾸 추궁하듯 물어보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다 어느새 잠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녀의 집요함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럴 때는 꿈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띄엄띄엄 들려주었다. 그는 잘 기억나지 않아,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내가 시체더미 위에 있었어. 산처럼 쌓인 수백, 수천구의 시체더미 위에 나만 살아서 누워있는 거야. 처음에는 살았다고 좋아했어. 난 역시 운이 좋은 놈이다, 난 역시 무슨 일이 생겨도 살아갈 놈이다, 하고 생각했지. 젠장, 전장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우쭐한 마음까지 들었어. 시체더미에서 내려와 산책하듯 주위를 돌아보는 중이었어. 그때 어디서 떨어지는지 모르지만 시체가 하늘에서 시체더미 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거야. 시체는 하나 둘 많아지더니 점점 폭우처럼 떨어져. 갈수록 시체더미는 거대한 성처럼 높게 쌓여 가지. 시체가 계속 떨어지니 나는 어디에 머물러야할지를 몰라서 당황해. 한 시간이 지났나봐. 또다시 시체 떨어지는 소리에 하늘을 쳐다보니 시체의 얼굴이 보여. 몇 년 전 교통사고 때 죽은 친구인거야. 내가 얘기했던가? 큰 교통사고가 있었다고, 그때 친구가 죽었다고.”
“자기한테 그런 일이 있었어?”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나도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얘기해줄 수가 없었어. 이젠 한두 가지 이미지만 기억나. 그런데 이상하게 가끔 꿈에서는 그때 일이 선명하게 보여. 하여간 죽은 친구 얼굴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떨어지면서 점차 확대되어 보여. 마치 나를 덮칠 것 같은 기세로 말이야. 그 후에 떨어지는 시체 속에서 나는 죽은 엄마 얼굴도, 외할머니 얼굴도 보게 돼. 그곳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아. 아무리 돌아다녀도 시체가 떨어지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생명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아. 떨어지는 시체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해.
밤이 되니 시체산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암흑덩어리로 변해 버렸어. 그리고 빛 하나 없는 깊은 어둠이 오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시체산이 한 덩어리의 괴물로 변해. 그 괴물이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말이야.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안 나는 이제 죽겠구나 생각한 순간 깨어났어. 정말 말도 안 되는 꿈이지?”
그는 이마에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꿈이 다 그렇지 뭐.”
K는 졸음 섞인 말을 내뱉으며 다시금 그를 품에 끌어안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팔에 둘러싸인 채 창밖이 조금씩 환한 빛을 내뿜을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다시 잠이 든 듯 옅은 숨소리를 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나 정말 무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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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K를 떠올린 것은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K가 이별을 통보한 날, 그는 K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가지 말라고 빌었다. 너 아니면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낯 뜨거운 말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동거했다는 사실 외에는 거의 기억나는 일이 없었다. 가끔 K가 꿈에 나타날 때가 있지만 그는 개꿈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그는 좋지 않은 기억들은 빨리 잊으려 노력해왔다. 그러다보니 과거는 사전속의 단어설명이나 국사책의 연대표처럼 간략한 사실만 남았다. 1991년 엄마 죽음, 1994년 친구가 생김, 1996년 교통사고로 친구 죽음, 2005년 K를 만남, 2007년 K와 동거, 2009년 K 떠남.
갑자기 귀에서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를 떠올리다보니 귀가 간지러웠다. 처음에는 무슨 감각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방심하고 귀에 감긴 테이프를 만졌다. 테이프를 만지자 느닷없는 웃음이 터졌다. 웃음소리가 커졌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간지럼을 태우는 것 같았다. 발가락이나 겨드랑이가 아닌 귀에서 간지럼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왜 웃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큰 웃음이 나왔다. 그는 이불 속에서 몸을 굴리며 정신없이 웃었다.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무 크게 웃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그러다 정말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눈물이 흐르자 간지럼이 멈췄다. 간지럼이 멈추자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는 눈물은 또 왜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냈다. 아파. 그는 엄마를 향해 아프다고 외치는 어린 아이처럼 울먹였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그의 한쪽 손은 귀에 있었다. 그는 잘 잤다, 하고 외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밤의 일들이 어렴풋하기만 했다.
오후에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거즈를 풀고 귀에 불빛을 비춰보며 좀 아물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동안 전혀 아픔을 못 느끼셨어요?”
그는 의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또 교신 중이신가요?”
의사는 그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도 미소를 보였다.
“하나도 안 아팠어요.”
“정말 하나도 안 아팠다고요?”
의사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그는 의사의 시선을 피했다. 형사가 피의자에게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의사가 자신을 시험해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때 아팠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지난 일 아닙니까?”
그의 언성이 높아지자 갑자기 당황한 의사는 환자분이 잘 참는 것이 신기했을 뿐입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자신이 과한 반응을 보였다고 느낀 그는 얼굴 표정을 애써 부드럽게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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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팠어도 아프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게 우주인의 본분입니다.”
그는 의사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둘은 어색하게 웃었다.
새로운 거즈가 그의 귀에 부착되었다. 그의 귀는 이제 거의 흑색에 가깝게 변했지만 부풀어 오른 것은 좀 잦아든 것처럼 보였다. 상처가 비교적 심했습니다. 의사는 거즈 위에 흰색 테이프를 감아주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후유증이 올 수 있습니다. 며칠 후면 겉으로는 거의 나은 것처럼 보여도 사실 나은 게 아니에요. 겨울만 되면 간지럽거나, 귀가 계속 빨갛게 남아있거나 하는 식의 후유증이 있을 겁니다.
진료실을 나온 그는 병원 로비에 앉아있는 사내아이와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를 보았다.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의 귀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는 로비 소파에 두었던 자신의 서류가방을 꺼내면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팠니?”
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는 아이의 귀를 가리켰다. 아이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옆에 앉았던 여자가 참견을 했다. 애들끼리 장난치다 샤프로 귀를 찔렀대요, 얼마나 아팠겠어요? 여자의 말을 듣던 아이가 그때 생각이 난 듯 갑자기 눈물을 보였다. 여자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여자의 품에 안긴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병원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병원을 나서면서 그는 복도에 있는 구식 전신거울을 보았다. 거즈와 테이프를 감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그 모습은 낯설었다. 거즈로 싸인 귀는 수백 년 하얀 붕대 속에 보존된 미라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답답함을 느껴 귀를 가볍게 쳐보았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문득 환영처럼 간밤에 자신이 정신없이 웃다 갑자기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도무지 본인 같지 않았다. 그는 거울 앞에 좀 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보았다. 거울 속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낯선 이유는 동상 걸린 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테이프를 벗겨냈다. 매듭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거즈까지 떼자 아픈 귀가 알몸을 드러냈다. 오른쪽 귀를 주먹으로 두드려보았다. 여전히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좀 더 세게 쳐보았다. 주먹이 귀에 닿으면서 둔탁한 소리가 뇌를 울렸지만 아픔은 거의 없었다. 닫힌 문을 밀듯 귓바퀴와 안쪽 살을 한꺼번에 강하게 문질러보았다. 별다른 변화가 없자 빨래 짜듯이 그것을 꼭 비틀었다. 원숭이 엉덩이 꼬리를 만지는 것처럼 귓바퀴와 귓불을 쥐어흔들어도 보고 꼬집듯 잡아 뜯기도 했다. 그러자 마침내 귓바퀴에서 누런 고름이 흘러내렸다. 귀를 때리면서 닿은 볼도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는 이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머릿속에서 혈액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거울 속 그의 모습은 액체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복도 밖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주위는 내리는 눈처럼 조용하다. 그는 거울을 통해 현관문 밖에 내리는 눈을 잠시 응시한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 사이로 일그러진 모습의 그가 보인다. 거울에 눈을 흘기는 한 남자가 보인다. 다시 보니 그것은 그가 아니라 죽은 친구 같기도 하다. 그는 거울 속에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거울을 더듬었다.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빠르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의 주먹이 날아올라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영혼을 가진 것처럼 거울을 때렸다. 거울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다. 다행히 병원에서는 아무도 복도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토할 것 같아 상체를 숙였다. 구토는 나오지 않았다. 몸을 숙인 채로 부서진 파편 속에서 가장 길고 날카로운 거울 조각을 골랐다. 그것을 귀 뒤쪽에 가져갔다. 거울조각이 잘 들도록 칼날을 갈 듯 앞뒤로 움직여가며 서서히 그것을 눌렀다. 귀에서 끈적거리는 핏물이 붉은 폭죽처럼 솟아올랐다. 거울조각이 귓바퀴 연골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이것이 아픔인 걸까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