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손끝으로 집어보니 얇고 흐물흐물하면서도 고무처럼 탄력이 있다. 탄력이 있는 그만큼 이형(異形)의 것이 내뿜는 미끈거림이며 생생한 냄새가 손끝에서 피어오른다. 한편으로는 찢겨 나간 허물의 다른 부분도 어딘가에 있을 거다 싶어서 벌써 내 시선은 그걸 찾아다니고 있었다. 뱀은 안구의 막까지 탈피한다고 한다. 깨끗한 허물이라면 그 안구 부분이 아주 똑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어서 이쪽을 빤히 응시하는 허연 눈처럼 보인다고 한다.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뱀 허물을 본 적이 있다는 지인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 사람은 오십대에 백내장으로 눈 수술을 한 참이었다.
“갑자기 맞닥뜨렸으니 진짜 심장이 딱 멎는 줄 알았지.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고 있자니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라. 뱀은 껍질을 벗으면 새로운 몸이 될 수 있잖아. 새 몸이 되면 눈도 잘 보이겠지?”
아마도 그 사람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뱀의 탈피는 끔찍하도록 힘든 것이라고 한다. 껍질이 제대로 벗어지면 좋지만, 벗어지지 않으면 죽을 둥 살 둥 애만 쓰다가 죽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껍질을 벗기 전에는 끊임없이 물도 마신다고 한다. 몸이 자꾸 말라붙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탓인지, 뱀의 허물을 보니 아픔이 뒤섞인 친밀함이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감싸주고 싶었다.
올해도 제대로 살아남았니? 정말 좋구나, 뱀의 허물은. 목숨의 형태를 이렇게 무방비로 풀숲에 놔두고 떠난 뒤로 조금쯤 성장했니?
나 자신이 뱀이 되어 슬금슬금 돌 틈새나 숲을 미끄러져가는 모습을 생각했다. 새로 생긴 피부로 흙 위를 기어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안구까지 훌렁 벗어던지는 순간이면 틀림없이 인간에게는 없는 관능의 극치를 느낄 것이다. 쏘옥 빠져나와 새로운 몸이 된다면 먼로 워크든 문 워크든 멋지게 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허물을 벗는 뱀이 되고 싶지 않아? 인간은 불편하다니까. 자신의 피부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다니. 바짝 말라붙어도 자신을 벗어던질 수 없다니, 대체 무엇에 꽁꽁 묶여 있는 걸까, 인간은.
그런 생각을 해가며 나는 뱀의 허물을 겨울딸기 덤불에 살짝 돌려놓았다. 스테인리스 바구니가 가득해졌을 때, 손끝은 과육에서 배어나온 즙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일 년에 몇 차례를 이곳에서 보내면서 점점 익숙해지는 건 불이나 연못의 물, 흙덩이와 균류(菌類), 집 벽을 문지르는 나뭇가지의 수런거림 같은 것들뿐이다. 형태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이 한없는 것들의 한편에서는 분명하게 부식해가는 것도 있어서, 언제 갈아 끼웠는지 전화기에 세트해둔 팩스 감열지는 누렇게 변하고 아무렇게나 컵에 꽂아둔 볼펜은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바닷바람 때문인지 가위와 나이프와 호미는 금세 녹이 슨다.
이따금 창밖으로 낮달이 천천히 가로질러간다. 도쿄에서는 대개 못 보고 지나치는 낮달의 완만한 운동을 바라보며, 달빛이 와 닿는 건 그나저나 단위가 어떻게 되었던가, 초 단위였던 것 같기는 한데.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도 까맣게 잊었다. 광년에 관한 계산도 생각나지 않는다.
주기는 분명 29.5일이다. 여자의 생리주기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하던데, 가령 여자와 달이 밀접한 관계라 해도 나는 이미 아이를 잉태할 일은 없다. 남아 있는 관련은 죽을 때 찾아온다는 썰물뿐이다. 그것 역시 생사의 인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절박감 같은 건 하나도 없다.
달이 마음에 걸리는 건 아래쪽 바닷물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간조 때는 매일이라도 바닷가에서 바닷가로 돌아다니고 싶었다. 정처도 없는 산책을 위해서만 달의 궤도는 나와 친밀한 것이 되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달의 운행을 보기 위해 신문 판매점에 일주일이나 열흘씩, 이곳에 와서 머무는 동안만 부정기적인 배달을 부탁했다. 부정기 구독이라서 꼬박꼬박 하루씩 늦게 배달된다. 간조와 만조 시간 등은 항상 <내일의 일력>에 실리기 때문에 결국 내게 배달된 신문에는 ‘오늘의 천문 동향’이 실려 있게 된다. 하루씩 늦는 이 시간 감각이 뜻밖에 매우 기분 좋다는 것도 이 집에 계속 드나든 끝에 알게 되었다. 정치가의 뇌물 수수 사건도 음참한 소녀 유괴살인사건도 연예인의 불륜 소동도 하루 지난 신문에서는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중계방송의 미친 듯한 소동보다 훨씬 괜찮게 느껴진다. 제대로 세상을 ‘읽지 않게’ 된 뒤부터 신문은 오늘 내가 어떤 하루를 보낼지, 그 계획과 눈대중으로만 활용하는 마침 좋은 재료가 되었다. 즉 신문의 달력 란을 참고하여 그저 간조 때만을 기다리는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저녁때는 고양이의 귀가를 기다리고, 낮 시간에는 간조 때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데 익숙해지면 어두운 밤이 며칠이 계속되건 고통스럽지 않다. 달은 뜨는 것이다, 언젠가는. 오지 않는 남자나 아직 만나지 못한 남자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복잡하게 뒤얽힌 바닷가는 어디에나 V 자형이나 W 자형으로 굽어진 자국이 이어지고, 그 들쭉날쭉한 바닷가에는 물 위로 얼굴을 내민 바위와 갯벌이 있다. 그 덕분에 간조 때 발을 딛고 다니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리 때라면 몸을 드러낸 바위 틈새나 갯벌의 진흙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녹슨 닻이며 진흙투성이의 방수시계, 먼 바다에서 떠밀려온 듯한 다양한 색깔의 플라스틱조각, 유리 부자(浮子), 성게 껍질 같은 것. 장화 끝으로 그런 것들을 툭툭 건드려보고 때로는 손에 들고 햇빛에 비춰보며 나는 갯벌을 걷는다.
만조 때에는 알지 못하지만, 퇴적된 갯벌은 뜻밖에도 깊고 하루하루 썰물과 밀물에 씻기는 절벽은 수없이 많은 균열을 거칠게 드러내고 있다. 파도에 깎여 나간 수많은 동굴들 속을 나는 얼마나 많이 들여다보았던가. 그 모두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는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완만한 침식. 들여다볼 때마다 황홀함이 찾아온다. 좀더 무너져라, 복수해라, 내가 그 모습을 지켜볼 테니,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시대 같은 건 보고 싶지도 않고 트랜디한 것도 별로 갖고 싶지 않다. 오히려 너희를……, 너희만을 생각하고 싶다. 이곳을 지나쳐간 시간의 엄청남, 잔혹함……. 무의식적으로 거듭되는 운동이 지구의 한 귀퉁이를 붕괴로 연결하는 그 한 순간에 입회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정신없이 빠져든다. 운동과 붕괴를 연결하는 탯줄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 지금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을 내내 감지하고 싶었다.
그래, 시간이 문제인 것이다. 그 잔혹함과 비정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