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몸통이 겨울의 차가운 물에 씻겨 유난히 하얗게 맑다. 싱크대에 튀어 오르는 수돗물을 가늘게 줄이며, 이제 슬슬 베란다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을 만지는 손의 냉기뿐이라면 괜찮지만 15센티미터쯤 열어놓은 새시 문으로 바람이 들이쳐 발치를 휘휘 훑고 지나갔다. 석유스토브는 빨갛게 타고 있는데도 방이 좀체 따뜻해지지 않는다.
바깥은 진즉에 캄캄해졌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베란다 쪽으로 나가 새시 문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였다. 동네 홍보과에서 아침 여덟시와 저녁 일곱시에 내보내는 방송이 실로폰을 울리는 듯한 차임벨 소리와 함께 귀에 뛰어들었다.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요즘 며칠 동안 고양이는 일곱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대체 언제까지 놀아대려나 하고 어두운 정원을 내려다봤을 때, 나는 그 방송이 으레 하는 <내일의 행사>나 <주민의 탄생, 부보> 같은 소식이 아니라 “짐작이 가시는 분은……”이라고 몇 번씩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는 느릿느릿하지만 미묘하게 지그시 억누른 듯한 말투가 느껴졌다. 옆 동네에 사는 팔십대 할머니가 그저께 오후에 밭에 나간 채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남자 직원의 목소리는 할머니의 대략적인 키 외에도 입고 있는 옷은 팔이 달린 긴 앞치마에 검은 바지, 파란 털실 머플러에 머리에는 하얀 수건을 쓰고 있었다고 전하고, 혹시 목격한 사람은 소방단이나 동네 홍보과에 정보를 제공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목소리는 조용한 숲에 튕겨져서 메아리처럼 긴 꼬리를 끌었다.
산을 등 뒤로 짊어지고 있는 마을의 겨울밤은 살에 스미도록 춥다. 행방불명되고 마침내 방송하기까지 시간의 경과를 생각하면, 그간의 수색에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거처가 이 근처가 아니라는 것도 범위를 넓혀 정보를 얻어보려는 절박한 의도가 느껴졌다.
이 근처는 최근에 멧돼지가 출몰하고 있다. 등 뒤로는 산이지만 다른 한 쪽은 복잡하게 들쭉날쭉한 바닷가의 태평양 연안 마을이기도 하다. 곳곳에 깎아지른 절벽이며 급경사가 점재하고 있다. 밭에 나가던 길에 문득 생각이 나서 절벽 근처에 나갔다가 돌연 멧돼지를 만나 발을 헛디디는 일도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면 산중에서 발작이라도 일으켰던 것일까. 할머니의 행방불명을 전하는 방송은 물을 머금어 자칫하면 미끄러지는 산 흙의 감촉을 되살아나게 했다. 나도 비가 걷히고 훌쩍 산책을 나가 숲 속의 비탈길을 걸어가던 때에 구두가 미끄러져 균형을 잃었던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발밑에 땅바닥이 있는데도 몸이 기우뚱하자마자 의식은 깊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간다. 그것을 체험한 뒤로는 언제라도 비탈길을 걸을 때는 허리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이 몸이 허용하는 프레임에서 삐져 나갔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절벽 근처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경계심이 환기되었다.
방송은 몇 차례 똑같은 내용을 반복한 뒤에 뚝 멈췄다. 그때서야 나는 발치에 부드러운 것이 휘감기는 걸 느꼈다. 방송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에 돌아온 것이리라. 차가운 바깥 공기를 온몸에 두른 고양이가 내 발목에 몸을 비벼대면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시간까지 뭘 하고 다녔어?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쯤은 해야지. 잘 다녀왔습니다. 알겠니?”
고양이에게 말을 걸면서 나는 덧문과 베란다 문을 닫았다. 거의 한 시간이나 애를 태우며 기다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간다. 문고리를 잠그고 커튼을 치자 나무가 맞비비는 소리며 바람소리가 차단되어 실내는 조용해졌다. 천장 없이 시원하게 뚫린 이층까지 단숨에 석유스토브의 열기가 돌아 집 전체에 따스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속에 냄비 바닥에서 무가 춤추며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울리고, 고양이가 털을 다듬기 시작했는지 희미한 혓바닥소리가 섞였다. 익숙한 겨울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집은 해안선이 복잡하게 얽힌 반도의 한 귀퉁이, 작은 바닷가와 가까운 장소에 있다. 뒤편은 황폐한 대나무 숲. 급경사의 토지에 달라붙듯이 서 있다. 이곳에 70평의 토지를 샀을 때, 어머니나 여동생은 어이없어하면서 비슷한 질문을 던져왔다.
“대체 그 땅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해서 깜짝 놀랐어. 도쿄하고 미에 현이면 오가기도 힘들 텐데.”
“대체 무슨 심산으로 결정했대, 그런 산속을.”
“꿩이야, 꿩.” 나는 말했다.
어쩌다 가족끼리 미에 현 시마반도(三重? 志摩半島)를 여행했을 때(십일 년 전 오월의 일이었다), 우연히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바닷가의 산속, 나중에 뻔질나게 오락가락하게 되는 이 땅의 새파란 경사지 풀덤불 속에서 선명한 색채를 온몸에 두른 수컷 꿩이 오도카니 걸어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꿩은 심홍색 목덜미를 앞뒤로 흔들며 풀을 밟고 나가면서 모이를 쪼아 먹고 있었다. 백로나 산비둘기는 알고 있었지만 꿩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양화 속에서나 보던 새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진짜 꿩은 동양화보다 몇 배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여장 남자 같은 꿩이었다니까. 그건 기적 같은 경이로움이었어. 꿩을 보면 재수도 좋다잖아. 옛 이야기에 나오는 모모타로의 시종인지도 몰라”라고 말했지만, 그 기적을 조우했던 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혼자뿐이었다. 비탈이 진 길 뒤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 택시를 기다리게 해놓고 아래로 내려갔던 건 나 혼자뿐이었기 때문에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도 여동생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도 여동생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꿩이라고? 꿩 같은 건 못 봤는데?”
“아아, 아까워라. 정말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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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이나바 마유미(?葉?弓)
아이치 현 출생. 아이치 현립 쓰시마 고등학교 졸업. 1973년 「푸른 그림자의 아픔을」으로 여류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오래도록 무명으로 보내다가 첫 단편집이 나온 것은 1981년이었다. 그 후 1990년 『호박(琥珀)의 마을』이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92년에 스즈키 이즈미와 아베 가오루 부부를 그린 실명 소설 『엔드리스 왈츠』로 여류 문학상, 1995년 『목소리의 창부(娼婦)』로 히라바야시 다이코 문학상, 2008년에 단편 「청각」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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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양윤옥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히라노 게이치로 『일식』 번역으로 2005년 일본 고단샤의 노마문예 번역상을 수상했다. 그간 번역한 책으로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 『장송』 『센티멘털』,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마루야마 겐지의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납장미』,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 『칼에 지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장미도둑』,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스무 살 도쿄』 『올림픽의 몸값』, 히가시노 게이고의 『유성의 인연』 『붉은 손가락』 『악의』 『졸업』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이치카와 다쿠지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연애사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1,2), 그 외 『도쿄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약지의 표본』 등이 있다.